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 2038

이 익재 한시(李益齋漢詩)

익재 이제현 益齋 李齊賢(1287∼1367) [1] 簡李員外(간이원외 : 이원외에게 편지하다) - 李齊賢 吾生如寄耳(오생여기이) 우리의 삶은 더부살이지 方寸只君知(방촌지군지) 조그만 마음 그댄 알겠지 歲晩深期在(세만심기재) 나이 들어서 깊어진 바램 東歸定幾時(동귀정기시) 동쪽 돌아감 몇 때나 놓여 [2]書天壽僧院(서천수승원 : 천수승원에 적다. - 李齊賢 待客客未到(대객객미도) 손님 기다려 손님 아니 와 尋僧僧亦無(심승승역무) 스님을 찾아 스님도 없어 惟餘林外鳥(유여림외조) 오직 넉넉해 숲 밖에 새가 款曲勸提壺(관곡권제호) 정성에 굽어 술병 끌게 해 정성관 [3]招崔壽翁(초최수옹) 최수옹을 부르며-李齊賢 琴書一茅屋(금서일모옥) 거문고에 책 한 초가집에 高臥樂幽獨(고와락유독) 높이 누우니 즐김 혼자서 故人..

익재 이제현 詩 모음

■고려를 지킨 위대한 정치가요 대학자의 주옥 같은 명시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 1287∼1367) 선생은 김해(오늘날의 마산, 창원, 진해 지역)에서 태어나 개성의 철동과 자남동의 죽림당에서 사시다 만년에는 지금의 산소 아래인 장풍군 십탄리 서원촌에 사시었다. 사후 선생께서 사시던 집터에다 1662년(현종 3) 서원이 건립 되고, 24년 후인 1686년(숙종 12)에 ‘道山(도산)’이라는 사액을 받아 선현배향(先賢配享)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그 후 문헌 고증으로 보아 후손들과 전국 유림에서 1939년에 복설 계획을 추진 중건되었으나 6.25전란으로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익재(益齋) 선생의 시(詩)를 접하다 보면 한편의 詩속..

상서공 경모비문 역문(尙書公景慕碑文 譯文)

상서공 경모비문 역문(尙書公景慕碑文 譯文) 상서공(尙書公)의 휘(諱)는 과(薖)니 신라원신(新羅元臣) 이알평(李謁平)의 후손이요. 고려명신(高麗名臣) 좌복야(左僕射) 호(號 ) 열헌(悅軒) 휘(諱) 핵(翮)의 손자요. 예문관대제학검교정승(藝文館大提學檢校政丞) 시호 문희(文僖) 호(號)는 송암(松巖) 세기(世基)의 아들이요. 문하평리인정(門下評理仁挺) 임해군(臨海君) 시호는 문정(文井) 호(號) 동암(東菴) 진(瑱)의 조카요. 동평장사(同平章事) 시호는 문효(文孝). 호(號)는 국당(菊堂). 휘(諱)는 천(蒨). 부정공(副正公) 휘(諱) 매(邁)의 아우요. 사인(舍人) 휘(諱)는 조(蓨)의 형이다. 가락부원군(鴐洛府院君) 호(號) 이암(怡庵) 관(琯)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시호는 문충(文忠) 호(號) 익..

이훤 아내의 묘표(李煊妻墓表)

[생졸년] 1663년(현종 4) ~ 1680년(숙종 6) 유인(孺人) 민씨(閔氏)는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 정중(鼎重)의 딸이다. 어머니는 이씨(李氏)로, 숭정(崇禎) 계묘년(1663, 현종 4) 8월 11일에 민씨를 낳았다. 말을 할 줄 알면서부터 어른들이 볼 때마다 그 현명하고 정숙함을 칭찬하였다. 점차 자라면서 계부(季父) 영돈녕부사공(領敦寧府事公) 유중(維重)이 아이에게 지식이 있음을 기뻐하며 더욱 장려하고 사랑하였다. 나이 17세에 경주(慶州) 이훤(李煊)에게 시집을 갔다. 시부모가 몹시 아끼며 항상 말하기를 “이 며느리가 나를 잘 섬기니, 익힌 예법이 법도에 맞구나.”라고 하였고, 적고(嫡姑)의 상을 당해 또 슬픔과 공경을 모두 극진히 하는 것에 감탄하였다. 경신년(1680, 숙종 6) ..

공인 이씨 묘지명 병서(恭人李氏墓誌銘 幷序)

[생졸년] 함안이씨『咸安李氏, 1521년(중종 16) ~ 1614년(광해군 6)/壽93歲』 공인 이씨 묘지명 병서(恭人李氏 墓誌銘 幷序) 내암 정인홍 찬(來庵 鄭仁弘 撰) 공인은 성이 이씨(李氏)이고 본관이 함안(咸安)이다. 그 선조들은 과거에 급제하여 명성과 인망이 있는 사람이 많았다. 증조부 이인형(李仁亨)은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간을 지냈다. 조부 이핵(李翮)은 사마시에 합격하여, 자헌대부 형조판서 문간공 김종직(金宗直)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이분께는 열부로 정려가 내려졌다. 부친 이희철(李希轍)은 통정대부 목사 하우치(河禹治)의 딸과 결혼하여 1남 3녀를 낳았는데 공인이씨는 그중 막내였다. 태어날 때부터 맑고 아름다웠으며 단정하고 성실하였는데, 어려서 결혼을 하여 강씨 집안으로 시집을 가서 별제 강공..

이조 참판 이공 윤 묘표(贈吏曹參判李公 潤 墓表)

증 이조 참판 이공 윤 묘표(贈吏曹參判李公 潤 墓表)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충절을 바쳤던 사람들이 수없이 서로 이어졌는데 금산(錦山)의 전투를 으뜸으로 일컫는 것은 아마도 중봉(重峰) 조 선생(趙先生 조헌(趙憲))의 충렬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때에 목숨을 바친 7백 의사(義士)와 같은 사람은 세상에서 능히 그 이름을 거론함이 없으니 이는 한스러워할 만한 일이다. 지난 임진년(1892, 고종 29)에 성상(聖上)께서 나라를 중흥한 옛 공훈을 감동스럽게 생각하여 국난에 순국하였던 신하들을 찾아내어 제사를 지내고 정표(旌表)를 내려주되 사전(祀典)에 기재되지 않은 것까지 모두 차례로 제사 지내게 하였다. 이에 초야에 매몰되었던 자취가 약간씩 드러나니 퇴사암(退思庵) 이공(李公) 휘 윤(潤)이..

고려 문인 이제현

이제현(李齊賢)의 보타산(普陀山) 기행시(紀行詩) 연구(研究) 초록(한국어) 고려 문인 이제현『李齊賢 1287sus(충렬왕13) ~ 1367년(공민왕 16)』은 28세 때(1314) 원나라에 머물고 있던 忠宣王의 부름을 받고 燕京에 가서 30세 때 四川省 峨眉山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다녀왔으며, 이때 지은 시문들을 『西征錄』이라는 이름으로 펴냈다. 또 33세 때는 浙江省 普陀山에 황제의 香을 하사하러 가는 충선왕을 모시고 강남을 여행할 기회를 가졌다. 이때도 오가는 길에서 만난 승경과 고적을 시로 읊어 『行錄』 한 권을 지었다. 『행록』의 일부가 현재 그의 문집 『益齋亂藁』에 남아있는 바, 본 연구에서는 이 작품들을 중심으로 강남 여행의 경로와 시세계를 분석하였다. 이제현은 燕京과 杭州 간의 京杭運河를 ..

도안근재(悼安謹齋)

■ 만(輓) 이제현(李齊賢) 내가 젊은 시절 날마다 종유한 이로는 / 益齋少日日相從(익재소일일상종) 오직 당지와 졸옹뿐이었네 / 只有當之與拙翁(지유당지여졸옹) 40년 사이 모두 죽어 버렸으니 / 四十年來俱物化(사십년래구물화) 홀로 눈물 흘려 서풍에 뿌리노라 / 獨將衰淚洒西風(독장쇠루쇄서풍) [註解] [註01] 만(輓) : 이 작품은 《익재난고》 권4에 〈도안근재(悼安謹齋)〉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계명대 소장 1432년(세종 14) 원주 간행본 익재난고와 역옹패설이 함께 2016년 2월 23일 정부에서 보물로 지정 되었다. [註02] 당지(當之) : 안축의 자이다. [註03] 졸옹(拙翁) : 최해(崔瀣, 1287~1340)로, 졸옹은 그의 호이며, 또 다른 호는 예산농은(猊山農隱)이다. 자는 언명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