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타/그때 그시절 55

구 청와대 본관 건물(옛 경무대)

↑눈 내린 경무대(1956년) ↑1960년대 경무대 모습 ●경무대(景武臺) ☀위치 : 경성부(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와대로 1) ☀상태 : 철거 ☀기공 : 1937년 3월 22일 ☀완공 : 1939년 9월 20일 ☀철거 : 1993년 10월 15일 경무대(景武臺) 총독관저는 1937년에 착공하여 1939년 경복궁 북쪽(현재 청와대 부지)에 건립되었다. 본래 1868년(고종 5년)에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후원 자리에 4개의 건물이 지어졌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경무대였다. 조선총독부는 경무대를 비롯한 경복궁 후원 건물들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총독관저를 신축하였다. 관저의 명칭은 헐린 건물 중 하나인 경무대의 이름을 땄다. 이름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경복궁의 ‘경(景)’과 궁의 북문인 신무문의 ‘무(..

우리나라 TV보급연대

↑금성라듸오(금성사) 6.25전쟁 이후 1950년대 말까지는 리시버(receiver)가 보급이 많이 되었고 우리나라 최초 국산 라듸오 보급년도는 1959년 이고 1960년 초 까지는 농 촌에는 일개면(面)에 몇대 정도 보급이 되어있었다. ↑금성텔레비젼 광고모델 ↑17인치 흑백TV 세계 최초의 컬러 TV방송은 1953년 미국에서 NTSC방식의 TV방송을 개시 하였고, 일본은 1960년대이며, 우리나라는 제5공화국 전두환대통령 시절인 1980년 12월에 우여곡절 끝에 비로소 컬러 TV방송을 개시하게 된다. 이때만 하더라도 흑백 수상기가 백 만대 이상 보급되어 있는 시점이라 에너지 절약 및 수상기 교체에 따른 많은 비용 문제가 야기되었으나, 사람들의 새로운 컬러 영상 문화에 대한 욕구를 잠재울 수는 없었다

옛 중앙청 건물

옛 중앙청 건물 [사진자료]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의 국권피탈과 함께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한 후 피 점령지에 대한 점령국의 모던 것을 총괄 관장하는 기구를 설치하기 위해 경복궁 일부를 헐고 이곳에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청사를 설치하였다. 1945년 일본이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大東亞戰爭,1941년부터 1945년 까지 일본과 연합군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서 패망함에 따라 이 땅에 미군정이 들어서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됨으로서 중앙청(中央廳), 그 후 국립중앙박물관(國立中央博物館)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우리사회의 사상적 대립, 남북문제(좌우대립), 동서 문제는 일제 식민지역사에서 그 깊은 뿌리가 있다. 본 자료는 참고용으로 정리해 둔다. 서울포스트 자료 및 인터네 등 불특정 일부자료를..

[사진]110 년전 미국 유명도시들 모습

110 년전 미국 유명도시들 모습 A selection of photos of the largest U.S. cities, made about 110 years ago. ↑우드워드애비뉴, 1917 년 디트로이트 - 미시간 ↑애틀랜틱 시티, - 1910년 ↑멤피스의 주요거리, 도로Gayoso, 1910 년 북쪽. ↑Forsyth Street, Jacksonville, Florida, in ↑The beach in Atlantic City, 1915. ↑Grant Avenue after an earthquake in San Francisco in 1906. ↑Carts for transporting dairy Thompson, Washington, 1927. ↑Washington, DC, 1914. ↑191..

부산 비석마을 - 서구 아미동

부산 비석마을[서구 아미동] 공동 묘지위에 삶의 터가되다. 부산시 서구 아미동...이곳은 국제시장과 부산대학병원을 끼고 있어서 부산사람이라면 한번쯤은 가봤을 곳이다. 아미동 2가의 산복도로변의 비석마을은 묘지 위에 들어선 마을이다. 아미동 비석마을은 부산의 역사를 좀 더 단적으로 보여주는 동네이다. 이곳은 한국전쟁 때 피난 온 사람들이 마을을 꾸렸고, 그 이전에는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일본인들의 공동묘지가 있었다. 비석마을의 골목을 따라 거닐다 보면 각진 모양의 상석이나 비석들은 가파른 계단의 디딤돌로 쓰이거나 옹벽 또는 집의 주춧돌 등으로 활용되었다. 이곳은 1910년 한일합병 후 일본인들이 조선 수탈의 목적으로 거대한 군사시설 매축(埋築)과 철도창 및 부산역 준공과 함께 발전소를 건립하게 되자 따라서 ..

여의도 개발

여의도 비행장이 폐쇄된 이후 김현옥 서울특별시장이 주택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신시가지 개발을 목적으로 여의도 개발계획을 세웠고, 1970년 2월 10일 밤섬폭파로부터 불과 110일 만에 여의도 윤중제(제방)가 준공되었다. 당시 김수근은 그의 도쿄대학 은사였던 단게 겐조(丹下健三)의 '도쿄계획 1960'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여의도종합개발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지금 보아도 상당히 SF적인 입체도시 계획이다. 그러나 윤중제 공사만으로도 서울시재정은 상당한 압박을 받고, 김현옥이 벌인 다른 동시다발적 공사 중 와우아파트 붕괴사고가 일어나면서 김현옥은 경질된다. 김현옥의 후임인 양택식 서울시장은 김수근의 입체도시 계획을 완전히 갈아엎고 여의도를 평면계획으로 변경하여 일반에 분양하는 데 주력했다. 물론 서울..

포화 속에서도 삶은 계속됐다(1952년 컬러사진)

재미동포 곽홍씨(80세 미국 볼티모어 거주)가 미 해병대 의무대 군의관으로 재직했던 시절 당시에는 귀했던 컬러 슬라이드 필름으로 기록해 놓은 사진입니다. 《1952년 가을 운동회》의무대가 김포 통진에 주둔했을 때 의무대 앞 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운동회 풍경. 《남대문로》의 군용트럭 왼편 건물이 조선은행(지금의 한국은행)》과 전면에 중앙우체국 건물이 보인다. 중앙우체국 뒤로 멀리 명동성당이 보인다. 1952년 여름. ↑《부산의 송도 바닷가》신나게 뛰어노는 어린이들 뒤로 적산가옥들이 보인다. 1952년 가을. ↑설날 색동옷을 차려입고 널뛰기를 즐기는 아이들. 1953년 설날. ↑6.25 전쟁 중이라 옷감이 흔치 않던 시절 미군 담요로 만든 옷을 입고《덕수궁에 온 소년들》. 1952년 초. ↑부산에 피난가 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