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지명(墓誌銘)

공인 이씨 묘지명 병서(恭人李氏墓誌銘 幷序)

야촌(1) 2022. 6. 1. 20:19

 [생졸년] 함안이씨『咸安李氏, 1521년(중종 16) ~ 1614년(광해군 6)/壽93歲』

 

공인 이씨 묘지명 병서(恭人李氏 墓誌銘 幷序)

 

내암 정인홍 찬(來庵 鄭仁弘 撰)

 

공인은 성이 이씨(李氏)이고 본관이 함안(咸安)이다. 그 선조들은 과거에 급제하여 명성과 인망이 있는 사람이 많았다. 증조부 이인형(李仁亨)은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간을 지냈다.

 

조부 이핵(李翮)은 사마시에 합격하여, 자헌대부 형조판서 문간공 김종직(金宗直)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이분께는 열부로 정려가 내려졌다. 부친 이희철(李希轍)은 통정대부 목사 하우치(河禹治)의 딸과 결혼하여 1남 3녀를 낳았는데 공인이씨는 그중 막내였다.

 

태어날 때부터 맑고 아름다웠으며 단정하고 성실하였는데, 어려서 결혼을 하여 강씨 집안으로 시집을 가서 별제 강공헌(姜公憲)의 부인이 되었다. 강공헌은 지사 강현(姜顯)의 둘째 아들이다.

 

시부모를 봉양하면서 효성과 공경을 다하였으며 군자의 아내로서 덕에 어긋남이 없었다. 규문 안에서는 화목하면서도 엄격하여 사람들이 이간질하지 못했다. 천성이 화려하거나 성대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기름진 음식을 즐기지 않았으며 사람을 접할 때는 온화하고 조심스러웠다.

 

하인이나 종이 아니면 이름을 부른 적이 없었고, 일을 당하면 반드시 의리상 온당함을 물어서 조금이라도 의리에 해로운 경우에는 단연코 하지 않았다. 일찍이 자손들을 훈계하면서 “이익을 탐내서 행동하면 재앙이 그 몸에 미칠 것이니, 너희들은 이런 행동을 하지 않기 바란다.”라고 하였다.

 

의로움과 이로움을 분간하는 데 엄격하여, 착실하게 공부하는 선비라도 더 나은 사람이 없다. 따라서 완순함이 아래로 미쳐 옛 현부인이라 해도 더할 수 없었다.

 

별제공이 소실을 얻어 자식이 있었는데, 어루만지고 기르는 것이 자신의 소생과 다름이 없었고, 자기가 얻은 부모님의 종들을 넉넉히 나누어주면서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나이가 90세가 넘도록 선조의 제삿날을 맞이하면 반드시 생선과 고기를 치우고 소채만 먹었으니, 그 지행과 정력은 사대부 집안 여자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만력(萬曆) 42년(1614, 광해군6) 5월 9일에 돌아갔으니 향년 94세였다.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칭(偁)이고 딸은 노사악(盧士諤)에게 시집갔다. 노사악은 자헌대부 판서 노진(盧禛)의 넷째 아들인데, 후사가 없다. 칭은 별검 하춘년(河春年)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과 딸을 낳았는데, 장남은 수황(受璜)이고 차남은 응황(應璜)이다.

 

수황은 충순위 신여성(辛汝誠)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하여 딸을 하나 낳았는데 강응명(康應明)이 사위이다. 응황은 군수 노사회(盧士誨)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 순(恂)을 낳았다.

 

순은 선교랑 정두준(丁斗俊)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요절하였다. 응황은 소실에서 난 따님이 있는데 모두 어리다. 사위는 형조 정랑 박광선(朴光先)인데 종주(宗冑), 종윤(宗胤) 두 아들을 두었고 이들은 모두 일찍이 문과에 합격하였다.

 

종주는 이조 좌랑이 되어, 전 정언 이언영(李彦英)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 둘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종윤은 예문관 봉교가 되었는데 가선대부 참판 이성길(李成吉)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응황은 자못 사우(士友)들 사이에 이름이 알려졌으며, 공인 또한 시종 응황에게서 봉양 받다가 돌아갔다. 단성현(丹城縣)에 있는 증조 참판공 묘 아래에 붙여 매장하였다가 자리를 옮겨 진주(晉州) 진성현(晉城縣) 오곡(烏谷) 태좌(兌坐) 진향(震向) 언덕에 이장하였는데, 그 언덕에는 남편 강공헌(姜公憲)의 묘가 있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공인의 맑은 자질과 / 恭人淑質。
덕행은 / 維德之行。
이미 집안사람에게 마땅하여 / 旣宜家人。
복이 후손에게 내렸네 / 福垂裔胄。


오산의 옛 땅 / 烏山舊土。
실로 이에 마련하여 세웠으니 / 實是營立。
넉 자 봉분 하나 / 四尺一封。
향기를 전하며 없어지지 않으리라 / 流芳不朽。

 

[주01] 강공헌『姜公憲, 1523년(세종 2)~1583년(선조 16)/향년60歲』자는 중장(仲章), 호(號)는 경재(儆齋)이다. 1544년(중종39)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벼슬은 금부 도사, 사포서 별검(司圃署別檢), 별좌(別坐)에 이르렀다. 저술로 《경재집》이 있다.

 

내암집 제13권 / 비문(碑文)

 

[原文]

 

恭人李氏墓誌銘 幷序

 

恭人氏李。咸州籍也。其先祖登第有聞望者多。曾大父曰仁享。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王父曰翮。登司馬。娶資憲大夫刑曹判書文簡公金宗直之女。門以烈婦旌。考諱希轍。娶通訓大夫牧使河禹治。生一男三女。恭人其少也。生而淑美端愨。少成筓而歸姜氏。爲別提公憲配。公憲知事顯之等二子也。奉舅姑盡孝敬。配君子無違德。閨門內和而嚴。人不間焉。性不喜華盛。不嗜粱肉。接物溫謹。若非僕隸。未嘗名呼。當事必問義當否。纔涉害義。截然不爲。嘗以誡子孫曰。放利而行。災逮夫身。不願汝輩有此行。嚴於義利之分。雖士子有着實功者。無以過也。故婉順逮下。雖古賢夫人。亦莫之加。別提公取旁室有子。撫育均於己出。以己所得考妣奴僕。優分與。無難色。年踰九旬。遇先祖考諱日。必撤魚肉啖蔬菜。其志行精力。非士女所及也。萬曆四十二年五月九日終。享年九十有四。有一男一女。男曰偁。女適盧士諤。資憲大夫判書禛四子也。無後。偁娶別檢河春年女。生男女。長曰受璜次曰應璜。受璜娶忠順衛辛汝誠女。生一女。康應明其壻也。應璜娶郡守盧士誨女。生一男恂。恂娶宣敎郞丁斗俊女。生男夭。應璜有小家女。皆幼。女壻曰刑曹正郞朴光先。生二男宗胄,宗胤。皆早登第。宗胄爲吏曹佐郞。娶前正言李彦英女。生二男皆幼。宗胤爲藝文館奉敎。娶嘉善大夫參判李成吉女。應璜頗知名士友間。恭人亦終始就養以歿。祔葬于丹城縣境曾祖參判公墓下。更物土。移窆于晉州之晉城縣烏谷兌坐震向之岡。岡有別提公墓焉。銘曰。

恭人淑質。維德之行。旣宜家人。福垂裔胄。烏山舊土。實是營立。四尺一封。流芳不朽。<끝>

 

내암집 > 來庵先生文集卷之十三 / 碑文

 

 

사진>Ⓒ화성저날

위의 묘는 강공헌의 아버지 강현(姜顯/공조판서)묘이고 아래묘 좌측이 강공헌『姜公憲, 1523년(중종 18)~1583년(선조 16)』 묘이고 우측이 공인(恭人) 함안이씨 『咸安李氏, 1521년(중종 16) ~ 1614년(광해군 6)/壽93歲』 묘이다. 주소는 경기도 화성시 정남면 덕절리 산103-7이다. 진주시 진성면에서 이장했다.

 

강공헌과 함안이씨 부부의 사위가 1631년(인조 9) 3월에 이른바 광해군 복위사건에 연루되 서울 당고개에서 처형된 고령 우곡면 됮 마을의 소고 박광선笑皐 朴光先, 1562년(명종 17)~1631년(인조 9), 장령』이고, 외손자가 1623년(인조 1) 계해정변인 인조반정때, 참수된 승지 박종주朴宗胄, 1591년(선조 24)∼1623년(인조 1)/박광선의 장남』이고 외증손이 ‘ 광해군 복위사건’때 참수된 박희집朴禧集, 1607년(선조 40) ~ 1631년(인조 9)/박종주의 장남』 경집(慶集)/박종주의 차남)이다.

 

강공헌의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공조판서를 역임한 신안 강현(新安 姜顯, 1486년(성종 17)~1553년(명종 8)이다. 경상도 단성현(오늘날 산청군 단성면) 출신이다. 함안이씨 시아버지이다.

 

글>고죽

 

● 공조판서 강현『姜顯, 1486년(성종 17)~1553년(명종 8)』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현지(顯之), 호는 신안(新安), 시호는 혜평(惠平). 경상남도 산청 출신으로 강흥국(姜興國)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강행(姜行)이고, 아버지는 강문회(姜文會)이며, 어머니는 김윤(金允)의 딸이다.


1513년(중종 8)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17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때 김안로(金安老)의 간사(奸邪)를 논핵하는 대간들의 의논이 일치하지 않자 극언하는 상소를 올렸고, 이로 인해 진도로 유배된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 전라좌도어사로 나갔으며 교리·부응교·헌납·응교 등을 거쳐, 1526년 재해가 휩쓴 평안도에 순어사(巡御使)로 파견되었다. 1530년 종부시정으로서 충청도어사로 나갔으며, 1532년 직제학에 승진되었다. 이듬해 대사성·이조참의를 역임하고, 1537년 승지로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였으나 성주사고(星州史庫)가 불에 타자 파직되었다.1542년 형조참판이 되었는데, 전에 함경도관찰사로 있을 때 많은 관인(官人)들을 사적인 일에 부렸다 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1544년 판결사·내의원제조를 역임하고, 이듬해 공조참판으로 동지춘추관사를 겸하여 『중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형조판서·한성부좌윤을 거쳐 1551년(명종 6) 경연특진관에 임명되었다


● 강공헌『姜公憲, 1523년(중종 18)~1583년(선조 16)』


동지중추사를 지낸 강현의 둘째 아들로 사마시에 합격한 후 선공감역, 의금부도사, 사포서별검, 별좌 등을 지냈다.


경기도 화성시 정남면 덕절리에 조성된 진주강씨(晋州姜氏) 묘역 내 아버지 강현(姜顯)묘 바로 아래 자리 잡고 있다. 원형의 봉분 앞에 상석이 놓여 있고 그 앞으로 향로석이 놓여 있다. 봉분 좌우측 끝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각각 1쌍씩 배치되어 있다.

 

문인석은 조선조 문신의 관복 가운데 하나인 복두공 강현의 둘째 아들로 사마시에 합격한 후 선공감역, 의금부도사, 사포서별검, 별좌 등을 역임했다. 문인석은 조선시대 전기 양식을 따랐다.



출처 : 화성저널(http://www.hs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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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공헌『姜公憲, 1523년(중종 18)~1583년(선조 16)/향년60歲』 배위 함안이씨 이야기

 

공인(恭人) 함안이씨『咸安李氏, 1521년(중종 16) ~ 1614년(광해군 6)/壽93歲』는 진주 진성면 출생으로 증조부는 대사간 이인형(李仁亨)이고 조부 이핵(李翮)은 사마시에 합격하여, 자헌대부 형조판서 문간공 김종직(金宗直)의 딸과 혼인하였고, 아버지 이희철(李希轍)은 통정대부 목사 하우치(河禹治)의 딸과 결혼하여 1남 3녀를 낳았는데 공인이씨는 그중 막내였다.

 

함안이씨 묘지명(咸安李氏墓誌銘)은 1620년(광해 12) 전 영의정 내암 정인홍(來庵 鄭仁弘,1536년(중종 31~1623년(인조 1)이 지었다. 이 묘갈을 보면 당시로선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의 삼정승(三政丞)을 다 지낸 85歲 고령(高齡)의 내암 정인홍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했던지를 알 수 있습니다.

 

공인 함안이씨 외조부가 오늘날 진주시 대곡면 단목리 출신의 안주목사(安州牧使) 하우치『河禹治, 1474년(성종 5)~1544년(중종 39)』인데, 그의 아들 승사랑(承仕郎) 하숙『河淑, 1493년(성종 24)~1552년(명종 7)』묘지명과 하숙 아들 김해부사(金海府使) 영모정 하진보『永慕亭, 河晉寶, 1530년(중종 30)~1585년(선조 18)』의 묘비명도 내암 정인홍이 82세의 나이로 영의정으로 있을 때인 1618년(광해 10) 가을 쯤 고향 합천군 가야면 야천리 각사마을에서 지었다.

 

하진보(河晉寶)는 21세(歲)에 요절한 내암의 외동아들 정연(鄭沇, 1571년(선조 4)~1592년(선조 25)의 장인이다. 내암 정인홍은 고령(高靈) 도진 출신의 학암 박정번『鶴巖 朴廷璠, 1550년(명종 5)~1611년(광해 3) : 박정완(朴廷琬)의 동생임』의 묘지명도 지었다.

 

그리고 학암 박정번의 조카가 공인 함안이씨 사위로 장령(掌令) 박광선(朴光先)이다. 또한 학암 박정번의 사위가 평안도 절도사 김응서『金應瑞, 1564년(명종 19)∼1624(인조 2)』이다.

 

※김응서는 임진왜란 때, 평양 방위전과 평양성 탈환에 전과를 올린 인물로 16세기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그의 집이 현재 평안남도 룡강군에 소재하고 있어 오늘날 북한의 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

 

내암은 함안이씨 묘지명을 지은 후 3년이 체 못되어 인조반정[계해정변]이 일어나 88세의 나이로 서울에 압송되어 이구(李貴) 등의 정변 세력에 의해 억울하게 참수되고 함안이씨 외손자 박종주『朴宗胄,1591년(선조 24)∼1623년(인조 1)/승지』도 정인홍의 심복으로 금부도사를 영남에 보내어 대구 남문 밖에서 참수 되었다.

 

함안이씨 남편은 진주 단성현(오늘날 신안면) 출신으로 별제(別提>從六品) 강공헌『姜公憲, 1523년(중종 18)~1583년(선조 16)/향년60歲』이고 시아버지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正二品) 강현(姜顯)이며, 시 증조부는 강행(姜行)으로 진주강씨 관서 대장군공파이다.

 

함안이씨의 고모(姑母)는 진주 수곡면의 진사(進士) 하종악(河宗岳)의 후배(後配)로 출가햇다. 하종악의 초배부인 창녕 조씨는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형님인 조립(曺立)의 딸인데 딸 하나만 두고 요절했다.

 

그런데 하종악(河宗岳: 남명의 조카사위)의 사후(死後)인 1568년(선조 1) 하종악의 재취(再娶)인 함안이씨(당시 28세) 간통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남명(南冥)이 구암 이정(龜巖 李楨)과 절교하게 되고, 퇴계가 남명을 비판하는 사건으로 비화되어 선조 임금에게 까지 보고된다.

 

함안이씨 바깥사돈은 고령 우곡 도진마을의 양죽당(養竹堂) 박정완『朴廷琬, 1543년(중종 38)~1613년(광해 5) / 박광선의 아버지』인데, 1592년( 선조 25) 임진왜란때, 내암 정인홍의 휘하에서 의병 투쟁했었다.

 

또한 함안이씨 사돈인 박정완은 임란때 정인홍의 휘하에서 막료로 활동한 도촌 조응인『陶村 曺應仁, 字: 善伯, 1556년(명종 11)~1624년(인조 2)』의 자형이다. <끝>

 

글>고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