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탄 이존오(石灘 李存吾) 선생 이야기
[생졸년] 1341년(고려 충혜왕 복위 2)~1371년(공민왕 20) / 향년31세
이존오(李存吾)선생은 경주이씨(慶州李)로, 자는 순경(順卿), 호는 석탄(石灘)이라 한다.
선생은 용모가 단정하고 재주가 뛰어나며 성격이 곧고 지조가 강한 분으로 어려서부터 배움을 좋아 하였다.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집은 가난하여 독학으로 학문을 닦았다.
나이 열살 때에는 한시(漢詩)를 지어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 가장 젊은 나이로 당시 유명한 학자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반남 박상충(潘南 朴尙衷). 도은 이숭인(陶隱 李崇仁). 삼봉 정도전(三峰 鄭道傳). 육우당 김구용(六友堂 金九容). 안동 김제안(安東 金齊顔)선생들과 친교가 두텁고 학문이 장하여 여러 차례 강론을 거듭하여 세상 사람들은 선생의 학문이 탁월함을 높이 평가하였다 한다.
선생은 1360년(공민왕 9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수원서기(水原書記-正八品)를 거쳐 사한(史翰)에 보직되고 승진하여 감찰규정(監察糾正-從六品)에 오르며, 서기 1366년 공민왕 15년 25세 때에는 사간원 우정언(司諫院右正言-從六品)에 올랐다.
그러나 공민왕은 옥천사에 사는 중 신돈(辛旽)을 가장 높은 벼슬에 기용하였다. 신돈(辛旽)은 왕에게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고 한 사람의 독재로 정치를 제멋대로 행하였다. 그 후 갖은 학정을 다하여 세상은 어지럽고 나라는 점차 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신돈의 횡포와 세도에 눌려서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오직 선생만이 일신의 생사를 돌보지 않고. 귀중한 생명을 초개와 같이 여겨 죽음을 각오하고, 정추(鄭樞)라는 사람과 더불어 신돈은 요물이라 나라를 망치니, 그냥 두어서는 아니 되므로 이를 당장에 파면하고 그의 일당을 모조리 엄중히 처단하라는 강경한 상소를 올렸다.
그 상소를 받아 본 공민왕은 대노하고 상소문을 다 보지도 않은 채, 불사르고 서생을 극형에 처하려고 즉시 문책하기에 이르렀다. 선생은 왕이 불러서 대궐에 들어가 보니 신돈은 여전히 신하로서 예절을 무시하고 오만하게 왕과 같이 앉아 친구처럼 대화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선생은 의분심에 노기가 충천(衝天)하여 왕 앞에서 당당하게 [이 늙은 중놈아! 어찌 이 같은 망령된 일을 하느냐]하고 호통을 쳤다.
신돈은 그 순간 놀라서 겁을 먹고, 왕과 같이 앉은 자리에서 내려앉을 것도 이전 채, 정신 없이 고개를 돌렸다 한다. 왕은 곧 선생을 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왕이 신하에게 말하기를 [이존오의 눈씨가 몹시 무섭다.]고 하였다 한다.
왕은 선생을 극형에 처하려 하였으나 이목은(李牧隱)선생께서 극구 변론하기를, 고려 나라는 창건한지 500년이 넘어도 한 사람도 간관(諫官)을 죽인 일은 없다. 만일 죽이면 왕의 악평이 나라 안에 퍼지리라 하였다. 왕은 할 수 없이 선생을 장사감무(長沙監務=오늘날 전북 고창군 무장면의 작은 현(縣)의 감독관)라는 벼슬에 좌천시켰다. 그 당시 사람들은 모두 선생을 진정 나라의 정언(正言)이라 칭송하였다.
그 후 선생은 왕이 끝까지 신돈을 파면하지 않고, 여전히 정계에서 포악한 정치를 계속하여 나라는 날로 쇠퇴하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유리방황하니, 깊이 개탄한 나머지 용감하게 퇴관하고 지금의 부여읍 저석리에 내려와 은거 생활을 하였다. 선생은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의연한 자세로 신돈의 포악한 정치를 준엄하게 비판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마침내 원통하고 울분하여 병이 났다. 병은 날로 더욱 심하여 위독한데, 하루는 선생이 묻기를 [군자에도 신돈의 세력은 여전하냐?]하니 곁에 있던 사람들이 과연 그렇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선생은 노기 띤 어조로 [신돈이 죽어야 내가 죽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다시 자리에 편하게 눕기도 전에 눈을 감고 세상을 떠났다.
이 때 선생의 나이 31세이다. 그 후 나라에서는 선생의 충성심을 높이 평가하여 성균관 대사성(成均館 大司成-正三品)에 추증하였고, 선생의 아들 내(來)가 열 살 이었을 때 공민왕(恭愍王)이 친필로 "간신(諫臣)의 아들 안국"이라 크게 써서 장차직장(掌車直長-從七品)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한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 석 달 만에 신돈은 갖은 음탕과 포악한 정치를 계속하고 나중에는 왕에게 반역하려하다가 공민왕이 이를 역적으로 몰아 죽였다. 돌이켜 생각하면, 선생은 천하에 드문 수재로서 국민의 두터운 신망을 한 몸에 안고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은 채, 당당하게 싸우며 끝까지 절개를 지켰으니 몸은 가셨으나 이름은 천추에 빛나니 후세의 귀감이 되기에 넉넉하다.
선생은 여주(驪州)의 고산서원(孤山書院), 부여의 의열사(義烈祠), 무장(茂長)의 충현사(忠顯祠), 공주의 공암서원(孔岩書院)에 모시어 향사를 드리고 있다.
선생의 시 한 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구름이 무심하단 말이 아마도 허황하다.
중천에 떠 있어 임의 다니면서
구태여 광명한 날빛을 따라가며 덮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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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중종 13년 무인(1518, 정덕 13)
6월 6일(갑술)
고려 말 이존오의 절의를 포장하는 충청도 관찰사 이세응의 장계.
충청도 관찰사 이세응(李世應)이 장계(狀啓)하기를,“신이 생각하옵건대, 전조(前朝) 고려(高麗)의 정언(正言) 이존오(李存吾)는 천성이 충의(忠義)를 타고났고 마음이 맑고 곧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고려 말기를 만났을 때는 요승(妖僧) 신돈(辛旽)이 임금의 권세를 빙자하여 제멋대로 방자한 짓을 하는데도 상하 모두 두려워하며 감히 어떻게 하지를 못하였습니다.
이때에, 이존오가 능히 분발하여 몸을 돌아보지 않고 죽기로써 항쟁하여 눈을 부릅뜨고 신돈을 질책하였습니다.
존오(存吾)의 이러한 정의(精義)에 격동되어 신돈은 그만 기가 꺾이어 자기도 모르게 평상에서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현릉(玄陵=고려 제31대 공민왕(恭愍王을 말함)이 살피지 못하여 그는 결국 찬축(竄逐-죄인을 멀리 귀양 보내어 쫓음)을 당하였는데, 얼마 후에 용서를 받고 석탄(石灘)에 있는 별장으로 돌아와 지냈습니다. 석탄은 지금 공주(公州) 주치(州治)의 서쪽, 부여(扶餘) 동쪽 경계에 있는데 《여지승람(輿地勝覽)》에도 실려 있습니다.
그가 임종할 때에는 분을 이기지 못해 병이 되었고, 그리하여 걸핏하면 일어나서 외치기를 ‘돈(旽)이 아직도 날뛰고 있는가?’ 하였습니다. 시자(侍者)가 답하기를 ‘아직도 날뛰고 있다.’ 하니, 그는 ‘돈이 죽어야 내가 죽는다.
나는 죽은 뒤라야 그만두겠다.’ 하였는데, 그의 뜻은 대개 공민왕(恭愍王)이 역적 신돈에게 고혹(蠱惑)되어 나라가 장차 위태롭게 되었으므로, 그는 자기 한 몸의 사생(死生)을 나라의 존망(存亡)과 같은 것으로 보고, 돈이 죽어야 나라가 사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 충성과 의열(義烈)은 참으로 천고에 우뚝 솟아, 위로는 일월(日月)과 겨룰 만하였고 아래로는 족히 만세(萬世) 신자(臣子)의 의열(義烈)을 격발(激發)할 만하였습니다. 공민왕도 뒤에 깨달아서 그에게 벼슬을 증직(贈職)하고 포상을 하였습니다.
우리 조정에서도 또한 특별히 포창하여 절의를 장려해야 할 것인데, 아직도 그것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런 일입니다. 이존오(李存吾)의 유허(遺墟)는 지금도 석탄(石灘) 옆에 있으나 형적이 없어지고 잡풀이 우거져서 찾아볼 만한 자취가 없습니다.
밭가는 농부들도 ‘저기가 아무개의 유허이다.’ 하고 지껄이며, 식자들이 자나갈 때는 그쪽을 바라보고 탄식하다가 차마 떠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의 명성은 이와 같이 오랠수록 더욱 격발되고 있습니다.
또 이존오는 어릴 때에 ‘큰 들판 모두 다 묻혀 버려도 높은 산은 여전히 우뚝하구나. [大野皆爲沒 高山獨不降]’라는 절구(絶句)를 지은 일이 있었는데, 이를 보고 사람들이 말하기를 ‘결국에 가서는 큰 절의를 세울 참언(讖言)이다.’ 하였습니다.
신 등의 생각으로는, 석탄(石灘) 근방에 조그만 비석을 세우고, 그의 구거(舊居)임을 표시하되, 전면에 ‘고려 정언 이 선생 존오 우거지소(高麗正言李先生存吾寓居之所)’라 쓰고, 양옆에는, ‘대야개위몰(大野皆爲沒)’과 ‘고산독불강(高山獨不降)’ 두 귀를 나누어 쓰고, 뒷면에는 그의 평생 행적의 대략을 쓰고, 주위에는 얕은 담을 두른 다음, 그의 후손으로 하여금 수호하게 함이 어떨까 싶습니다.
이렇게 하면 영원토록 표창하는 뜻을 보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 땅을 보고서 그 사람을 생각하며, 또 저절로 감동하고 분발하는 생각이 일어나게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옛날에 무왕(武王)은 은(殷)을 치고 나서, 비간(比干)의 묘(墓)를 봉(封)하고 상용(商容)의 집에 경의를 표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곧 의거(義擧)를 하고 첫 번째로 한 일이었거니와, 이번의 이 일 역시 국가의 성전(盛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손 가운데 공주에 사는 자는 5인이요, 면천(沔川)에 사는 자가 5인이니, 그들의 성명(姓名)을 열거해서 계문(啓聞)한 뒤에 기록해 두었다가, 그 중에서 벼슬을 할 만한 자는 골라서 녹용(錄用)하고, 그렇지 못한 자에게는 물품을 내리고 복호(復戶)하소서. 죽은 이를 표창하고 산 사람을 권면하는 것은 한 도(道)의 사기(士氣)를 진작할 뿐만 아니라, 일세(一世)의 기틀을 회복함에 있어 어찌 크게 관계되지 않겠습니까? 해조(該曹)로 하여금 마련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것은 세응(世應) 자신의 뜻으로 올린 것이 아니요, 도사(都事) 박세희(朴世憙)가 하고 싶어 하던 일이었는데, 세응이 이를 거부하지 못하여 감히 계청하였던 것이다.
[원전] 15 집 451 면
[원전] *윤리-강상(綱常) / *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 *역사-전
사(前史) / *역사-고사(故事)
[주01]비간(比干)
비간은 은(殷)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의 제부(諸父)로서, 주왕의 황음무도함을 간(諫)하다가 그의 노여움을 사서 마침내 주륙을 당하였다. 기자(箕子)·미자(微子)와 함께 은의 삼인(三仁)으로 불리는데, 주나라가 선 뒤에 무왕은 전 왕조의 충신에 대한 은전(恩典)과 함께 절의를 포장하기 위해 비간의 묘를 봉한 일이 있다. 《서경(書經)》 주서(周書) 무성(武成).
[주02]상용(商容)
상용은 주왕(紂王) 때의 대부(大夫)로서, 주왕에게 직간하다가 폄출(貶黜)되었던 인물이다. 《서경(書經)》 무성(武成), 《예기(禮記)》 악기(樂記).
[주03]복호(復戶)
요역(徭役)을 면제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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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글]
●석탄(石灘)이란?
석탄(石灘)이란? 암초가 많아서 배나 뗏목들이 다니기 어려운 곳의 강가, 혹은 바닷가를 말하는 곳인데, 석탄 이존오(石灘 李存吾) 선생이 부여 석탄(石灘)에 우거(寓舍)했다는 지명을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8권에는 석탄(石灘)은 부여현 동쪽 12리에 있으며, 백마강의 상류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오늘날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저석리의 옛 지명으로 보시면 됩니다
장사(長沙)는 현재 호남성(湖南城)의 성도(城都)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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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鄭夢周)
봄바람에 괴로이 이장사를 생각하며 / 春風苦憶李長沙
남루에 기대니 해가 기울려 하네 / 徏倚南樓日欲斜
선실(宣室)에서 은혜 받들기 멀지 않았으리니 / 宣室承恩應未遠
석탄(石灘)의 밝은 달을 자랑할 것이 없다 / 石灘明月不須誇
[주01]기 이정언(寄李正言)
고려 공민왕(恭愍王)에게 정언(正言) 이존오(李存吾)가 신돈(辛旽)을 탄핵하는 바른 말을 하다가 장사 감무(長沙監務)로 쫓겨 나갔다.
[주01]선실(宣室)
임금이 제사지내기 위하여 재계(齋戒)하는 집인데, 한문제(漢文帝)가 장사(長沙)에 귀양갔던 가의(賈誼)를 불러 와서 선실에서 인견(引見)한 말이 있었다.
[주02]석탄(石灘)
이존오가 석탄(石灘)에 살았기 때문에 호(號)가 석탄이었는데, 여기서는 그가 장차 다시 임금에게 불려올 것이므로, 석탄의 밝은 달을 자랑하지 말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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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정언 이존오(別定言李存吾)
윤소종(尹紹宗)
맑은 날 대궐 뜰에서 천둥 친 뒤에 / 大廷白日雷霆後
남북으로 <귀양간> 삼년동안 몇 번이나 꿈꾸고 생각했던고 / 南北三年幾夢思
다시 이정에 올라 거듭 머리 돌리나니 / 復上離亭重回首
가을 높은 산에 슬픔이 생기기 쉬워라 / 秋高喬嶽易生悲
[01]이존오
“병오년에 정추 간의(鄭樞 諫議)와 함께 신돈(辛旽)을 논란하다가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다.”
라는 제주(題註)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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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집 제1권
정도전(鄭道傳)
●석탄(石灘)
[안] 정언(正言)이존오(李存吾)가 상소하여 신돈(辛旽)을 논하다가 장사 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었다.
그 뒤에 부여(扶餘) 석탄에 살면서 여울위에 정자를 짓고 우유소영(優遊嘯咏)하여 일생을 마쳤으므로 공은 이 시를 지었다.
돌 면은 쇠를 깎아 세운 듯하고 / 石面立削鐵。
여울물은 긴 무지개에 닫는 것 같네 / 灘流奔長虹。
여울머리 낚싯배 빗겨 있고 / 灘頭橫漁艇。
여울 위 모궁이 우뚝하여라 / 灘上起茅宮。
높은 선비 깨끗하다 못해 병이 들어 / 高人抱淸疾。
돌아와 그 가운데 누워 있다오 / 歸來臥其中。
아침나절 노닐면 콸콸 흐르고, 어떤 본에는 호탕(浩蕩)이 탕마(蕩磨)로 되어 있음. / 朝遊欣浩蕩。
저녁에 바라보면 밝을락 말락 / 夕眺驚明滅。
날 더우면 상쾌한 기운 감돌고 / 天炎挹孤爽。
흐린 물 그치면 달이 흐른다 / 潦盡流皓月。
봄물은 쪽빛보다 더욱 푸르러 / 春水碧於藍。
하얀 눈이 날릴 때와 어떠하더냐 / 何如飄朔雪。
편히 앉아 기변을 구경하노라니 / 燕坐玩奇變。
[안] 뒷사람의 평에 위의 여섯 구절은 아침ㆍ저녁ㆍ춘ㆍ하ㆍ추ㆍ동의 광경을 지적한 것이라고 하였다.
가고 가서 머무를 때가 없구려 / 逝者無停時。
저기 쌍쌍 노니는 갈매기만이 / 獨有雙白鷗。
날아와 언제나 여기에 있네 / 飛來長在玆。
[안] 뒷사람의 평에 기심(機心)을 잊었기 때문에 갈매기와 해오리가 와서 가깝게 따른 것이라고 하였다.
어허 이내 신세는 새만 못해 / 嗟我不如鳥。
가지 못해 부질없이 서로 생각만 하네 / 未去空相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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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선 제5권
정도전(鄭道傳)
●석탄-정언 이존오를 위해 짓다[石灘爲李正言存吾作]
돌 낯은 깎은 쇠를 세운 듯하고 / 石面立削銕。
여울 흐름은 긴 무지개가 달아나는 것 같다 / 灘流奔長虹。
여울 머리에는 고기잡이 배가 비껴 있고 / 灘頭橫漁艇。
여울 위에는 초가집이 서 있다 / 灘上寄茅宮。
높은 사람이 맑은 병을 안고 / 高人抱淸疾。
돌아와 그 속에 누워 있다 / 歸來臥其中。
아침에 놀 적에는 밀치고 갈고 하는 물결을 즐겨하며 / 朝遊欣蕩磨。
저녁 조망에는 밝았다 꺼졌다하는 것에 놀랜다 / 夕眺驚明滅。
하늘이 더울 때면 서늘한 것을 끌어 당기고(여름) / 天炎挹孤爽。
다하면 흰 달이 흐른다(가을) / 潦盡流皓月。
봄 물이 쪽보다 푸르니(봄) / 春水碧於藍。
북풍에 나부끼는 눈과(겨울) 어떠한가 / 何如飄朔雪。
조용히 앉아 기이하게 변화하는 경치를 구경하니 / 燕坐玩奇變。
가는 것이 멈출 때가 없도다 / 逝者無停時。
홀로 있으니 쌍쌍의 백구가 / 獨有雙白鷗。
날아와 오래오래 여기에 있다 / 飛來長在玆。
슬프다, 나는 새만도 못하여 / 嗟我不如鳥。
가지는 못하고 부질없이 서로 생각만 한다 / 未去空相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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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선생문집(西厓先生文集) 제17권
●의열사기(義烈祠記)
부여는 옛 백제가 도읍한 터이다. 그 신하들 중에 죽음으로써 직간한 사람은 좌평 성충(成忠)이요, 재앙을 치르면서도 원망함이 없이 위험을 무릅쓰며 충성을 다한 사람은 좌평 흥수(興首)요, 생명을 버리고 충절로써 나라를 지킨 사람은 장군 계백(階伯)이었다.
그 뒤로 7백년이 흐른 고려말엽에 정언(正言) 이존오(李存吾)가 글을 올려, 간사한 무리를 배척하자 장사 감무(長沙監務)로 폄직되었다. 현의 북쪽 10리에 있는 석탄(石灘)은 실로 이씨(李氏)가 예전에 살던 곳으로 정문(旌門)이 남아 있다.
지금도 유민(遺民)과 고로(故老)들이 종종 그 풍채와 덕업을 일러 오면서 제사는 빠뜨리고 거행하지 않아 현의 백성들과 관리들이 크게 수치로 여겨 오던 터였다.
만력(萬曆) 을해 년(1575, 선조 8)에 나의 벗 홍흥도(洪興道)가 명을 받아 이 읍에 부임하게 되었다.
얼마 지나서 부서(簿書)와 문안(文案)을 정리하는 여가에 지도를 참고하고 역사를 열람하다가 네 사람에 대한 기록을 발견하고는 길이 감탄하면서 “아, 이것이 어찌 원[守]된 사람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말하였다. 이에 현의 부로들과 상의한 결과 사당 건립을 도모하게 되었다.
망월산(望月山)ㆍ경룡산(敬龍山) 북쪽에 자리 잡은 사당은 산에 서리었고 강물이 둘러 안았다.
그 경계가 높아 형세가 활짝 틔었으니, 참으로 신령을 모시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이에 홍흥도(洪興道)는 자기 봉록에서 덜어 내고 물자를 절약하여 일 없는 사람을 불러 모아 일을 시키니 농민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도 수개월 만에 일을 마치게 되었다. 사당이 완성되자 관리들과 고을 백성들을 거느리고 제사를 모셨다.
얼마 후에 이 일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상께서 가상히 여기고 명하여 의열사(義烈祠)라는 편액을 하사하시니, 나라 안에 좋은 풍속을 심어서 후대에 길이 모범을 드리우고자 함이었다. 생각건대, 백제는 두 나라 틈바구니에서 부강하다고 일컬어지더니, 말엽 저 어둡고 용렬한 군주가 나라를 다스릴 적에는 목 베고, 코 베고, 칼 씌워 하옥함을 일삼아 온 조정의 입을 봉해 버렸다.
그러나 성공(成公)만은 제 몸을 돌보지 않고 분연히 일어나 임금의 잘못을 간하다가 두 다리를 묶인 채 감금당한 처지에서 절명시를 읊기까지 하면서 능히 국가의 대계를 진술하여 왕의 한번 깨달음을 시도하되 조금도 원망하는 말이 없었으니, 그 충성은 거룩하였다.
그 뒤에 흥공(興公)은 국사가 이미 허물어져 감을 답답하게 여겨 배척당함을 꺼리지 않으며 정성스럽게 그치지 않으니, 꾸준히 간한 말은 곧 전일의 성공(成公)의 말이요, 마음 역시 전일 성공의 그 마음이었다.
이미 강산이 무너져 의지할 곳을 잃고 대군이 바야흐로 쳐들어오자, 계공(階公)이 또한 5천 약졸을 거느리고 비분강개하여 적진에 나갈 때 먼저 그 처자를 죽이고 필사적으로 싸울 마음을 먹고 마침내 적의 칼날을 밟아도 후회가 없었으니, 비록 옛 열사라 할지라도 어찌 이보다 장할 수 있었으랴.
고려 말 공민왕 때에 나라가 혼란해지자 늙은 중(신돈)이 국정을 담당하여 비록 유종(儒宗)이나 명상들을 턱과 손가락질로 부리지 못한 이가 없었으나, 이공(李公)만은 신진 관리의 낮은 신분으로서 조정에서 간사한 무리들을 꾸짖되 조금도 흔들리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충의를 지키는 분분한 뜻이 죽음에 임하여서도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
저 몇 분의 충절이 세대를 달리하기는 하나 서로 바라보는 것이 간과 쓸개가 조응하듯 비추고 전해 내려와 덕화의 향기로운 땅이 지금까지 뭇사람들에게 존경심을 불러일으켰으니 한 사당을 건립하는 일이 백성의 교화에 관계됨이 크다.
대개 하늘이 백성을 낼 때 사물이 있으면 법칙이 있으니, 백성이 타고난 떳떳한 성품은 아름다운 덕을 좋아한다.
신하가 임금을 섬김에 평소에는 자기 힘대로 충성을 다하며 불행히 나라가 위태로운 때를 만나서는 제 몸이 부서지고 멸족되어도 후회하지 않으니, 이것이 어찌 할 수 있는 것이어서 그렇게 하였으리요. 실로 하늘로부터 받은 떳떳한 성품이 저절로 그칠 수 없는 양심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저 백제로부터 고려의 시대까지는 모두 천 년이 넘으니, 당시 공경대부들로 찬란히 세상에 이름을 떨친 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그들이 죽은 뒤에는 빛이 흐려지고 명성이 끊어져 초목과 더불어 썩으니, 그 마을 앞을 지나는 자들이 팔을 흔들고 지나가며 누가 있었던 마을인지 묻지도 않는다.
유독 이 몇 분들에게는 북받치는 슬픈 마음으로 사당을 지어 제사하는 데까지 이르니, 이는 과연 어찌 할 수 있는 것이어서 그렇게 되었겠는가. 또한 떳떳한 성품과 덕을 좋아하여 스스로 그만두지 못하는 양심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후세 사람들이 여기에서 보고 또 취사하여 스스로 권장할 바를 알 수 있으리라.
의열사가 일어난 것과 조정이 정성스럽게 대하는 것은 비록 아득히 크다고 하지만 네 분의 충절이 이와 같이 뛰어남에도 사묘의 건립이 금일에야 이루어졌으니, 어찌 때를 기다려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들으니 홍흥도가 이미 자상하고 온화하게 정치하여 민심을 얻고 더욱 백성을 깨우치고 교화하는 데 마음을 두었고, 마침내 숨겨진 일을 밝게 들춰내며 경박하고 게으른 것은 일깨워 독려하므로써 한 고을의 이목을 일신하니, 그 일이 더욱 우러러보인다.
홍흥도를 계승하는 사람이 능히 홍흥도의 마음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삼아 사우가 황폐하지 않고 길이 보전될지 여부는 알지 못하겠거니와, 게다가 부여의 백성들이 네 분들의 충절을 마음의 숫돌로 삼아 힘써 갈아 뒷날 성하게 국가에 등용됨으로써 홍흥도가 격려하고 권장하던 뜻을 저버림이 없겠는가? 자기에게 있는 책임은 홍흥도가 이미 다하였지마는 남에게 있는 것은 홍흥도가 알 바가 아니다.
사묘의 구조는 3칸인데, 재실과 부엌이 함께 갖추어졌다. 또한 그 옆에 관선당(觀善堂)을 지어 선비들이 학문하고 수양하는 곳으로 삼았고, 관전(官田)을 나누어 제사를 받들게 하였으며, 주민을 모집하여 지키게 하였다. 그 공사의 감독 맡은 이는 읍 사람 서귀수(徐龜壽)라고 한다.
만력 신사년(1581, 선조14) 초여름에 통정대부 홍문관부제학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유성룡은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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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18권
●충청도 부여현(忠淸道 扶餘縣)
동쪽으로는 공주 경계까지 24리, 석성현(石城縣) 경계까지 15리 이고, 남으로는 임천군(林川郡) 경계까지 20리 이고, 서쪽으로는 청양현(靑陽縣) 경계까지 37 리, 홍산현(鴻山縣) 경계까지 19리 이고, 북으로는 정산현(定山縣) 경계까지 21리 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3백 96리이다.
[안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소부리군(所夫里郡) 사자(泗泚)라고도 한다.
백제의 성왕(聖王)이 웅천(熊川)으로부터 여기에 와서 도읍하고, 남부여(南扶餘)라 이름하였다.
의자왕(義慈王) 때에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이 당 나라 소정방(蘇定方)과 더불어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당 나라 군사가 돌아가고 나서는 신라에서 그 땅을 모두 차지하였다. 문무왕(文武王) 12년에 총관(摠管)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군(郡)으로 만들었으며, 고려 현종(顯宗) 9년에 공주에 예속시켰고,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본조 태종 13년에 예에 따라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소부리(所夫里)ㆍ남부여(南扶餘)ㆍ반월(半月)ㆍ사자(泗泚) 자(泚)는 혹 비(沘)로도 쓴다. 여주(餘州)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와 있다.
[성씨] 본현 심(沈)ㆍ이(李)ㆍ서(徐)ㆍ전(全)ㆍ형(邢)ㆍ조(曹)ㆍ고(高)ㆍ표(表)가 있으며 백(白) 속성(續姓)
이다.
[형승]탄현(炭峴)ㆍ백강(白江) 성충(成忠)이 의자왕을 간(諫)한 글에 있으며, 인물편에 자세히 나와 있다.
[산천] 부소산(扶蘇山) 현 북쪽 3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동쪽 작은 봉에 비스듬히 올라간 곳을 영월대(迎月臺)라 부르고, 서쪽 봉을 송월대(送月臺)라 이른다.
탄현(炭峴) 현 동쪽 14리에 있는데 공주와의 경계이다.
부산(浮山) 고성진(古省津)의 북쪽 언덕에 있다.
망월산(望月山) 현 동쪽 15리에 있으며, 또 석성현(石城縣) 편에도 나와 있다.
취령산(鷲靈山) 현 서쪽 20리에 있다.
오산(烏山) 현 남쪽 7리에 있다.
나소현(羅所峴) 현 서쪽 30리에 있다.
백마강(白馬江) 현 서쪽 5리에 있다.
양단포(良丹浦) 및 금강천(金剛川)이 공주의 금강(錦江)과 합류하여 이 강이 된 것인데, 임천군(林川郡) 경계로 들어가서는 고다진(古多津)이 된다. 고성진(古省津) 바로 사자하(泗泚河)인데, 부소산 아래에 있다.
○ 백제의 의자왕 때 물고기가 죽어 물 위에 떴는데, 그 길이가 3장(丈)이나 되었다. 이를 먹은 자는 죽었고, 또 물빛
이 붉게 변하여 핏빛과 같았다. 대왕포(大王浦) 현 남쪽 7리에 있는데, 오산(烏山) 서쪽에서 발원하여 백마강(白
馬江)으로 들어간다.
○ 백제의 무왕(武王)이 매양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사자하(泗泚河) 북쪽 물가에서 놀면서, 술마시며 즐기고 술
이 취해서는 반드시 거문고를 뜯으면서 스스로 노래하고, 시종하는 자들을 일어나 춤추게 하여, 당시 사람들이
이로 말미암아 ‘대왕포(大王浦)’라 일컬었다 한다.
광지포(光之浦) 현 동북쪽 7리에 있다.
양단포(良丹浦) 현 서쪽 7리에 있다.
나소현(羅所峴)에서 발원한다.
금강천(金剛川) 현 북쪽 23리에 있다.
석탄(石灘): (부여)현 동쪽 12리에 있으며, 백마강의 상류이다.
(석탄(石灘)이란?
암초가 많아서 배나 뗏목들이 다니기 어려운 곳의 강가, 혹은 바닷가를 말하는 곳인데, 석탄 이존오(石灘 李存吾) 선생이 부여 석탄(石灘)에 우거(寓舍)했다는 지명을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8권에는 석탄(石灘)은 부여현 동쪽 12리에 있으며, 백마강의 상류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오늘날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저석리의 옛 지명으로 보시면 됩니다.)
○ 고려의 정언(正言) 이존오(李存吾)가 글을 올려 신돈(辛旽)을 탄핵하였다가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었
다. 그 뒤에 이곳에 살면서 여울 위에 정자를 짓고 한가로이 시를 읊으면서 그 몸을 마쳤는데, 일찍이 시를 짓기
를,
“백제 옛 나라 장강(長江) 굽이에,
석탄(石灘)의 풍월이 주인 없는 지 몇 해이런가.
들불이 언덕을 사르니 평탄하기 손바닥 같은데,
때때로 소가 묵은 밭을 가네.
내가 와 정자 짓고 승경(勝景)을 더듬으니,
온갖 경치 아름답게 앞으로 몰려드네.
구름과 연기는 교사(蛟蛇)의 굴에 끼었다간 사라지고,
산 아지랑이 아물거리며 먼 하늘에 떠 있다.
흰 모래 언덕 뚝 끊기매 갯물이 들어오고,
큰 암석이 연달아 물가에 비꼈구나.
조각배 저어 남으로 올효조(兀梟窕)로 돌면,
돌난간 계수나무 기둥이 맑은 물을 굽어본다.
돌부처여, 그대는 의자왕 시대의 일을 목격하였으리라.
오직 들 두루미 와서 참선(參禪)하고 있구나.
상상해 보니 옛날 당 나라 장수가 바다를 건너왔을 때,
웅병(雄兵) 10만에 북소리 둥둥 울렸으리.
도문(都門) 밖 한 번 싸움에 나라 힘을 다했으나,
임금이 두 손 모아 결박을 당하였다.
신물용(神物龍)도 빛을 잃고 제자리 못 지켰나.
돌 위에 남긴 자취 아직도 완연하다.
낙화암(落花巖) 아래에는 물결만 출렁대고,
흰 구름 천년 동안 속절없이 유연(悠然)하다.”
하였다.
[참고]
백마강은 장강(陽子江)의 지류
백제 류민의 노래 산유화가(山有花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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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도전(鄭道傳)의 시에,
“석벽은 쇠를 깎아 세운 듯,
여울 흐름은 긴 무지개가 달아나는 듯.
여울 머리에 고기잡이배 비꼈고,
여울 위에는 초가집을 세웠다.
고상한 사람이 깨끗한 병(病)을 안고서,
벼슬 버리고 돌아와 그 가운데 누워 있다.
아침나절 놀이에는 호탕(浩蕩)한 물결 즐기고,
저녁 조망(眺望)에는 밝았다 어두웠다 하는데 놀란다.
날씨가 더울 때엔 시원함을 끌어당기고,
장마가 다 지나면 흰 달이 흐른다.
봄 강물이 쪽[藍]보다 푸르거니,
북풍에 나부끼는 백설과 어떠하랴.
조용히 앉아 기이하게 변해 가는 사시를 구경하니,
저 흘러가는 것은 멈출 때가 없구나.
홀로 한 쌍의 저 흰 갈매기, 날아와서 이곳에 길이 있구나.
슬프다,
나는 저 새보다도 못하여,
가지도 못하고 속절없이 서로 생각만 한다.”
하였다.
○ 정몽주(鄭夢周)의 시에.
“봄바람에 마음 아프게 이 장사[李長沙, 이때 이존오(李存吾)가 장사 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어 있었다]를 생각하고, 남쪽 누각에 방황하니 해가 비끼려 한다.
선실(宣室)의 은명(恩命) 받을 날이 응당 멀지 않을 것이니,
석탄(石灘-이존오의 호) 위의 밝은 달을 자랑하지 말라.” 하였다.
○ 이직(李稷)의 시에,
“이씨(李氏)는 신라 대성(大姓)의 후예(後裔)로, 선생의 절의(節義)가 또 남다르네.
간신(奸臣)을 때린 수실(秀實)이 필경 시대와 맞지 않고,
세상 도피한 엄자릉(嚴子陵)은 곧 낚싯대 드리웠다.
일은 지났어도 그 높은 이름 해ㆍ별과 함께 빛을 다투고,
성탄(星灘)은 비었는데 양쪽 언덕에는 쑥ㆍ명홧대 뿐이로다.
충효(忠孝)로 집을 이은 계성군(鷄城君-이존오의 아들)이 있으니,
남은 경사 무궁함을 어찌 헤아리랴.” 하였다.
○ 안노생(安魯生)의 석탄정기(石灘亭記)에,
“내가 이미 관례(冠禮)를 하고 서울 가서 배울 때에, 살던 곳이 선생의 집과 수리(數里)도 못 되었다. 당시 선생은 아직 총각으로 유희(遊戲)를 일삼지 않고 성품이 독서를 좋아하였는데, 한 번 나를 보고는 곧 흔연히 옛 친구같이 대하였다.
나도 또한 그가 장차 영특한 인물이 될 것을 알고서 서로 벗이 되어 좋아하였더니, 다음 해 봄에 똑같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선생이 나에게 말하기를, ‘석탄(石灘)은 나의 선자(先子-돌아가신 아버지)의 별장[別業]이다. 공산(公山-공주) 금강(錦江)의 서쪽이자, 부여(扶餘) 반월성(半月城)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계룡산에서 발원하여 공산의 남쪽을 경유하여, 다시 서쪽으로 꺾여서 드디어 금강과 합류하여 역류(逆流)로 돌아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옛날 내 선자께서 간관(諫官)으로 계시다가, 물러나와 이곳에 사시면서 그 위에 정자를 짓고 날마다 올라가서 푸른 산을 대하고 흐르는 물을 굽어보시면서, 그윽한 심정을 마음껏 푸셨던 곳이다.
미약한 나 소자(小子)는 아무 재능도 없는 사람으로 또한 간대부(諫大夫)가 되었다가, 일을 논한 것이 잘못되어 드디어 이곳에 돌아와서 선자의 뜻을 이어 장차 이 몸을 마치려고 했더니, 성명(聖明)하신 임금을 만나 신(臣)을 석탄(石灘) 가운데서 끌어올려, 정부에 두시고 훈신(勳臣)의 반열에 참여하게 하시어 계림군의 봉작(封爵)을 내리시고, 능연각(陵煙閣) 위에 형모를 그렸으니, 아름다운 벼슬과 후한 녹봉의 영광이 조상에게 빛나는지라 어찌 마음속에 부끄럽지 않으리오.
같은 석탄인데 선자의 어짊으로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하시고 끝내 폐해졌거늘, 어리석고 졸렬한 내가 특별히 그 사이에서 기용되어 이에 이르렀으니, 나 혼자서 은근히 이를 괴상하게 생각하는 바이다.
그대는 나를 위하여 그 사실을 쓰라.’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일찌기 조정의 공의(公議)를 들으니, 모(某 이존오(李存吾))는 동국의 간신(諫臣)이다. 전조(前朝)를 섬기던 날에 현릉(玄陵 공민왕)이 역적 신돈(辛旽)에게 미혹하여, 나라 일이 날로 그릇되어 가서 만일 배척해 말하는 자가 있으면, 매양 그를 중상(中傷)하기 때문에 비록 의사(義士)라고 불리는 사람도 모두 화(禍)를 두려워하여 감히 말하지 못하였는데, 모(某)가 정언(正言)으로서 분연히 대의(大義)를 창(倡)하여, 몸을 돌아보지 않고 분연히 글을 올려 그를 탄핵하니, 간하는 말이 간절하고 정직하였는데 과연 거슬림을 당하여 장사 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었다.
얼마 안 되어 석탄으로 놓여 돌아와서 한가로이 세월을 보내다가, 그 종말에 이르러 분함으로 인하여 병이 되어 누웠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큰 소리로 외치기를,
「돈이 멸망하였는냐.」
하므로, 모시고 있던 사람이 말하기를,
「아직도 기세가 치열합니다.」
하니, 도로 누우며 말하기를,
「돈이 멸망해야 내가 죽으리라.」
하였는데, 처음 병이 시작할 때부터 돌아갈 때까지 이와 같이 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하니, 그렇다면 그의 충성과 의기(義氣)는 죽을 때까지도 변하지 않은 것이니, 이는 천성에서 나온 것이요 억지로 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신돈이 죽음을 받으매, 현릉도 뉘우치고 깨달아 즉시 간의대부(諫議大夫)의 증직(贈職)을 내리고, 또 어필(御筆)로 특별히 쓰기를, 「간신(諫臣)의 아들 아무를 장복 직장(掌服直長)으로 삼는다.」하였다.
현릉이 비록 즉시 간하는 말을 좇지는 못했으나 악의 괴수를 베어 없애고, 뒤에 뉘우치고 깨달아서 그의 죽음을 영광스럽게 하고 그 아들에게 은총을 베풀었으니, 또한 현명한 임금일진저. 사람들의 말에, 「박옥(璞玉)의 아름다움을 비록 보지 못한 자라도 모두 그 온윤(溫潤)의 미(美)를 알며, 성현(聖賢)의 높은 것을 말하면 비록 미혹하고 어리석은 자라도 또한 도덕의 귀함이 있는 것을 안다.」한다.
그러기 때문에 백이(伯夷)ㆍ숙제(叔齊)는 서산(西山)에서 주려서 죽은 한 필부(匹夫)이지만,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그를 칭송하고 있는 것인데, 공의 선자가 비록 석탄 위에서 세상을 마쳤으나, 당시에 직접 보고 아는 자와 지금 이를 듣고 아는 자가 모두 그 의기에 탄복하면서 칭송을 마지않는 것은, 그 백이(伯夷)의 풍(風)이 있기 때문이다.
또 굽혔다간 피고, 갔다간 오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다. 가지 않으면 어찌 오며, 굽히지 않으면 어찌 펴겠는가. 더욱이 아버지와 아들은 한 기운이 나뉜 것이지만, 어찌 부자 사이의 굽히고 펴진 것을 둘로 볼 수 있겠는가. 이것으로 보아 선자가 전일 억울하였던 것은, 오늘의 펴짐을 가져 오려는 것이었음을 알 것이니, 선생은 무엇을 괴상하게 여기리요.
선생의 충의는 안으로는 가업(家業)을 이어나갈 것이오, 위로는 임금의 명을 저버리지 않고 영원히 왕좌(王佐)의 인재가 되어 유풍(流風)과 여경(餘慶)이 반드시 저 석탄과 함께 흘러서 쉬지 않을 것이다. 내가 선생에게 어찌 구차스럽게 환심을 사려 함이겠는가. 이미 그 사실을 쓰고 또 바라는 바가 있어 쓰는 바이다.’ 하였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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