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세자료 168

남포현감 이경선 전망일록 후기 - 이유원

■ 藍浦縣監李公戰亡日錄後記 (남포현감이공전망일록후기) 月城李裕元景春 著 李慶善字君善。慶州人。宣廟名臣碧梧公副室子也。李玉山瑀妹子。吳楸灘允謙女婿。生于萬曆庚子。甲子司馬。癸酉登第。丙子以藍浦縣監。立慬於險川之役。某年月日。葬鎭川治東長尺里。公之節義本末。載筆之士。已著國乘。而公歿後二百三十四年。后孫鍾夔家塵篋中。得公當日戰亡日記。炳炳大義。一按可徵。怳若張目大見於矢石刀戟之間。嗟乎。公之死何其烈也。古之死難殉國者。有以投袂之日。爲必死之期。有以得其地死所守。有矢盡而拜死。有呼節而握斃。公則虜騎至。而奮然斷袂。守糧不離。釰絶乃已。革囊在傍。如公者雖劉沉,周處,張中丞,何無忌。不得專美於千載之上矣。嘗聞公遇難也。虜欲奪符信。斷其腕斫其指。指落復續。虜亦慴退。見一知印自林莾來授而指落。此日記之所不載。而其曰革囊故在。可以識別者。庶幾不誣矣。若其文章行誼。不少槪見。而竗年蜚英。連捷科..

표암 비각기(瓢巖碑閣記) - 橘山 李裕元 記.

■표암비각기(瓢巖碑閣記) 월성이유원경춘저(月城 李裕元 景春 著) 慶州邑治之東月城未五里。有山巖巖背石而特立者曰瓢巖。我李氏鼻祖諱謁平也。按三韓史乘。有神人降于瓢巖下。翊赫居世爲王。賜姓李氏。得壽二百歲。後姓蕃衍。羅麗以降。簪組蟬聯。遂爲大家。山非高而不敢不仰也。巖雖古而不敢不敬也。純祖丙寅。族祖相國敬一,宗丈尙書集斗兩公。伐石謀竪。起述事蹟。架椽簷以庇風雨。丙午。先君子文貞公巡到玆邑。拜舊址。重修碑閣。讌宗族。聞風會者甚衆。寔報本追遠之意也。噫。嶠南今之鄒魯也。山得正氣。磅礴淸淑。絃誦之聲。家家尙聞。而月城爲吾家鄕。奚特海南千里之謂也。先儒曰。子孫之多。雖至千萬人。而莫非一本也。原厥始而返諸本。則千萬年一日也。千萬人亦一身也。然則碑閣之奉。非玄元立廟之比。惟我諸宗。謹守焉。汛掃焉。其勿替之。 ◇嘉梧藁略 册十二 > 記 [국역] 경주읍(慶州邑) 동쪽으로 월성(月城)에서 5..

광화문 상량문(光化門上樑文)

■ 광화문 상량문(光化門上樑文) 월성 이유원 경춘 저(月城李裕元景春著) 伏以若作室肯堂。拊丕基而圖永。迺立門有伉。旋化樞而嚮明。于時也天閶上開。其方則帝車南指。顧玆法 복이약작실긍당。부비기이도영。내립문유항。선화추이향명。우시야천창상개。기방칙제차남지。고자법 宮聽政之所。粤自神京定都之初。背嵩面河。王業奠中黃之宅。軆國經野。宸居近上紫之垣。猗殿宇正位辨 궁청정지소。월자신경정도지초。배고면하。왕업전중황지택。체국경야。진거근상자지훤。기전우정위변 方。而楣扁顧名思義。禹勤堯思。敷盛德於春生秋成。羲泰箕康。迓景祿於日升月恒。寶扆御當陽之位。金 방。이미편고명사의。우근요사。부성덕어춘생추성。희태기강。어경록어일승월함。보의어당양지위。금 門闢正南之維。瑤躔候極宿之禪。昇平有象。璿籙兆亭午之運。文明出治。比若前代之承光宣光。四方之所 문벽정남지유。요전후극숙지선。승평유상。선록..

국당공후 제정공파의 항렬자 유례.

■국당공 후 제정공파의 항렬자 유례. (菊堂公 後 霽亭公派의 行列字 流例) 제정공파 세계를 보면 경주 이씨 항렬을 따르지 않고(음양 오행설) 돌림자에 설립(立) 변이 들어가 있는 항렬자를 사용했다. 36세 병(竝)→37세 종(鐘)→38세 호(頀)→39세 재(宰)→40세 직(職)→41세 장(璋)으로 쓰고 있다. 그 까닭을 제정공(霽亭公)의 신도비(神道碑)에 이렇게 적고 있다. 「1358년(공민왕 七)여름에 외직(外職)으로 동북면 병마사(東北面 兵馬使)가 되었고 장차 돌아올 때에 환조(桓祖 : 太祖의 아버지)가 삭방도(朔方道 : 지금의 강원도) 만호(萬戶)로써 함주(咸州)의 학선정(鶴仙亭)에서 전송하매 태조(太祖)가 후 측에 모시고 있었는데 술이 나와서 환조(桓祖)가 술을 돌린즉 공(公)이 서서 마시고 태조..

열헌공의 3자 10손

■ 경주이씨 중흥조 열헌공(悅軒公)의 3자(三子) 10손(九孫) 중시조인 소판공 이거명(蘇判公 李居明)의 15세인 열헌공 핵(悅軒公 翮)은 고려시대 문하평리(門下評理)를 지내셨으며, 아들 셋과 손자 열 모두가 당시대인 고려 때 크게 세상에 이름을 떨치게 되어. 모두 3자 10손이라고 극찬을 유례 한데서 연유합니다. ●열헌공(悅軒公) 핵(翮)은 세 아들을 두셨는데, 장자(長子)인 성암공 인정(誠菴公 仁挺)은 광주판관(廣州判官)을 거쳐 우정언(右正言)에 이르렀고, 차자(次子)인 동암공 진(東菴公 瑱)은 진사(進士)시와 문과시(文科試)에 장원급제하여 상의 도첨의사사 찬성사(商議都僉議司事 贊成事)를 거쳐, 검교첨의정승(檢校僉議政丞)에 이르렀으며, 시문으로 일세에 이름을 떨친 분이셨다. 삼남(三男)인 송암공 세기..

이항복(李恒福)과 포천

■ 이향복과 포천 글 .사진/김경식 바람 맵찬 겨울날 서울의 북쪽 포천으로 향하는 길에서 만난 나무들은 오히려 자신의 옷을 벗고 생존을 준비하고 있다. 봄날 피어났던 나뭇잎과 여름에 무성하던 숲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자식 같던 열매들과 이별한 나무들이 그 해쓱한 얼굴로 살랑거리며 겨울옷으로 무장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지 않은가. 계곡에서 들려오던 낭랑한 여울물 소리 들리지 않지만, 나뭇가지 우듬지 사이로 푸르른 하늘이 올려다 보인다. 한 겨울 나무들은 자신의 옷을 벗어 언 대지를 덮고 있다. 하늘과 햇살을 분배하면서 행복을 나누려는 겨울나무는 절망을 희망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향하는 생명나무이다. 이 땅을 살다가 떠나간 조상들 삶의 사연들이 눈발이 되어 흩뿌려 주길 기대하면서 길을 떠난다. 의정부를 지나..

경주이씨 강원도 관찰사 역임자

경주이씨 역대 강원도관찰사 역임자 No 성 명 대수 취임년도 생 몰 년 비 고 01 이윤인(李尹仁) 74代 세조11(1465년) 1415년(태조 15)~1471년(성종 2) 익재공파 02 이유인(李有仁) 94代 성종16(1485년) 1415(태종 15)∼1471(성종 2)/대사헌(大司憲) 이윤인의 제(弟) 03 이사균(李思鈞) 125代 중종09(1514년) 1471년(성종 2)~1536년(중종 31) 익재공파 04 이몽량(李夢亮) 163代 명종02(1547년) 1499년(연산군 5)~1564년(명종 19) 상서공파 05 이정형(李廷馨) 229代 선조33(1600년) 1549년(명종 4)~1607년(선조 40) 국당공파 06 이태좌(李台佐) 363代 숙종34(1708년) 1660년(현종 1)~1739년(영..

경주이씨 내력(慶州李氏來歷)

■ 경주이씨 내력(慶州李氏來歷) 신라사((新羅史)의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경주이씨 시조(始祖) 이알평(李謁平)은 기원전 117년인 한무제(漢武帝) 원수 6년 갑자년(甲子年)에 하늘로 부터 진한(辰韓) 땅 표암봉[瓢巖峰 : 지금의 경주시 산업로 4152-10(동천동 산16)]의 「박」 바위에 하강했다는 전설을 갖고 있다. 이후 신라(新羅) 제3대 유리왕(儒理王) 9년(西紀 32) 육부촌장(六部村長)에 각각(各各) 사성(賜姓)하였는데, 이때 첫째 알천(閼川) 양산촌장(楊山村長) 알평(謁平)에 이씨(李氏)를 사성(賜姓)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536년에는 신라 제23대 법흥왕(法興王)으로부터 문선공(文宣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고, 656년에는 신라 제29대 무열왕..

이정보(李廷輔)의 자(字) 맹주(孟周)에 대한 설

■ 20世 이정보(李廷輔)의 자(字) 맹주(孟周)에 대한 설 국당공 이천(菊堂公 李蒨)의 장증손(長曾孫) 계림(雞林=慶州) 이씨(李氏) 가운데 오재(五宰=시중·평장사·참지정사·정당문학·지문하성사)의 지위에 오르고 월성군(月城君 이천(李蒨)에 봉해진 분이 있는데, 정보(廷俌)는 바로 그의 장 증손(長曾孫)이다. 그가 현재 대신(臺臣)으로서 중한 명망을 지니고 있는데, 한산자(韓山子)에게 찾아와서 자(字)를 청하였다. 그때 한산자가 바야흐로 《운회(韻會)》를 검토하고 있다가 보(俌)를 찾아보니, 그 밑에 ‘보(輔)’라는 주(註)가 붙어 있기에, ‘주(周)나라 왕실의 보필’ 이라는 말을 취해서 그의 자를 맹주(孟周)라고 지어 주었다. 국가에서 인재를 쓰는 것은 수레에 보(輔 덧방나무)를 설치하는 것과 같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