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세자료

서정일록(西征日錄)-이정암 (李廷馣) 씀.

야촌(1) 2011. 9. 30. 18:48

(8월) 27일.
 연안(延安)에 머물다. 아들 화(화)가 강화로 돌아갔다. 개성 사람이 돌아간다고 하여 아병(牙兵) 봉억룡(奉億龍)을 함께 가게 해서 유수(留守)의 소식을 알아보게 하였으나 변을 듣고 하지 못했다. 평산 의병장이 치보(馳報)한 가운데 그 수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해주에 주둔한 왜적이 연안(延安)으로 향한다고 했다. 

 

배천 의병장 조응서(趙應瑞)가 치보(馳報)한 속에는 그 수를 알 수 없는 왜적이 배천(白川)으로 쳐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식후에 남산(南山)에 올라가 대처하며 사방을 바라보니 연염(烟焰)이 하늘을 치솟고 있는데 이는 필시 우리가 전비를 갖추지 못한 틈을 타고 쳐들어오는 것이다.

 

즉시 한 형(韓형)과 이신갑(李臣甲)을 보내서 호남 의병장[김천일] 및 전라 병사[최 원]에게 급히 알려서 와서 구원할 것을 청했다. 종사관 우준민(禹俊民)은 근친(覲親)을 해야겠다는 이유로 빠져나갔다. 배천 별장 민인로(閔仁老)가 구원하러 왔다.

 28일.
연안성(延安城)에 머물다. 식후에 왜적 4천여 기가 서면(西面)으로부터 들어와서 외남산(外南山) 및 서문(西門) 밖에 진을 치고 종일토록 총을 쏘아대어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으나 아군은 버티면서 종일토록 굳게 지키고, 편전(片箭)으로 10여 명을 쏘았다.


  적은 밤이 다 하도록 물러가지 않았다. 배천 의병 봉요신(奉堯臣), 조서룡(趙瑞龍) 등이 성을 넘어서 밤에 나가 배천 의병장 조응서(趙應瑞) 등에게 내원(來援)할 것을 청했으나, 응서는 오지 않아서 병기만 가지고 돌아와서 성을 타고 넘어 들어왔으니 참으로 의사(義士)이다. 수리(隨吏) 유대춘(劉大春)은 야음을 타고 도망갔다.

29일.
연안성(延安城)에 머물다. 왜적은 계속 공격하며 물러가지 않아서 종일토록 서로 싸웠다.
밤 4경에 왜적은 운제(雲梯)를 타고 급히 성(城)의 서남쪽을 공격하니 아군은 힘껏 싸우면서 나무와 돌로 난격(亂擊)을 가하니 죽는 자가 그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았고, 그제야 겨우 퇴각하였다.

9월 초1일.
포위된 연안성(延安城)에서 머물다. 왜적은 충차(衝車)로 성벽을 부수려고 하였으나 아군은 비루(飛樓)에서 내려다보며 활을 쏘고 혹은 섶을 불에 질러 던져서 불태우므로 적은 성 가까이 오지를 못했다.


밤에 배천 별장 김자헌(金自獻), 의병장 조응서(趙應瑞)가 사람을 보내 성을 타고 넘어왔으니 그와는 군사를 이끌고 경동(京洞)에 도착하여 야간 공격을 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보냈다.


평산 조방장 이사례(李嗣禮)가 사람을 보냈는데 군사 1백여 명을 이끌고 내원(來援)한다는 것이어서 약속을 받고 돌아갔다. 그러나 약속한 사람들은 밤이 다하도록 오지를 않았으니 침통한 노릇이다.

초2일.
평명(平明) 때에 적은 포위를 풀고 물러갔는데 남은 왜적도 무려 수천 명으로 배천(白川)을 향하여 갔다.
이번 거사에 방비는 채 갖추지 못했고, 대적은 쳐들어오는데 외부에서의 원병은 이르지 아니하여 만약 성(城) 안의 사람들이 굳게 지키지 아니했더라면 함몰했을 것은 명확한 것이었다.


우마(牛馬) 30여 마리와 군기 약간을 얻었다. 아군은 사수(射手) 중에 적탄을 맞고 죽은 자가 10여 인이었다.
미시(未時)에 왜적 수백이 또 서문 밖 10리쯤에 진을 치고 있어서 밤새도록 엄한 경계를 하였다. 왜적은 야음을 타고 달아났는데 그것은 앞의 적이 퇴패하였다는 것을 듣고 싸워보지도 못하고 스스로 무너진 것이다.

초3일.
연안성(延安城)에 있었다. 북산(北山)의 척후군이 와서 알려왔는데 왜적은 백의(白衣)로 변복(變服)하고 배천(白川)으로부터 산 뒤를 향해서 서쪽으로 간다고 하여 종일토록 엄한 경계를 폈다.
배천 별장 조응서(趙應瑞)와 변 렴(邊濂), 조방장 김자헌(金自獻), 평산 조방장 이사례(李嗣禮) 등이 군사를 이끌고 성으로 들어왔다.

역시 『以二十八日圍城, 以二日解去.[28일에 성을 포위하고 2일에 포위를 풀고 갔다.]』로 유명한 이정암답게 묘사가 좀 소략합니다. 그래서 몇 가지 기록들을 추가해 봤습니다. 위에 말한 12자로 된 장계를 올렸다고 후대에 알려지게 된 당시 승첩장계 원문하고, 사류재집 12권에 실려있는 임진유사(壬辰遺事)를 옮겨봤습니다. 항상 번역상의 매끄럽지 못한 부분과 오류에 대해서 주의!


道內列邑, 無不陷沒, 倭賊根據, 四出초掠, 大小人民, 擧族둔竄, 臣受此任, 志切致計爲白乎矣, 無可投足之地, 延安一邑, 賊退之後, 城池粗完乙仍于, 去八月二十二日, 本府義兵五百餘名率良며, 入據空城, 招集散亡, 積穀繕兵, 以圖征討之擧爲白如乎, 同月二十七日, 海州江陰倭賊, 無慮五千餘名, 一時作賊, 二十八日爲始進逼城下, 四面攻圍, 放砲규조之聲, 震動天地, 晝夜拒守, 器械未備, 外援不至, 人心늠늠, 莫保朝夕, 惟幸城中將士, 竭力固守, 登城之賊, 爭以木石擊之, 死者不知其數, 賊勢不支, 本月初二日, 始爲退却, 江陰了向歸, 孤城得免陷沒, 實是天幸是白齊, 我軍力戰, 中鐵丸身死者三十一人, 至爲矜惻, 令所在官設祭致慰爲白齊, 所得倭物, 牛馬竝三十餘首, 長槍大劒竝十餘柄, 大小旗麾雜物, 不可悉錄, 有功將士處, 卽時分給, 以賞其勞爲白齊, 倭屍段, 塡滿壕塹爲白乎矣, 倭人封屍焚燒乙仍于, 未暇斬괵, 追擊斬頭四顆뿐, 割耳上送爲白齊, 今此得全, 只賴將士之義勇, 若與南軍, 共爲기角, 內外合擊, 卽殄殲餘賊, 庶乎不難, 而犯境之日, 飛報請救爲白乎矣, 只隔一水相望之地, 被圍四日, 略無聲聞相及, 金千鎰崔遠等所爲, 莫測其意爲白齊, 有功將士, 分等磨鍊後錄, 軍官訓鍊院奉事劉逸幼學韓형乙用良, 馳啓爲白臥乎事是良며 詮次云云.【四留齋集 卷九】



 도내(道內)의 열읍(列邑)이 함몰(陷沒)되지 않은 것이 없이 왜적의 소굴이 되어 사방에서 나와 노략질을 하고 있으니, 대소의 인민들은 가족들을 이끌고 달아나 숨어버렸습니다.


 신(臣)이 지금의 소임을 맡아 뜻은 간절하나 계책을 세움에 이르러서는 발 디딜 땅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오직 연안(延安)의 한 고을은 적이 물러간 후에 성지(城池)를 대략 완비하여 지난 8월 22일에 본부의 의병 5백여 명을 거느리고 빈 성에 들어와 웅거하였습니다.

 

흩어져 도망한 이들을 불러모으고 곡식을 쌓고 병기를 수선하여 정토(征討)할 의거를 일으킬 것을 도모하고 있었는데, 같은 달 27일에 해주(海州)·강음(江陰)의 왜적 무려 5천여 명이 일시에 무리를 이루어 28일에 성의 바로 밑에까지 이르러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면을 포위하고 공격하는데 방포(放砲) 소리가 시끄럽게 천지에 진동하였습니다. 밤낮으로 맞서 지켰으나 기계(器械)는 준비되지 못했고, 바깥의 구원병도 이르지 않아 인심이 매우 위태로워 조석(朝夕)을 보장할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성중(城中)의 장사들이 힘을 다하여 굳게 지켜 성에 오른 적병들을 목석(木石)으로 공격하니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적의 세력이 지탱하지 못하고 본월(本月) 초2일에 퇴각하기 시작하여 강음(江陰)으로 향하여 돌아갔습니다. 외로운 성이 함몰(陷沒)되는 것을 면한 것은 실로 천행(天幸)이었으며, 아군이 힘써 싸웠으나 철환(鐵丸)에 맞아 죽은 자가 31명에 이르렀으니 매우 측은합니다.

 

소재지의 관아에 명하여 제사를 지내고 위무(慰撫)하도록 하였사오며, 얻은 바 왜물(倭物)은 우마(牛馬)가 모두 30여 마리, 장창(長槍)·대검(大劒)이 모두 10여 자루, 크고 작은 기휘(旗麾)와 잡물(雜物)은 다 갖추어 기록하지 못합니다.

 

공이 있는 장사들에게 즉시 나누어주어 그들의 노고(勞苦)를 포상하였습니다. 왜적의 시체는 왜인들이 참호를 깊게 파서 시체를 쌓고 태워버려서 수급을 벨 겨를이 없었습니다. 단지 추격하여 벤 수급은 4개 뿐이라 귀를 베어 올려보냅니다.


지금 이렇게 온전함을 얻은 것은 단지 장사들의 의기와 용맹에 기대어 얻은 것으로 만약 남군(南軍)이 같이 기각지세(기角之勢)를 이루어 안팎에서 같이 공격하였더라면 나머지 적들도 모조리 섬멸하는 것이 거의 어렵지 않았을 것이나 적이 지경(地境)을 범하는 날에 비보(飛報)를 보내 구원을 청하였사오나 단지 물을 사이에 두고 바라다 보이는 곳에 있으면서도 4일간이나 포위되어 있었어도 도통 들려오는 소식이 없었으니, 김천일(金千鎰)·최 원(崔遠) 등이 하는 짓이 그 뜻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공이 있는 장사들은 등급을 나누어 마련기(磨鍊記)를 작성하여 군관 훈련원 봉사 유 일(劉逸), 유학(幼學) 한 형(韓형) 등을 보내 치계(馳啓)하오니 잘 말씀드려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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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忠穆公, 曾爲延수時, 牧民禦衆之才, 爲人所心眠, 故諸壯士往告以守城之意, 公義而許之, 與之偕來, 建大將旗鼓, 申明約束, 整頓部伍, 士氣益銳, 自倍於前矣, 一日候者來言賊自海州而來, 兵勢之盛, 有若建 然, 張應祺馳往觀之, 賊果已渡楓川橋, 白應禧駐馬岸下, 使有餘力, 俟賊陣迫近, 然後大呼天鵝聲而突入賊中, 賊大亂相失, 左次於路傍, 應禧乃從間道回來, 則腥塵已漲西門外矣, 賊欲擇留屯處, 令持旗者環視城基, 至北門外, 旗竿無風而自折, 瞥然能續, 至東城, 旗又折, 賊乃止壁於城西, 使使者呼而語之曰, 自南至西, 所向無前, 今乃以一隅彈丸, 敢抗大軍, 比如檻虎鼎魚, 言之可哀, 速出西門而降, 否者, 我將一劒盡之矣, 俄而又呼曰, 爾有何樣兵器, 而爲此拒轍之計也, 願一見之, 白受采挺身而出曰, 汝以其兵, 我以其義, 汝鬪以力, 我鬪以智, 兵器貌樣, 不須問也, 雖然我之兵器無他, 有一焉, 必欲見之, 示之何難, 卽以六兩矢, 彎大角弓而射之, 月鏃星流, 直過南山之嶺, 賊聚首見之, 目動而神駭也, 又有一賊背向城中, 俯而叩臀, 以示侮辱之意, 李黜射之, 一矢卽斃焉.是日, 始閉城門, 各守信地, 部伍雖精, 軍額甚寡, 僅守城西北, 而未遍於東南矣, 合戰數日, 軍器已盡, 而蛇豕之群日滋, 蜂채之毒益肆, 民士空拳無以爲禦, 或以木石擊之, 或以湯水灌之, 勢迫朝暮, 決難久守, 而士卒猶能有死之心, 無生之氣, 莫不奮臂揮泣, 俄有一女子, 夜至北門外, 呼守者曰, 我有所獻, 急受之, 守者意其賊人之詐, 聽而不應, 其女呼之不已, 守者睍而視之, 女抱一圍長箭而立, 容貌端雅, 語聲琅然, 於是, 知非賊人之爲也, 倚身城角, 俯而問之, 女曰, 妾卽海州妓也, 城中矢石想已俱盡, 敢將長箭十六箇, 以助守禦之備, 願勿疑也, 守者曰, 汝之獻箭, 意甚可嘉, 汝欲入城, 則吾當垂索也, 女不許, 卽還去, 至四五步許, 回身低聲而語曰, 未數日, 賊當潮退, 公等幸堅壁而待之, 語畢而不見, 自是城中恃而稍安矣, 其夜又有鬼火, 聚于東門外, 其麗不億, 相繼入城, 賊見之大驚曰, 隣救大至, 不可犯也, 翌日, 賊所玄山長松, 造雲梯橫駕西城, 又取羅津棺板, 去下隅而冒之, 緣城而上者, 有若魚貫然, 李大春以鐵箭射之, 棺板退落, 在下者皆壓死, 倭將謂其軍曰, 破此三里之城, 易如拉朽, 而曠日持久, 尙未拔焉, 是汝諸軍不爲力戰之罪也, 今日固決戰, 論其刑賞矣, 使人樹望旗于北山之陽, 以之低昻督戰, 而樹之未久, 旗自부地, 賊更竪其旗, 督戰益急, 孤城欲최, 危如累卵, 城中之人, 無不驚懼而失措, 時有一人, 從東門而亡去, 張應祺追捕其人, 拔劍之曰, 君以食祿之人, 見危亡去, 是不忠也, 後有效此者, 當行司馬法矣, 城中聞之悚慄, 莫敢有逃散之心, 公曰, 事已至此, 無可奈何, 賊若陷城, 我當焚死, 積추于前, 齎火藥而待之, 諸壯士, 亦撤城中廬舍, 積於城上, 一時燃火, 于時大風從東起, 烟焰漲天, 咫尺晦瞑, 賊爲風烟所觸, 少止其鋒, 圍城凡四日, 我軍之死亡者少, 城下之賊屍如山, 賊進不得入, 退無所掠, 乃解圍而去, 城中男女老弱, 皆鼓조而追之, 賊退陣於天拜山下, 所掠牛馬, 放之前野, 李大春等徒步追之, 超大浦抵陣前, 奪其牛畜而來, 賊擧衆逐之, 大春等一邊射殺賊, 一邊屠牛畜, 或所其脚, 或 其腹取啖, 越浦而歸, 賊壯而畏之, 賊臨去時, 送一木櫃于公曰, 親自開見也, 左右皆欲開之, 公曰, 賊謀難測, 愼勿開, 乃鑿而視之, 果有一小倭, 挾短劒臥其中, 公卽令引鉅斷之, 公之深謀奇略, 雖古名將, 莫之過也.【載延安誌】【四留齋集 卷十二 壬辰遺事】


이 충목공(李忠穆公 이정암)이 일찍이 연안 부사(延安府使)가 되었을 적에 백성을 다스리고 방비하는 재주가 있어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켰기 때문에 여러 장사들이 가서 수성(守城)할 뜻을 고하니 공이 의기로써 허락하였다. 그들과 같이 들어와서 대장의 기고(旗鼓)를 만들고, 약속을 명확히 하고, 부오(部伍)를 정돈하니 사기가 절로 전보다 배(倍)나 되어 더욱 날카로워졌다. 


하루는 망보는 자[候者]가 와서 하는 말이, 「적이 해주(海州)로부터 몰려오는데 그들의 병세(兵勢)가 몹시 성하여 막지 못할 형세입니다.」라고 하였다. 장응기(張應祺)가 달려가서 바라보니 적병은 벌써 풍천교(楓川橋)를 지나고 있었다.

 

백응희(白應禧)가 언덕 아래에 말을 세우고서 남은 힘을 아끼고 있다가 적진이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린 연후에 크게 천아성(天鵝聲)을 지르며 적진의 한가운데로 돌입하니 적이 크게 어지러워져 서로 질서를 잃고 길 옆 왼쪽으로 몰렸다. 응희(應禧)가 이에 사잇길로 되돌아오니 먼지가 서문(西門) 밖에 가득 일었다. 


적이 유둔(留屯)할 곳을 고르려고 기치(旗幟)를 가진 자로 하여금 성터를 둘러보게 하는데, 북문(北門) 밖에 이르러 깃대가 바람이 없는데도 저절로 부러졌다. 태연히 이어 붙여서 동쪽 성곽에 이르러 또다시 부러지니 적이 서쪽 성벽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사자(使者)를 보내서 불러 말하기를, 『남쪽으로부터 서쪽까지 앞으로 나갈 곳이 없는데도 지금 한 귀퉁이에서 탄환으로 대군(大軍)에 감히 맞서려 하다니, 우리 속에 갇힌 호랑이나 솥 안에 든 물고기와 다를 바 없구나. 말을 하고 보니 내 마음도 매우 슬프다.

 

속히 서문(西門)을 나와 항복할 것이며,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내가 단칼에 쓸어버릴 것이다.』
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너희는 어떤 병기(兵器)를 갖고 있기에 이와 같이 당랑거철(螳螂拒轍)하려는 계책을 세웠느냐?

 

원컨대 한번 보고 싶구나.』하니, 백수채(白受采)가 몸을 빼내어 나가 말하기를, 『너희들은 병(兵)으로 싸운다고 하나 우리는 의(義)로 싸울 것이다. 너희들이 힘으로 싸운다면 우리는 지혜로 맞설 것이니, 병기의 모양은 알아서 무엇하겠느냐?

 

비록 우리들의 무기는 다른 것은 없고 한 가지가 있으나 네가 보고 싶다면 보여주는 것이 뭐가 어려우랴!』
하며 육냥전(六兩箭)을 꺼내어 대각궁(大角弓)에 재어 날리니 달같은 화살촉[月鏃]이 별처럼 날아가 곧바로 남산 고개를 넘어가니 적들이 머리를 모아 바라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신기해하며 놀랐다. 또 한 명의 적병이 성을 등지고 서서 몸을 굽히면서 엉덩이를 두드리며 모욕(侮辱)하는 뜻을 나타내니 이 출(李黜)이 활을 쏘아 한방에 죽여버렸다.


이날에 성문을 닫고 각자 맡은 지역을 지키기 시작하였는데, 부오(部伍)는 비록 정밀하나 군액(軍額)이 심히 부족하여 근근히 서·북문은 지켰으나 동·남문에까지는 두루 미치지 못하였다. 수일간을 싸워 군기(軍器)는 이미 바닥이 났는데, 사시(蛇豕 뱀과 멧돼지)같은 자들은 날로 불어나고, 봉채(蜂채 벌과 전갈)같이 독한 자들은 더욱더 제멋대로 날뛰었다.

 

사민(士民)들은 빈주먹으로 막을 수는 없어서 목석(木石)으로 공격하고, 뜨거운 물을 끓여 부었으나 아침저녁으로 형세가 급박하여 오래 지키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사졸(士卒)들은 오히려 살려는 생각은 없고 능히 죽으려는 마음으로 팔뚝을 휘두르며 눈물을 뿌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한밤중에 갑자기 한 여인이 북문(北門)에 다가와 수비하는 병사를 불러 말하기를

『내가 줄 물건이 있으니 급히 와서 받아가세요.』하니, 병사는 적병의 잔꾀가 있을까 생각하여 듣고도 응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 여인이 부르기를 멈추지 않으니 수비하는 병사가 힐끗 바라보니 여인이 장전(長箭)을 한 아름 안고 서 있었다. 용모가 단아하고 목소리는 낭랑하니 그때야 비로소 적병이 한 짓이 아님을 알았다. 성벽에 기대어 몸을 숙여 물어보니, 그녀가 말하기를, 『첩은 해주(海州)의 기생인데, 성 안의 시석(矢石)이 벌써 모두 다 떨어졌을까 걱정이 되어 감히 장전(長箭) 16부를 가져왔으니 수어(守禦)하는데 보태도록 하시고, 의심하지 마소서.』
하였다.

 

수비하는 병사가 말하기를, 『네가 화살을 바치니 그 마음이 참으로 가상하다. 네가 성으로 들어오겠다면 내 마땅히 줄을 내려줄 것이다.』하니 그녀는 허락하지 않고 곧바로 되돌아갔다.

 

네다섯 걸음쯤 가더니 몸을 돌려 낮은 목소리로 말하기를, 『수일이 지나지 않아 적이 의당 썰물처럼 물러갈 것이니, 여러분들께서는 굳게 지키면서 때를 기다리세요.』 하고 말을 마치자 곧 사라져갔다. 이때부터 성중(城中)에서는 믿는 바가 있어 조금 편안해졌다.


그 날 밤에 또 귀신불이 동문(東門) 밖에 모였는데, 그 아름다움이 헤아릴 수 없었는데, 계속하여 성중으로 들어오니 적병이 보고서 놀라 말하기를, 『인근의 구원병이 크게 이르렀으니 범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음날 적은 현산(玄山)에 있는 큰 소나무를 베어 운제(雲梯)를 만들어 서쪽 성벽에 가로 걸쳐놓고, 또 나진(羅津)에서 관(棺)을 짜는 판목을 가지고 성 아래에 와서 머리 위에 뒤집어쓰고 성벽을 기어오르는 것이 마치 물고기를 꿴 듯하였다. 이대춘(李大春)이 철전(鐵箭)으로 쏘아서 판목을 떨어뜨리니 아래에 있던 자들이 모두 깔려 죽었다.


왜장이 병사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러한 3리(里)의 조그만 성은 썩은 통나무를 다루는 것처럼 쉬운 것이다. 그런데 여러 날을 오래 끌어도 아직 뽑아 없애지 못했으니 이는 너희들이 힘을 다하지 않는 탓이다. 오늘은 단호히 결전을 할 것이며, 상과 벌을 명확히 할 것이다.』


하고서 사람을 시켜 북산(北山)의 양지바른 곳에 기치(旗幟)를 세우게 하고, 기치 아래에서 내려다보며 독전(督戰)하였으나 세운 깃발이 오래가지 못하고 저절로 땅에 떨어졌다. 적들이 다시 그 깃발을 세우고 더욱 급하게 독려하니 외로운 성이 막 무너지려 하여 위태함이 계란을 쌓은 듯하였다.

 

성중의 사람들이 놀라 두려워하며 제대로 조치를 못하고 있는데, 한 사람이 동문(東門)을 통해 도망갔다. 장응기(張應祺)가 그 사람을 잡아와서 칼을 빼어들고 말하기를, 『네가 나라의 녹을 먹는 사람으로 위태로움을 보고서 도망을 쳤으니 이는 불충(不忠)이다.

 

뒤에 공을 세워 이 죄를 갚는다면 마땅히 사마법(司馬法)에 따라 시행할 것이다.』라고 하니 성중(城中)에서 듣고 송구스러워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도망하려는 마음을 갖지 못했다. 공(公 이정암)이 말하기를,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어찌할 것인가!

 

적이 만약 성을 함락시킨다면 나는 응당 분사(焚死)할 것이니, 앞에 꼴을 쌓아놓고 화약을 들고 대기하도록 하라!』
하니 여러 장사들도 또한 성중의 초가집을 헐어 성 위에 쌓아놓고서 일시에 불을 붙이니 때맞춰 큰바람이 동쪽에서 일어나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가득하여 지척도 분간하기 어려워 적이 바람과 연기로 인해서 그 예봉(銳鋒)을 조금 그쳤다.

 


성을 포위한 지 무릇 4일이 되었는데, 아군의 사망자는 적고, 성 아래에 적의 시체는 산처럼 쌓여서 적병은 더 이상 쳐들어올 수도 없고, 물러나도 약탈할 것이 없어서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성중의 남녀노소 모두가 북을 울리며 추격하니 적은 천배산(天拜山) 아래로 퇴진(退陣)하였고, 약탈한 우마(牛馬)를 들판에 풀어놓으니 이대춘(李大春) 등이 걸어서 추격하여 대포(大浦)를 건너 적진 바로 앞까지 다가가 가축들을 빼앗아왔다.

 

적이 무리를 이끌고 퇴각하니 대춘(大春) 등이 한편으로는 활을 쏘아 사살하고, 한편으로는 가축들을 도살하여 혹은 다리를 자르고, 혹은 배를 갈라서 씹으며 대포(大浦)를 건너 돌아오니 적병들이 두려워하였다.


적이 물러가던 때에 나무로 만든 궤짝 하나를 공(公)에게 보내며 친히 열어보라고 하였다. 좌우에서 모두 열려고 하는데, 공이 말하기를, 『적의 모략은 헤아리기 어려우니 삼가 열어보지 말아라!』하고 이에 구멍을 뚫어 들여다보니, 과연 조그마한 왜적 한 명이 단검을 쥐고 그 안에 누워있었다.

 

공이 즉시 명하여 갈고리[鉅]로 잘라 죽였다. 공의 심오한 모책(謀策)과 기이한 책략(策略)은 옛날의 명장(名將)이라도 지나지 못할 것이다. 연안지(延安誌)에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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