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세자료

사인공전 역문(舍人公傳 譯文)

야촌(1) 2012. 1. 3. 21:18

■ 사인공전 역문(舍人公傳 譯文)

 

외사씨찬(外史氏撰)

 

옛날 문장(文章)의 선비가 기품이 대개가 맑고 서도 깨끗하였으니, 한(漢)나라의 채백계(蔡伯階)와 당(唐)나라의 왕자안(王子安)과 이장길(李長吉)무리가 모두 문학(文學)으로 조정에 올라 그들이 지은 것이 음악(音樂)에 오르고 제사에 쓰게 되었으므로 금석(金石)에 새기어 전하고 명산(名山)에 보관되기도 하였으니 일대(一代)에 지극히 선출한 인재(人才)라 하겠다.

 

이와 같은 사람으로 재주는 있으나 수를 누리지 못하여 후인(後人)들이 애석하게 여기었으니 경주(慶州) 이사인공(李舍人公) 이라는 분이 가장 이에 가깝도다. 사인(舍人)의 집에는 큰 선비와 큰 학문(學問)이 많았다.

 

열헌(悅軒) 핵(翮)의 부인(夫人) 김씨(金氏)가 친히 그 자제 인정(仁挺), 진(瑱), 세기(世基)에게 서사(書史)를 가르치어 크게 문호(門戶)를 열었으니, 인정(仁挺)의 아들 부(榑), 규(樛), 진(瑱)의 아들 관(琯), 제현(齊賢). 세기(世基)의 아들 천(蒨), 매(邁), 과(薖)는 적선 이태백(謫仙 李太伯)의 재주라 칭했다.

 

사인공(舍人公)은 세기(世基)의 아들이며 천(蒨)의 막내아우로 문장이 일찍 성취되어 고려말(高麗末)에 크게 울리었다. 그의 이름은 조[싹조>초두변[艹]밑에 포수(脩)]니 강화(江華)로 유배 되었다가 곽산(郭山)으로 배소를 옮기었다.

 

후세에 지석(誌石)을 얻었는데 이르기를, 칠 세손(七 世孫) 존(尊)이 학행(學行)으로 천거되고 그 아들은 춘림(春霖), 춘우(春雨)니 병자(丙子) 1636年 호란(胡亂)에 형제가 순절하였으니 아! 공이 일찍 돌아가서 세상에 쓰이지 못하고 그 후에도 또한 미약하였으니 대체로 하늘이 문장을 내매 재주에는 후하고 운명은 박한 것인가?

 

외사씨(外史氏,1780~1832)가 말하기를,『안연(顔淵)이 죽으매 공자(孔子)께서 사문(斯文)이 전하지 못함을 한탄하였으니, 이는 사문(斯文>道學을 말함)의 운수로서 한 경서도 후손에 전하지 못한 것이 더욱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