■ 기타/그때 그시절

임화수의 사형집행과 야인시대 실존 인물들의 사진들

야촌(1) 2011. 2. 17. 18:55

임화수의 사형집행과 야인시대 실존 인물들의 그 당시 사진들...

 

임화수(林和秀, 1921년~ 1961년 12월 21일)는 대한민국의 정치 깡패이다. 본명은 권중각(權重珏)이다. 

이승만 정권 아래에서 정치 깡패로 악명을 날렸다. 영화 제작에 관여하였고, '연예계의 황제'라는 별칭이 있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들....오늘날 그들의 의리와 정의가 그리워 짐은 무었일까!?

  바람처럼 스쳐간 그들의 정열과 낭만...알다가도 모를 일이다.ㅎ

 

 

김좌진 장군 모습

 

김두한 아버지인 백야 김좌진(金佐鎭) 장군,
[생졸년] 1889년(고종26)~1930년


만주 무장독립군의 총사령관으로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해외 민족유일당 운동을 전개했다. 1916년 광복단에 가담하여 활동했다.

1918년 만주로 건너가 대종교에 입교하고, 3·1독립선언의 전주곡이 되는 무오독립선언서에 39명 중 한 사람으로 서명했다.

1920년 10월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만나 전투를 벌였다.
10월 20~23일까지 계속된 10여 차례의 전투에서 일본군 3,000여 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다음백과>

 

↑1920년 청산리 전투 승전 기념사진

 

↑청년 시절의 김두한(金斗漢,1918년 5월 15일~1972년 11월 21일)/향년54세

 

↑김두한 의원 가족(가운데는 젊은날 김을동(金乙東=1945년 9월 5일~ )씨의 모습.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한 김두한

 

↑김두한의 첫사랑 박인애 여사

 


시라소니 이성순(李聖淳)’                           ↑이정재(李丁載), 

 

 

●시라소니 ‘이성순(李聖淳)’

 

이성순(李聖淳, 1916년 2월 29일 ~ 1983년 1월 25일)은 평안북도의 신의주에서 전주이씨 가문의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시라소니라는 별칭으로 불린 대한민국의 협객이다. 해방 정국에서 서북청년단 감찰부장을 맡았고 독립운동가 신익희의 경호실장을 맡았다. 만화가 방학기 가 쓴 만화책으로 다수 일화가 소개되었다.

 

그는 가계가 기울자 17세부터 신의주와 만주 사이를 오가는 기차에서 밀수로 생계를 유지했다.

해방 이후 남한에서 남북청년단감찰부장직, 한국전쟁 당시 북파공작원으로 활동하였고 전후 선거 운동에 참여하였다. 1953년 동대문파 이정재에게 동대문 점포 양도를 요구하다 동대문 사단에게 린치당하여 중상해를 입었고, 이정재의 재종제이자 부하인 이석재에게 한 번 더 폭행당했다.

 

이후 개신교로 귀의하여 5.16 군사 정변 때 중부경찰서로 연행되었으나 교인들의 탄원으로 석방되었다. 시라소니는 옛 부하(서북청년단)들을 교화시키는 생활을 하며 딸과 친척의 도움으로 단칸 셋방에서 지냈다. 1983년 1월 25일 서울특별시 성동구 군자동(현재는 광진구 관할) 자택에서 사망하였으며 27일 오전 11시 발인되었다.

 

 

●이정재(李丁載),

 

이정재(李丁載, 1917년 1월 6일 ~ 1961년 10월 19일)는 경기도 이천군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중앙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가 휘문고등보통학교로 전학하였다. 그 후 서울 신흥대학(新興大學)(경희대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였고 대한민국의 제1공화국 시절 정치 주먹으로 악명을 떨쳤다.

 

그는 씨름을 잘하여 고향인 이천에서 열린 전국 씨름 대회에서 소를 10마리나 가지고 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후 태평양 전쟁으로 일제의 강제징용장을 받고 경성으로 상경하여 근로보국대인 김두한의 반도의용정신대 서기를 보다가 김두한의 추천으로 경찰특채가 되어 경찰이 되었다.

 

 

↑구마적                                                           ↑신마적 ‘엄동욱’

 

↑하야시                                                     ↑김영태 부부

 

↑임화수(林和秀),                                               ↑유지광(柳志光)

 

 

● 유지광(柳志光)

 

경기도 의천에서 출생한 유지광(柳志光, 1927년 ~ 1988년 11월 12일)은 단국대학교 정치과 전문부 3학년 중퇴 이후 병역은 육군 갑종사관으로 복무하여 육군 중위로 예편하였다. 제1공화국 당시 정치폭력으로 악명을 떨친 정치깡패이다

 

그는 이정재, 곽영주와 더불어 이천 3인방으로 불리었고, 이정재와는 사돈관계였다. 이정재의 권유로 훗날 화랑동지회가 되는 전신 삼우회라는 별동대 조직을 만들고 주먹세계에 입문했고, 행동대장으로 활약하면서 1957년 장충단집회 방해사건 등 이승만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자들에게 테러로 악명을 떨쳤다.

 

그러나 4·19 혁명으로 제1공화국의 몰락이후 허정 과도정부와 제2공화국에서 구형 10년,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1961년 5·16 군사군테타 이후 다시 재 구속되었다.

 

이정재, 임화수, 곽영주, 신정식, 최인규 등은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유지광은 처음엔 사형 선고를 받은 뒤 무기징역형에서 징역 15년형으로 감형 받고 5년 6개월간 복역 중 감형으로 석방되었다.

 

1978년에 고향인 이천으로 낙향하였다. 고향에서 무명의 이천농고축구팀을 전국고교 축구대회에서 4강 진출하는데 공헌하는 등 이천 고향 발전에 활동을 벌였다. 1988년 11월 12일 결혼식 주례 도중 심근 경색으로 사망하였는데 그의 장례에는 대한민국,·말레이시아,타이완,홍콩,마카오의 폭력조직들은 물론 일본의 야쿠자들이 참석하기도 하였다.

 

 

↑종로 꼬마                                                           ↑마루오까

 

↑신마적

 


 

 

 

 

 

 

 

 

↑이정재(李丁載),

 

↑임화수(林和秀)

 

↑새해 이승만 대통령 내외에게 인사 하러간 임화수(동그라미)

 

↑곽영주(郭永周) 사형집행중

 

 

●곽영주(郭永周). 

 

곽영주(郭永周, 1924년 1월 10일 ~ 1961년 12월 21일)는 대한민국의 경찰인으로 지금의 대통령 경호실 실장과 같은 직급인 경무대 경호책임자였다. 1924년 경기도 이천 출생으로 이정재, 유지광과 더불어 이천 3인방이었던 곽영주는 경성공립직업학교(지금의 서울과학기술대학교)를 졸업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동향 선배인 이정재의 도움으로 수도경찰학교를 입교 및 수료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의 눈에 띄어 발탁되었다.

 

 이후 이승만의 총애를 받아 막강한 권력으로 '부부통령'으로 불리었다.

1956년 국방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동향 출신의 선배인 이정재와 막역하여 정치깡패를 비호하기도 했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 학생들이 경무대 앞에서 시위를 하자, 곽영주가 이승만 대통령의 안전을 위해 학생들에게 발포 명령을 내려 경무대 앞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후 제1공화국이 몰락하고 제2공화국이 들어서자 구속되어 5.16 군사정변 이후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정치깡패를 비호와 권력남용, 4.19 혁명 당시 경무대 앞으로 밀려온 시위대에 대해 발포 명령 등으로 법정에서 사형선고 판결로 1961년 12월 21일에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사형 집행후 앞에서부터 이정재, 임화수, 곽영주 사체 모습.

 

 

↑이기붕 부통령과 박마리아 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