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갈,묘비,묘표

이훤 아내의 묘표(李煊妻墓表)

야촌(1) 2022. 6. 2. 05:37

[생졸년] 1663년(현종 4) ~ 1680년(숙종 6)

 

유인(孺人) 민씨(閔氏)는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 정중(鼎重)의 딸이다. 어머니는 이씨(李氏)로, 숭정(崇禎) 계묘년(1663, 현종 4) 8월 11일에 민씨를 낳았다. 말을 할 줄 알면서부터 어른들이 볼 때마다 그 현명하고 정숙함을 칭찬하였다.

 

점차 자라면서 계부(季父) 영돈녕부사공(領敦寧府事公) 유중(維重)이 아이에게 지식이 있음을 기뻐하며 더욱 장려하고 사랑하였다. 나이 17세에 경주(慶州) 이훤(李煊)에게 시집을 갔다.

 

시부모가 몹시 아끼며 항상 말하기를 “이 며느리가 나를 잘 섬기니, 익힌 예법이 법도에 맞구나.”라고 하였고, 적고(嫡姑)의 상을 당해 또 슬픔과 공경을 모두 극진히 하는 것에 감탄하였다.

 

경신년(1680, 숙종 6) 여름에 이 아비가 유배지에서 기용돼 재상에 임명되어 근친(覲親)하기 위해 서울로 들어왔는데, 산후병으로 인해 9월 17일 마침내 세상을 떠났으니, 아아, 슬프도다.

 

신유년(1681, 숙종 7) 정월 7일에 이씨 집안 선산의 왼쪽 오좌(午坐 정북향)의 언덕에 옮겨 장사 지냈으니, 바로 흥원(興原)의 강북쪽 영취산(靈鷲山) 아래 행재동(行齋洞)이다. 큰오라비인 진장(鎭長)이 가서 그 일을 맡았다.

 

우리 민씨는 본관이 여흥(驪興)이다. 고려(高麗)의 평장사(平章事) 휘(諱) 영모(令謨)와 대제학(大提學) 휘 유(愉)는 바로 먼 조상이다. 증조는 경주 부윤(慶州府尹)을 지내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된 휘 기(機)이고, 할아버지는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된 휘 광훈(光勳)이다.

 

그 어미는 본래 선원(璿源 조선 왕조)의 계파에서 나왔으니, 전평군(全平君) 이경정(李慶禎)이 바로 아버지이다. 이훤의 조상은 신라(新羅)의 좌명대신(佐命大臣) 알평(謁平)에서 나왔다.

 

아버지는 이인보(李仁寶)로 사옹원 참봉(司饔院參奉)을 지냈다. 할아버지는 휘 이직(李溭)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고, 모관(某官)에 추증되었다. 증조는 휘 이유일(李惟一)로 모관에 추증되었다.

 

아아, 내가 이 딸을 곡한지 채 수십 일도 되지 않아 그 소생인 아들 또한 죽어, 뒤따라 묘 옆에 묻었다. 또 그 동기간 6명 모두 앞뒤로 요절한지 4년도 되지 않았는데 그 어미 역시 슬픔에 몸이 상하여 연달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생각건대 이 한줌의 무덤을 누가 다시 기억하겠는가. 옛 예법에 따라 하나의 작은 비석을 세워 이와 같이 그 세계(世系)를 간략하게 기록하였다. 아아, 애통하도다. 그 아비가 눈물을 흘리며 적다.

 

[주01] 유배지에서 …… 임명되어 : 송시열이 남인의 탄핵으로 귀양을 갈 적에 민정중과 민유중 등도 송시열과 가깝게 지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때 민정중은 장흥(長興)으로 유배되었는데, 1년 뒤인 1680년에 사면되어 공조판서에 임명되었다가 곧 우의정이 되었다. 《국역 숙종실록 5년 6월 8일ㆍ14일, 6년 4월 18일ㆍ19일ㆍ29일》

 

노봉집 제9권 / 묘표(墓表)

 

[原文]

 

孺人閔氏。議政府左議政鼎重之女也。其母曰李。以崇禎癸卯八月十一日生。自能言。長老見之。輒稱其明淑。稍長。季父領敦寧府事公維重喜其有知識。奬愛有加。年十七。歸于慶州李煊。舅姑甚愛之。常曰。是善事我。習禮中度。及遭其嫡姑喪。又歎其哀敬兩盡。庚申夏。其父起謫拜相。爲覲入京。因產感疾。九月十七日。竟不起。嗚呼痛哉。辛酉正月初七日。歸祔于李氏先壟之左負午之原。卽興原江北靈鷲山下行齋洞也。其嫡兄鎭長往莅其事。我閔系出驪興。高麗平章事諱令謨,大提學諱愉。乃其遠祖也。曾祖慶州府尹贈領議政諱機。祖江原道觀察使贈領議政諱光勳。其母本自璿派。全平君慶禎是爲考。煊之先。出自新羅佐命大臣謁平。父仁寶。司饔院參奉。祖諱溭。同知中樞府事。贈某官。曾祖諱惟一。贈某官。嗚呼。余哭此女未數旬。其所生男亦不育。追瘞之墓側。而又其同胞六人。皆先後夭死。不四年。而其母亦傷毀繼逝。惟茲一抔之託。誰復識之。用遵古禮。立一小石。略記其世系如斯。嗚呼痛哉。其父泣書。<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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