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세자료

기몽(記夢 : 꿈을기록하다)-이항복

야촌(1) 2010. 8. 18. 00:24

■기몽(記夢 : 꿈을기록하다)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

1556년(명종 11)∼1618년(광해군 10).

 

신축년(1601 선조 34) 정월 11일 밤에 꿈을 꾸었는데, 내가 마치 공사(公事)로 인하여 비를 맞으면서 어디를 가는 듯하였다. 말을 타고 따르는 자가 두 사람이고 도보로 따르는 자가 또 4, 5인쯤 되었다.

 

어느 한 지경을 찾아 들어가니, 산천(山川)이 기이 하고 탁 트였으며, 길 옆의 한 언덕을 쳐다보니, 그곳에는 새 정자가 높직하게 서 있었는데, 지나는 길이라 올라가 구경할 겨를이 없었다.


곧장 막다른 협곡(峽谷)에 다다르니, 협곡 안에는 마치 불사(佛寺)와 같은 큰 집이 있고 그 곁에는 민가(民家)들이 죽 열지어 있었다. 인하여 그 큰 집에 들어가서는 마치 무슨 일을 한 듯 하나 잊어버려서 기억하지 못하겠다.

 

여기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다시 아까 지나갔던 언덕에 이르니, 그 언덕 밑은 편평하게 탁 트인 광장(廣場)이 되었고 그 위에는 백사(白沙)가 죽 펼쳐져 있는데, 그 주위가 수천 보쯤 되어 보였다.

 

또 백위(百圍)쯤 되는 큰 나무 다섯 그루가 광장 가운데 늘어서 있는데, 일산(日傘)과 같은 소나무 가지가 은은하게 빛을 가렸다. 마침내 등성이를 타고 올라가서 비로소 새 정자에 올라가 보니, 정결하고 산뜻하여 자못 별천지와 같았다.

 

그 안에는 서실(書室)이 있는데, 가로로 난 복도(複道)에는 모두 새로 백악(白堊)을 발랐고 아직 단청(丹靑)은 입히지 않았다. 그 밖의 낭무(廊廡) 여러 칸은 아직 공사(工事)를 끝내지 못하여 다만 기둥을 세우고 기와만 이었을 뿐이었다.


인하여 형세를 두루 살펴보니, 사방의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싼 한가운데에 큰 들판이 펼쳐 있고, 세 개의 석봉(石峯)이 들 가운데 우뚝 일어나서 그 형세는 마치 나계(螺髻)와 같았다. 이것이 구불구불 남쪽으로 내려가서 중간에 꺾어졌다가 다시 뾰족하게 일어나서 언덕이 되었는데, 언덕의 높이는 겨우 두어 길쯤 되었고 정자는 바로 그 언덕 위에 있었다.


이 언덕의 오른쪽으로는 넓고 편평한 비옥한 들판에 수전(水田)이 크게 펼쳐 있어 향기로운 벼에 이삭이 패서 한창 바람에 흔들려 춤을 추는 푸른 벼가 백경(百頃)으로 헤아릴 만하였다. 정북향에 위치한 여러 산들은 한군데에 빽빽히 모여 뛰어오를 듯 허공에 솟아 있으며, 동학(洞壑)은 깊고 험하여 은은하게 산천의 무성한 기운이 있었다.


그리고 이 정자 앞에는 멀리 산봉우리가 열지어 서서 동천(洞天)을 둘로 만들었다. 이 두 동천에서 나오는 물은 마치 흰 규룡(虯龍)이 구불구불 굼틀거리며 가는 것과 같은데, 한 가닥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고 또 한 가닥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 두 가닥이 이 정자 밑에서 서로 합하여 돌아나가서 한 물줄기가 되었다.

 

이 물은 넓이가 수백 보쯤 되고 깊이는 사람의 어깨에 차는데, 깨끗한 모래가 밑바닥에 쫙 깔려 있어 맑기가 마치 능화경(菱花鏡)과도 같아서 오가는 물고기들이 마치 공중에서 노니는 것 같았다.

 

시냇가에는 흰 돌이 넓고 편평하게 깔려 있어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낚시터를 이루었고, 현(玄) 자의 형세로 흐르는 시냇물은 이정자의 삼면(三面)을 빙둘러 안고 돌아서 남쪽의 먼 들판으로 내려갔다.


나는 평생 구경한 것 가운데 일찍이 이러한 경계(境界)는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정자 주인이 누구냐고 물으니, 오음(梧陰)의 별서(別墅)라고 하였다. 이윽고 윤 수찬(尹修撰)이 나와 맞이하면서 말하기를,

 

“상공(相公)이 안에 계신다.”고 하였다. 나는 이때 문 밖에서 머뭇거리다가 우연히 “도원의 골 안에는 일천 이랑이 펼쳐 있고, 녹야의 정원에는 여덟 용이 깃들었도다[桃源洞裏開千畝 綠野庭中有八龍].”라는 시(詩) 한 구절을 얻었는데, 시를 미처 더 이어 짓지 못한 채 하품하고 기지개를 켜다가 꿈을 깨었다.

 

문창은 이미 훤해졌는데, 그 시원하던 기분은 아직도 가슴속에 남아 있고, 모발(毛髮)에는 서늘한 풍로(風露)의 기가 있었다. 마침내 일어나서 그 경치를 마음속으로 더듬어 찾아서 화공(畵工)을 시켜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이 시를 붙여 쓰려다가 갑자기 스스로 생각하기를, ‘도원(桃源)의 뛰어난 경치에다 천묘(千畝)의 부(富)를 얻고 녹야(綠野)의 한적함을 누리며 팔룡(八龍)의 복을 소유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지극한 소원이다.

 

다행히 내가 이런 기이한 꿈을 꾸었으니, 왜 굳이 오음(梧陰)에게 양여(讓與)하고 스스로 곁에서 구경이나 하는 냉객(冷客)이 된단 말인가. 그렇게 되면 푸줏간을 지나면서 고기 씹는 시늉이나 내는 데에 가깝지 않겠는가. 그러니 비밀에 붙여 남에게 말하지 않고 인하여 스스로 취하는 것이 낫겠다.’ 하고, 그 정자를 ‘필운별서(弼雲別墅)’라 고치고 절대로 윤씨(尹氏) 집 사람들에게 천기(天機)를 누설하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에 기록하다.


이달 27일 밤 꿈에 재차 이 별서에서 오음과 함께 평소와 같이 즐겁게 희학질하며 노닐었는데, 산천의 뛰어난 경치는 지난번의 꿈과 같았으나, 다만 정사(亭舍)의 체제(體制)가 조금 달랐을 뿐이었다. 하늘이 오음에게 내려준 곳을 내가 사사로이 훔칠 수 없으므로, 인하여 ‘오음별서(梧陰別墅)’로 복호(復號)시켰다. -오음의 성명은 윤두수(尹斗壽)이다. 

 

참고문헌]
◇백사집 >백사별집 제4권 >잡기(雜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