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갈,묘비,묘표

이조 참판 이공 윤 묘표(贈吏曹參判李公 潤 墓表)

야촌(1) 2022. 6. 1. 13:09

증 이조 참판 이공 윤 묘표(贈吏曹參判李公 潤 墓表)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충절을 바쳤던 사람들이 수없이 서로 이어졌는데 금산(錦山)의 전투를 으뜸으로 일컫는 것은 아마도 중봉(重峰) 조 선생(趙先生 조헌(趙憲))의 충렬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때에 목숨을 바친 7백 의사(義士)와 같은 사람은 세상에서 능히 그 이름을 거론함이 없으니 이는 한스러워할 만한 일이다. 지난 임진년(1892, 고종 29)에 성상(聖上)께서 나라를 중흥한 옛 공훈을 감동스럽게 생각하여 국난에 순국하였던 신하들을 찾아내어 제사를 지내고 정표(旌表)를 내려주되 사전(祀典)에 기재되지 않은 것까지 모두 차례로 제사 지내게 하였다.

 

이에 초야에 매몰되었던 자취가 약간씩 드러나니 퇴사암(退思庵) 이공(李公) 휘 윤(潤)이 그 중 한 분이다. 공의 자는 존중(存中)이고 경주(慶州)가 본관인데, 비조(鼻祖) 알평(謁平)은 신라(新羅) 좌명공신(佐命功臣)이고, 고려 말의 문희공(文僖公) 세기(世基), 문효공(文孝公) 천(蒨), 국초(國初)의 정순공(靖順公) 성중(誠中) 등 세 세대가 정승(政丞)에 올랐다.

 

두 세대를 전하여 판서(判書) 휘 정석(廷碩)이 있는데 공에게 5세조가 된다. 증조부 휘 길안(吉安)은 사정(司正)을 지내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조부 휘 감(堪)은 전라감사(全羅監司)를 지냈고, 부친 휘 주신(周臣)은 임실현감(任實縣監)을 지냈다.

 

모친 안동김씨(安東金氏)는 현감(縣監) 맹함(孟諴)의 따님으로 여덟 명의 장부를 낳았는데 공은 그 중에서 넷째이다. 이른 나이에 문학으로 이름을 드러내고 율곡(栗谷) 이 선생(李先生)을 종유(從遊)하였는데, 음사(蔭仕)로 병조참지(兵曹參知)가 되었다.

 

벼슬을 버리고 남원(南原) 북쪽 말천(秣川)의 사인동(舍人洞)에 물러나 살았는데 곧 감사공(監司公)이 호남을 다스릴 때에 터를 잡은 곳으로, 감사공의 벼슬이 사인(舍人)이었으므로 이로써 이름을 붙인 것이다.

 

공은 선조의 사업을 계승하여 산수 간에 은거하여 여유롭게 지내면서 영예와 복록에 대한 생각을 끊었다.

 

왜적의 난리가 일어나자 북향하여 통곡하고 소매를 떨치며 일어나, “내 몸은 비록 조정에서 물러나 있지만 이러한 난리를 당하여 차마 나라의 위급함에 달려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서, 마침내 집안의 장정들을 거느리고서 조 선생과 의병을 규합하여 함께 금산(錦山)으로 달려가서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집안사람들이 의대(衣帶)를 가지고 사인동 뒤편 산기슭의 자방(子方 북쪽)을 등진 언덕에 장례 지냈는데, 부인의 묘소에 합봉(合封)하였다. 부인 순천(順天) 김씨(金氏)는 재건(在建)의 따님으로, 아들 한 명을 두었는데 이름은 천행(天行)이며 첨정(僉正)을 지내고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손자 희(煕)는 첨정(僉正)을 지냈는데 일찍 죽고 후사가 없으며, 둘째 손자 점(點)은 학행(學行)으로 교관(敎官)에 추증되었다. 증손자는 다섯 명으로 지고(志臯), 지설(志卨), 효성으로 교관에 추증된 지익(志益), 지열(志說), 지석(志奭) 등인데 모두 학술로써 명성이 있었다. 지석은 우옹(尤翁 송시열(宋時烈)) 선생을 스승으로 모셨다. 후손들은 대부분 문학과 덕행으로 향리에서 명성을 알아주었다.

 

아! 공이 전사한지 거의 삼백 년이 되었으니, 세대가 멀고 사태가 급박하였으므로 문헌으로는 증명할 수 없고 근거로 삼을 수 있는 것은 단지 보첩(譜牒)뿐이다. 금관(金管)으로 쓴 붉은 문설주의 정려문은 희미하게 퇴색하여 드러나지 않는데, 이에 이르러 선비들이 일제히 임금에게 아뢰어서 비로소 소재(小宰 이조 참판)의 추증과 현충(顯忠)의 전례(典禮)를 받으니 구천에서 굳센 혼을 위로할 수 있게 되었다.

 

후손 종봉(鍾鳳)이 비석을 세우고 묘표를 새기려고 나에게 그 글을 청하며, “선조가 충용(忠勇)을 떨친 일이 묻혀 있다가 다시 드러났으니 아름다운 공업을 기록하고 은혜로운 영광을 드날려 무궁하게 후손들에게 알리는 일을 늦출 수 없습니다.

 

감춰졌던 것을 드러내주고 빠진 것을 보완해주는 것이 태사(太史)의 직책이니, 그대가 그것을 도모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그 요청이 오래될수록 더욱 간절하므로 내가 굳이 사양할 수가 없어서 이에 행장을 살펴서 중요한 일을 선택하여 차례를 따져서 기술하였다.

 

[주01] 사전(祀典)에 …… 지내게 : 마땅히 제사할 것을 차례로 제사하고, 비록 사전(祀典)에 기재되지 않은 것이라도 의리상 마땅히 제사 지낸다는 말이다. 《書經 洛誥》

 

[주02] 금관(金管) : 충효(忠孝)를 기록하는 붓을 말한다. 양(梁) 원제(元帝)가 상동왕(湘東王)이었을 때 세 종류의 붓이 있어서 충효가 온전한 사람은 금관(金管)의 붓으로 기록하고 덕행이 맑고 순수한 사람은 은관(銀管)의 붓으로 기록하고 문장이 뛰어난 사람은 반죽관(斑竹管)의 붓으로 기록하였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太平廣記 卷200》

 

[原文]

 

贈吏曹參判李公 潤 墓表

 

龍蛇之難。倡義伏節之士。磊落相望。而首稱錦山之役。盖重峰趙先生之烈也。而其同時授命如七百義士者。世無能擧其名。是可恨也。往歲壬辰。聖上感念中興舊功。搜羅殉難之臣。侑酹㫌貤。咸秩無文。於是草茅泯翳之蹟。稍稍出焉。有若退思庵李公諱潤其一也。公字存中。慶州人。鼻祖謁平。爲新羅佐命功臣。麗季文僖公世基。文孝公蒨。國初靖順公誠中。三世登相府。再傳而有判書諱廷碩。於公爲五世。曾祖諱吉安。司正贈吏曹參判。祖諱堪。全羅監司。考諱周臣。任實縣監。妣安東金氏。縣監孟諴女。生八丈夫子。公其第四也。早以文學著名。從遊栗谷李先生。蔭仕爲兵曹參知。棄官屛居南原北秣川舍人洞。卽監司公莅湖南時所卜地。而監司公官舍人。以是名焉。公承祖業。考槃肥遯。絶意榮祿。倭警起。北向痛哭。投袂而起曰吾身雖退。當此板蕩。忍不赴國家之急乎。遂倡率家丁。與趙先生糾合義旅。同赴錦山。力戰死之。家人以衣帶葬于舍人洞後麓負子之原。與夫人墓合封。夫人順天金氏在建女。擧一男曰天行。僉正贈戶曹參議。孫曰煕。僉正。早卒無嗣。次曰點。以學行贈敎官。曾孫五人曰志臯,志卨,志益孝贈敎官,志說,志奭。俱以學術稱。志奭師尤翁先生。後承多以文行知名鄕里。嗚呼。公之死綏且三百年矣。世遠事遽。文獻無可徵。所據者只譜牒耳。金管丹楔。泯翳不章。至是章甫齊籲蹕路。始蒙小宰之贈。顯忠之典。可以慰毅魄於九京也。裔孫鍾鳳謀伐石表隧。謁文於不佞曰。先祖立慬之事。晦而復顯。載芳烈颺恩光。詔稚昧於無窮。不可緩也。發潛補闕。太史之職也。子其圖之。其請久而愈勤。余不能固辭。乃按狀掇要而論次云。<끝>

 

미산집 제13권 / 묘표(墓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