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세자료 168

남양홍씨절부비(南陽洪氏節婦碑)

↑이 정절비(좌측비)는 백석리 대곡동의 두리산(184m)의 남쪽 능선의 이윤인선생 묘 입구에 세워져 있다. 이 정절비는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 경주이공(慶州李公) 이윤인(李尹仁)의 처(妻)인 남양홍씨(南陽洪氏)의 절부(節婦)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비문 정면에 정부인남양홍씨절부지비「貞夫人南陽洪氏節婦之碑」라고 음각(陰刻)되어 있다. 정절비(貞節碑)는 비좌(碑座)와 오석(烏石)의 비신(碑身) 및 팔작지붕 옥개석을 갖추고 남서향(南西向)하고 있다. 비문에 의하면, 정부인 남양홍씨(貞夫人南陽洪氏)는 남양 만호 홍중랑(萬戶 洪仲良)의 계녀(季女 : 막내딸)이며, 병화(兵火)로 여문(旌門)이 소실되어 1975년에 옛 터에 석비(石碑)를 건립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비문은 18세손 이철우(李哲雨)가 서(書)..

일본 덴리대(天理大) 도서관 소장 익재공 존영.

■ 일본 천리대 도서관 소장분 익재공 존영. ↑일본 나라현 천리시의 天理大도서관에 소장된 익재공 진영(益齋公 眞影)이다. ↑경재부인진영(卿宰夫人眞影) 부인(婦人)은 陽村 權近(1352(공민왕 1)~1409(태종 9)의 配位로 아버지는 경주이씨 19世 석탄 이존오(石灘 李存吾)이다. 화상(畫像)의 오른쪽 상단에 경재부인 존오女(卿宰夫人 存吾 女)라고 적혀있다. ↑송암 부인진영(松菴夫人眞影) 복흥군(復興君 : 개국 2등공신) 배천인 조반(白川人 趙胖 : 1341년(충혜왕 복위 2)∼1401년(태종 1)의 배위(配位)로 아버지는 경주이씨 19世 사온서직장 이양오(司醞署 直長 李養吾)로 석탄 존오(石灘 存吾)의 형이다. 부인(婦人)은 남편을 잘 내조하고, 3남 3녀를 훌륭하게 잘 키워 현모양처의 표상이 되었다.

속리록(俗離錄)-담헌 이하곤

[頭陀草冊二 >詩○俗離錄] ■ 속리록(俗離錄) 遠祖高麗文忠公益齋先生。文章道德。聞於天下。至今四百餘載。學士大夫誦之不衰。公從忠宣王在江南。王命杭州畫史陳鑑如寫公眞。湯北村炳龍爲之贊。其後失而復得。公作詩以識之。卽公集中所云此物非他物。前身定後身者也。今藏於十四世孫報恩士人李覃慶家。曾王考碧梧公摹一本。藏之於鷄林書院。且有和詩一章。覃慶尙今藏弆不失。王考華谷公持湖節時。又作祠奉安。四方之士過是邦者。亦必摩挲太息而去云。余自幼時。聞公像尙無恙。願得一過祠下瞻拜之。今年春作俗離之遊。歸路訪覃慶於長山里。焚香盥手。謁公之廟。則公廣顙隆準美鬚髯。骨格秀聳。一見可知其爲偉人傑士也。所着冠服類深衣幅巾。坐鏤花胡床。左右置一香爐一玄琴一部周易。精神奕奕。溢出楮墨之外。雖在千載之下。望之凜然有生氣。陳之筆法。亦可謂絶世也。噫。自公之沒。不知其幾經兵燹水火之禍。而畫猶完好若是。豈非公之精忠大節。足..

치국과 시폐에 대한 정언 이경억 상소문。

◇孝宗實錄 >孝宗實錄 五年(1654年) >五年 六月 >孝宗 5年 6月 14日 ◇孝宗 12卷, 5年(1654 甲午 / 청 순치(順治) 11年) 6月 14日(壬申) 5번째기사 ■ 치국과 시폐에 대한 정언 이경억 상소문 (治國과 時弊에 대한 正言 李慶億 上疏文, 嗚呼! 殿下以有爲之資, 承艱大之業, 夙夜憂勤, 勵精圖治, 六年于玆矣。 是宜政成治隆, 國有鞏固之勢, 民有乂安之樂, 而一何擧措不厭人心, 施爲動輒掣肘 紀綱之頹廢也, 則殿下欲嚴刑以振之, 而法令猶或不行; 朝著之携貳也, 則殿下欲聲色以制之, 而朋黨卒莫能破。 收召賢俊, 則意在駕馭, 而誠禮有所不足: 策勵群工, 則億逆是事, 而情志每患不孚。 至於慶賞威刑, 人主之所以體天而勵世者, 而殿下或以一時喜怒, 私於其間。 臺諫曰可罪, 而殿下必曲貸之: 左右諸大夫皆曰不可, 而殿下必罪之, ..

기몽(記夢 : 꿈을기록하다)-이항복

■기몽(記夢 : 꿈을기록하다)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 1556년(명종 11)∼1618년(광해군 10). 신축년(1601 선조 34) 정월 11일 밤에 꿈을 꾸었는데, 내가 마치 공사(公事)로 인하여 비를 맞으면서 어디를 가는 듯하였다. 말을 타고 따르는 자가 두 사람이고 도보로 따르는 자가 또 4, 5인쯤 되었다. 어느 한 지경을 찾아 들어가니, 산천(山川)이 기이 하고 탁 트였으며, 길 옆의 한 언덕을 쳐다보니, 그곳에는 새 정자가 높직하게 서 있었는데, 지나는 길이라 올라가 구경할 겨를이 없었다. 곧장 막다른 협곡(峽谷)에 다다르니, 협곡 안에는 마치 불사(佛寺)와 같은 큰 집이 있고 그 곁에는 민가(民家)들이 죽 열지어 있었다. 인하여 그 큰 집에 들어가서는 마치 무슨 일을 한 듯 하나 잊어버려..

선부인규범(先夫人閨範)-백사 이항목 어머니

白沙先生別集卷之四>雜記 ■선부인규범(先夫人閨範)/백사 이항복의 어머니 백사 항복 술(白沙 恒福 述) 1556년(명종 11)∼1618년(광해군 10). 우리 집은 가법(家法)이 매우 엄격하였다. 선부인(先夫人)께서는 타고난 성품이 온화하고 유순하고 인자하였으나, 규범(閨範)에 이르러서는 엄숙하여 범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나는 어려서 고아(孤兒)가 되었기 때문에 그런 행실을 만분의 일도 다 기억할 수 없으므로, 직접 보아서 전할 만한 것만을 기록하는 바이다. 선부인(先夫人)께서는 자제들이 앞에 가득 있을 적에는 아무리 심한 더위일지라도 감히 옷자락을 걷거나 웃통을 벗지 않았다. 중형(仲兄)이 한 번은 몸이 피곤하여 관(冠)을 벗고 한쪽으로 기우듬히 기대고 있었다. 그런데 그곳은 부인의 좌석과는 매우 멀었..

백사(白沙) 이상국(李相國)의 사적(史蹟)

■ 백사(白沙) 이상국(李相國)의 사적(史蹟) 미수 허목 찬(眉叟 許穆 撰) 1595년(선조 28)∼1682년(숙종 8). 계곡(谿谷) 장유(張維)가 지은 백사 이 상국 행장에,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이 발각되어, 대신들이 매번 죄인을 심의하는데, 공이 추국 문사랑(推鞫問事郞)으로 있으면서 중간에서 잘 주선하여 목숨을 보전하게 된 사람이 매우 많았다.” 하고, 또, “마침 사화(士禍)가 일어났을 때, 정승 정철(鄭澈)이 사화의 우두머리였다.” 라고 하였다. 공이 기축옥사(己丑獄事)를 말한 《기축록(己丑錄)》을 지었는데, 강릉본(江陵本) 《백사집》에 실렸었다. 그런데 오늘날 그 책은 없어지고 고쳐 지은 《기축록》이 세상에 나돈다. 그 글이 많이 고쳐진 까닭은 무엇일까? 공은 장상(將相)으로 드나든 ..

태화공주(泰華公主)

■ 태화공주(泰華公主) 마한(馬韓)의 태조(太祖) 준(準)의 딸로 기씨(箕氏) 42세손(世孫)이다. 경주이씨(慶州李氏) 시조(始祖)인 신라의 6촌중 양산촌장인 급량부 대인 이알평의 배위(配位)이다. ◇기준(箕準) 기자(箕子) 조선(朝鮮)의 마지막 왕. 기부의 아들. 연(燕)나라에서 망명(亡命)하여 온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남쪽으로 가서 한왕(韓王)이라 일컫고 마한의 시조(始祖)가 되었다고 함. -------------------------------------------------------------------------------------------------------------------------------------- ■ 마한(馬韓) 마한(馬韓)은 삼국시대 초기 한반도 서남부에 ..

백사선생구제중수기(白沙先生舊第重修記).

■ 白沙先生舊第重修記 (백사선생구제중수기) 월성 이유원 경춘 저(月城李裕元景春著) 유원이 삼가 「백사선생연보」를 살펴보니 선생은 병진년 10월 15(1556, 명종 11)일에 한성부 서부 양생방 집의 서쪽에서 출생하셨다. 즉 숭례문 내 남록 아래의 자각봉의 제1 동학이다. 나라에서 창고를 설치한 후에는 창동이라 불렸던 곳이다. 옛날에 선생의 구택이 있었다. 선생은 대부인 최씨를 모시고 이곳에서 성장하셨다. 임진왜란 후에도 홀로 우뚝하게 솟아서 존재하였다. 봉사손인 효정공 경일에 이르기까지 7대가 서로 전한 땅이다. 선생이 회나무 2그루를 그 위에 심었고, 후인들이 작은 정자를 짓고 이로 인하여 명명하였다. 세대가 점점 내려와서 남에게 빌려주는 집으로 바뀐 지가 60년이 되었다. 세인들은 여전히 선생의 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