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세자료

백사(白沙) 이상국(李相國)의 사적(史蹟)

야촌(1) 2010. 8. 17. 02:18

■ 백사(白沙) 이상국(李相國)의 사적(史蹟)

 

미수 허목 찬(眉叟 許穆 撰)

1595년(선조 28)∼1682년(숙종 8).

 

계곡(谿谷) 장유(張維)가 지은 백사 이 상국 행장에,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이 발각되어, 대신들이 매번 죄인을 심의하는데, 공이 추국 문사랑(推鞫問事郞)으로 있으면서 중간에서 잘 주선하여 목숨을 보전하게 된 사람이 매우 많았다.” 하고, 또, “마침 사화(士禍)가 일어났을 때, 정승 정철(鄭澈)이 사화의 우두머리였다.”

라고 하였다.


공이 기축옥사(己丑獄事)를 말한 《기축록(己丑錄)》을 지었는데, 강릉본(江陵本) 《백사집》에 실렸었다. 그런데 오늘날 그 책은 없어지고 고쳐 지은 《기축록》이 세상에 나돈다. 그 글이 많이 고쳐진 까닭은 무엇일까?

 

공은 장상(將相)으로 드나든 것이 20여 년이었다. 임진왜란 때, 상(上)이 서쪽으로 파천하면서 유공 성룡(柳公 成龍)을 유도대장(留都大將)에 임명하여 서울에 머물게 하려 하는데, 공이, “대국에 구원을 꼭 요구하시겠다면 사명(詞命)을 맡을 자는 유공이 아니면 마땅한 사람이 없습니다.” 라고 아뢰니, 상이 그 말을 좇았다.

 

왜적이 대동강에 까지 다가와 진을 치매 상황이 다급해지자, 공은 상에게 영변(寧邊)으로 파천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때 이공 덕형(李公 德馨)이 ‘적장 현소(玄蘇)ㆍ조신(調信)을 만나 보아서 만일 진격을 정지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두 사람의 머리를 베어 오겠다.’고 자청하므로, 공이, “두 사람의 머리를 베는 것은 하찮은 일인데, 그 일로 우리가 먼저 의리를 저버리는 것은 좋은 계획이 못 되오.”라고 하였다.

 

공은 또 이공 덕형과 요동에 구원병을 청하러 서로 가겠다고 다투었다. 이때 공이 병조 판서로 본조의 군사 문제 때문에 갈 수가 없어서 상이 이공을 보내게 되었다. 공이 이공을 떠나 보내면서, “군사를 얻어 내지 못하거든 나를 중획(重獲)에서 찾으시오.”하니, 이공은, “군사를 얻어 내지 못한다면 내 뼈를 노룡령(盧龍嶺)에 버리겠소.” 하였다.

 

조승훈(祖承訓)이 요동 군사 3천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자, 공이 걱정하기를, “조승훈은 성격이 조급하고 꾀가 없어서 반드시 패전할 것이다.”하였는데, 평양 싸움에서 과연 패하였다. 또 이여송(李如松)이 4만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해 오니, 공이, “군사들의 행진은 규율이 있으나 좌우에서 보좌하는 자가 적격자가 아니므로, 공을 세우더라도 큰 계획을 무너뜨릴 자는 이들이다.” 하였다.

 

이여송이 평양에서 승리를 거두고 나서 고양(高陽)에서 실패하자, 왜구와 화친하자는 논의가 나왔는데, 과연 좌우에 있는 자가 주모했다고 한다. 선조 말년에 영신(侫臣)의 제의로 대원군(大院君)을 추존할 것을 논의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고대에 이를 시행한 이가 있었으니, 한 나라 애제(哀帝)ㆍ안제(安帝)ㆍ환제(桓帝)ㆍ영제(靈帝)입니다. 그리고 후대에 이를 나무란이가 있었으니, 주돈이(周敦頤)ㆍ장재(張載)ㆍ정호(程顥)ㆍ주희(朱熹)입니다.”

하고 하니, 의논이 정지되었다.

 

광해군(光海君) 때에 와서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하자는 논의가 일어나자 공은,

“내가 이제야 죽을 곳을 찾았다.”라고 의논드리기를,

“춘추(春秋)의 대의(大義)에도 아들이 어머니를 원수로 여기는 의리가 없습니다. 더구나 자사(子思)는 ‘급(伋)의 아내는 곧 백(白)의 어머니다’라는 말까지 하지 않았습니까?”하니, 광해군이 노하여 공을 북녘 변방으로 귀양 보냈는데, 그곳에서 세상을 마쳤다.


이 문충공(李文忠公) 이원익(李元翼)이 말하기를, “영창군(永昌君)이 죽을 때 공은 간언을 하지 않으며 ‘이보다 큰일이 있는데, 대신이 한 왕자를 위해 죽어서는 안 된다.’ 하고, 태비(太妃)를 폐위할 때에는 극력 간하다가 끝내 삭막한 북녘 땅에서 죽는구나. 참으로 훌륭하다. 말을 잘 실천하는 사람이라 이를 만하다.”하였다.

 

공은 성격이 활달해서 자질구레한 일에 얽매이지 않았고, 지절(志節)을 숭상하여 아무리 좋은 지위라도 선뜻 내놓을 수 있었으며, 얼굴도 역시 위인다웠다 한다.


상이 서쪽으로 파천하였을 때, 서애공(西厓公) 유성룡이 이미 국가 존망의 중책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고, 공은 공대로 상의 내부(內附)에 따라갈 것을 자청하였으니, 이 모두가 충신의 의리에서 나온 것이다. 임진왜란 때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은 이와 같은 신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

[주01]중획(重獲) : 부모 형제가 함께 죽어 주검이 겹겹이 쌓인 것을 말한다. 《춘추좌전(春秋左傳)》 선공(宣公)

           12년 조에 “모두 죽어 나무 밑에 있다.[皆重獲在木下]”에서 인용된 말이다.

 

[주02]급(伋)의---어머니다 : 급은 자사(子思)의 이름, 백(白)은 자사의 아들 이름이다. 자사는 아내와 이혼을 하였

           는데 전처가 죽었을 때, 자사는 “급의 아내라야 백의 어머니가 될 수 있지, 이미 급의 아내가 아니 라면 백의

           어머니가 아니다.” 하고 백에게 어머니의 복(服)을 못 입게 하였다. 《禮記 檀弓》


[주03]내부(內附)에---자청하였으니 : 내부는 임진왜란 때 선조가 중국 요동(遼東)에 들어가 붙어 있겠다는 뜻이

            다. 선조는 만약을 대비해서 요동에 따라갈 대신을 찾았으나 모두가 대답이 없었는데, 백사만이 이 일을

           자청하였다.《燃藜室記述 卷15 宣祖朝故事本末》

 

[참고문헌]

◇미수기언 >기언(記言) 제10권 원집(原集) 중편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