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세자료 168

이해룡선생 세계조사

■ 繕工監奉事慶州李公諱希哲墓 卯坐. 淑人李氏祔右 ◈광해군일기 >광해 2년(1610년) >광해 2년 5월 >광해군 2년 5월 7일 주청사 신흠 등 그 일행에게 포상을 내리다. 사자관(寫字官) 이희철(李希哲)에게는 7품의 직을 제수하였다. ◈광해군일기 >광해 7년(1615년) >광해 7년 윤8월 >7년 윤8월 9일> 사은사 윤방 등에게 가자하고 역관 등에게 관직 제수할 것을 전교하다. 사자관(寫字官) 이희철(李希哲)은 동반(東班)에 승급하여 서용하라.” ◈인조실록 >인조 4년(1626년) >인조 4년 11월 >인조 4년 11월 17일 호패청이 아뢰기를, “이천(利川)에 사는 전 현감 이양문(李揚門)과 업유(業儒 : 예전에, 서자로서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을 이르던 말 ) 이복(李穙)· 이희철(李希哲) 등은 비..

사인공전 역문(舍人公傳 譯文)

■ 사인공전 역문(舍人公傳 譯文) 외사씨찬(外史氏撰) 옛날 문장(文章)의 선비가 기품이 대개가 맑고 서도 깨끗하였으니, 한(漢)나라의 채백계(蔡伯階)와 당(唐)나라의 왕자안(王子安)과 이장길(李長吉)무리가 모두 문학(文學)으로 조정에 올라 그들이 지은 것이 음악(音樂)에 오르고 제사에 쓰게 되었으므로 금석(金石)에 새기어 전하고 명산(名山)에 보관되기도 하였으니 일대(一代)에 지극히 선출한 인재(人才)라 하겠다. 이와 같은 사람으로 재주는 있으나 수를 누리지 못하여 후인(後人)들이 애석하게 여기었으니 경주(慶州) 이사인공(李舍人公) 이라는 분이 가장 이에 가깝도다. 사인(舍人)의 집에는 큰 선비와 큰 학문(學問)이 많았다. 열헌(悅軒) 핵(翮)의 부인(夫人) 김씨(金氏)가 친히 그 자제 인정(仁挺), 진..

석탄 이존오(石灘 李存吾) 선생 이야기 모음.

■ 석탄 이존오(石灘 李存吾) 선생 이야기 [생졸년] 1341년(고려 충혜왕 복위 2)~1371년(공민왕 20) / 향년31세 이존오(李存吾)선생은 경주이씨(慶州李)로, 자는 순경(順卿), 호는 석탄(石灘)이라 한다. 선생은 용모가 단정하고 재주가 뛰어나며 성격이 곧고 지조가 강한 분으로 어려서부터 배움을 좋아 하였다.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집은 가난하여 독학으로 학문을 닦았다. 나이 열살 때에는 한시(漢詩)를 지어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 가장 젊은 나이로 당시 유명한 학자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반남 박상충(潘南 朴尙衷). 도은 이숭인(陶隱 李崇仁). 삼봉 정도전(三峰 鄭道傳). 육우당 김구용(六友堂 金九容). 안동 김제안(安東 金齊顔)선생들과 친교가 두텁고 학문이 장하여 여러 차례 강론을 거듭하..

곡 운와제(哭雲窩弟)

곡 운와제(哭雲窩弟) 지은이 : 이달충(李達衷) 세 오얏이 뿌리 뻗어 여러 대로 빛났는데 / 三李蟠根赫葉光 우리집 형제들 가문의 빛을 이었었네 / 我家兄弟襲餘芳 나는 몸도 짧고 재주도 짧았지만 / 愧予體短才尤短 너는 키도 큰데 목숨이 왜 못 길었느냐 / 恨爾身長壽不長 백발로 내 어이 강굉의 이불잊으리 / 白髮何忘共姜被 청등에 다시 소씨의 상을 대할 길이 없구나 / 青燈無復對蘇床 아아 처자들 고향에 길이 막혔으니 / 可憐妻子鄕關阻 산 사람 죽은 이 위하여 나는 갑절 애를 끊네 / 吾爲存亡倍斷腸 [주해-01] 운와공(雲窩公) 이달존(李達尊)은 익재 이제현의 둘째 아들로, 지은이 이달충(李達衷)과는 제종형제(再從兄弟)간이다. [주해-02] 강굉(姜肱)의 이불 : 동한(東漢) 강굉(姜肱)이 아우 중해(仲海)ㆍ계..

청호공 배위 죽산안씨

경상도관찰사 청호(淸湖) 이희(暿)선생의 배위 죽산안씨(竹山安)와 그의 부모 묘는 563년간 고양시 원당리에 있었는데, 묘소 위로 도로가 나는바람에 불가피 이장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익재공후 청호공파 파조모인 죽산안씨는 무남독녀로서 부모님 묘소를 지키기 위해 경기도 고양에 부모님 산소 아래 있었는데 2011년 봄에 안동시 남선면 현내리에 있는 부군 청호공 묘역으로 합장 이장했다. 그리고 청호공의 합장묘 위에 장인 정경공 안등선생 산소도 이곳으로 함께 이장했다. 죽산안씨(청호공 배위) 집안의 세계도를 살펴 보면, 1世--2世--3世--4世--5世--6世--7世--8世--9世--10世--11世--12世--13世--14世--15世--16世 안원-방준-국보--륜--덕생--사--학겸--준--시무-세윤-자유--한..

양호단소

(옛 건물) (신 건물) ↑양호정사(良湖精舍). 양호정사(良湖精舍)는 소판공(蘇判公)의 단(壇)을 모신 사우(祠宇)이다. 이 정사(精舍)에는 휘 익신의 국포집(菊圃集), 휘 정효(廷孝)의 후송집(後松集), 휘 유면의 율촌집(票村集)의 판각(板刻)을 보존(保存)하고 있다. 소재지는 울산시 울주군 청량면 동천리이다. 이 건물은 구 건물로 동향으로 보고 있으며, 기우는 건물을 기둥으로 받쳐 놓고 있다. 새 건물은 이 사진 오른쪽에 남향으로 깨끗하게 새로 지었다. 울주군 청량면 동천리 양동 마을에 대하여 ○ 중시조 소판공 휘 거명 할아버님의 사단을 모신 곳이다. 동천리는 예종(睿宗)때에는 양천리(梁川里)라 일컬었던 곳이다. 정조(正組)때는 양천(良川)이라 하다가 고종(高宗) 1년(1864)년에는 양천과 양동(良..

서정일록(西征日錄)-이정암 (李廷馣) 씀.

(8월) 27일. 연안(延安)에 머물다. 아들 화(화)가 강화로 돌아갔다. 개성 사람이 돌아간다고 하여 아병(牙兵) 봉억룡(奉億龍)을 함께 가게 해서 유수(留守)의 소식을 알아보게 하였으나 변을 듣고 하지 못했다. 평산 의병장이 치보(馳報)한 가운데 그 수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해주에 주둔한 왜적이 연안(延安)으로 향한다고 했다. 배천 의병장 조응서(趙應瑞)가 치보(馳報)한 속에는 그 수를 알 수 없는 왜적이 배천(白川)으로 쳐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식후에 남산(南山)에 올라가 대처하며 사방을 바라보니 연염(烟焰)이 하늘을 치솟고 있는데 이는 필시 우리가 전비를 갖추지 못한 틈을 타고 쳐들어오는 것이다. 즉시 한 형(韓형)과 이신갑(李臣甲)을 보내서 호남 의병장[김천일] 및 전라 병사[최 원]에게 ..

이씨제식(李氏祭式)

명재유고 제32권>발문(跋文)/윤증(尹拯,1629∼1714) 著 《이씨제식(李氏祭式)》 발문 신유년(1681, 숙종 7) 위의 《이씨제식》은 고(故) 목사(牧使) 이공 시현(李公時顯)이 지은 것이다. 공은 지차(之次) 종가(宗家)로 고조(高祖)의 조주(祧主)를 받들고 와서 집에서 제사를 지내게 되었는데, 그때 대소 종손들과 상의하기를, “우리 조부 문충공(文忠公-백사 이항복을 말함)께서는 일찍이 《사례훈몽(四禮訓蒙)》을 저술하고 또 《예기(禮記)》 〈제의(祭義)〉를 손수 써서 병풍으로 만드셨습니다. 이처럼 조상을 추모하는 도리에 정성을 다하셨으나 당신이 종손이 아니었으므로 집안의 제례에 관한 규범을 만들지는 못하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 세대에 와서 근거할 만한 규례가 없게 되었으니, 이번에 한번 정비를 ..

경주이씨 실전세계

■ 慶州李氏失傳世系(경주이씨 실전세계)의 자구(字句) 수정 → 표시 부분 1世 始祖謁平(시조 알평) 儒理王恩烈王封侯(유리왕은열왕봉후)→ 太宗武烈王(태종무열왕) 攝津都尉使(섭진도위사)→ 攝律都尉(섭률도위) 5世 奭(석) 大司冠(대사관)→ 大司寇(대사구) 7世 昉(방) 攝徒尉令(섭도위령)→ 攝律都尉(섭률도위). 令(령)→ 領(령) *攝律都尉領尙書事(섭률도위령상서사)- 領의 뜻은 거느리다. 받다의 뜻. 섭률도위 관직에서 상서사 관직을 받다. 거느렸다. 9世 綏(수) 千生頭(천생두)→ 千牛頭(천우두). 11世 美(미) 政事忠直(정사충직)→ 政事堂(정사당). *政事堂(정사당)- 신라 각료 회의기구 雲梯先生(운제 선생)→ 雪梯先生(설제 선생). 15世 傑(걸) 復令參預通政事(복령참예통정사)→ 參預通政事(참예통정사)..

이숭수(李崇壽) - 상서공파

■ 21세 첨지중추부사 이숭수(僉知中樞府事 李崇壽) 1425년(세종 7)~1489년(성종 20) 때의 조선의 문신. 상서(尙書) 이과(李薖)의 현손 으로 자는 미수(眉叟) 초휘(初諱)는 옥견(玉堅) 훗날 숭수(崇壽)로 개명(改名)하였고, 관향은 경주(慶州)이다, 그는 공조참판(工曹參判) 연손(延孫)의 장자인데, 어머니는 파평윤씨(波平尹氏)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윤번(尹璠)의 딸로.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의 동생이다. 공은 자품이 엄위하여 도량 넓고 두터웠다. 공(公)은 음직으로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正六品). 돈령부(敦寧府) 첨정(僉正-正三品堂下官)을 지냈고 성종때에 특별히 첨추(僉樞)를 제수하였다. 양주조씨 문내(楊洲趙氏 門內)가 세조 에게 참화(慘禍)를 입으니 사위가 되시는 공은 벼슬을 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