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보재이상설선생.

이상설 정통령(正統領)

야촌(1) 2013. 2. 26. 18:46

상해 임시정부는 그 후 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사실상 해산상태에서 무려 20년 가량을 허송세월로 보냈다.

그렇게 유명무실하게 간판만 달고 있다가, 이봉창, 윤봉길 의사가 찾아와 찬란한 위업을 쌓아 준 것이니까 별로 칭찬할 것이 없는 조직이었다.

 

이봉창, 윤봉길 의사에게 수류탄을 구해 준 것이 공로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이봉창, 윤봉길 의사가 스스로 찾아와 스스로 죽음의 길로 간 장엄한 애국을 한 데에 비해 낯부끄럽기 짝이 없다.오죽하면 강제 징집된 학병에서 탈출하여 천신만고 끝에 찾아간 장준하가 회고록에 쓰길, 자기들은 다시 일본군에 투항하여 가미카제 특공대가 되어 임시정부를 공습해 폭파해 버리고 싶다고 격렬히 분노하는 글을 남겼겠는가?

 

그에 비해 블라디보스토크나 우스리스크에 있던 애국지사들은 매우 뜻 깊은 항일애국 활동을 전개하였다.

생각하면 안중근 의거나,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를 비롯한 거대한 항일전쟁 신화들은, 거의 모두 이상설을 정점으로한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인맥들이 주도한 것이었다.

 

이회영, 이상룡, 김동삼, 홍범도, 최재형, 최진동, 김좌진, 서일, 정재관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항일영웅들이 상해의 헛된 모습과는 달랐다. 그들은 조국을 되찾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이상설은 러시아 신한촌 인맥의 최고 정점에 있었다.

이상설은 해외망명 최초의 임시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 정통령으로 추앙을 받았는데, 헤이그 비밀 특사 의거가 실패로 끝난 뒤에 궐석재판으로 사형선고를 받아 귀국할 수 없어 그 곳에서 죽을 때까지 항일전쟁을 지도 지휘했다.

 

3.1운동 직후에 서울에서 천도교가 실질적 중심이 되어 임시정부를 세웠으니 세칭 한성정부라고 한다.

한성정부는 내면적으로 3.1운동을 기획하고 총지휘한 손병희가 정점에 있었는데, 손병희가 천도교에서 가진 지위가 대통령(大統領)이었다. 손병희는 당시 임시정부에서도 그렇고, 천도교에서도 대통령이었다. 천도교 교령 아래의 차상위 최고 지도자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들이 쓰고 있는 대통령을, 현대시대에 그 유래 및 뜻이나 제대로 알고서 쓰고 있는지 의아스럽다.

대통령은 결코 미국식 'president'로 직역되는 것이 아니다. 이상설의 정통령도 그 위에 임금님이 계심을 뜻한다. 따라서 임금님 밑의 차상위 최고지도자라는 뜻이다.

 

최고의 충신 이상설이 감히 임금님을 넘보는 자리를 탐할 분이 아니다. 위대한 애국자 이상설은 자기가 나라를 다시 찾지도 못하고 나랏님께 불충한 죄인이 되어 죽음을 맞는다고 생각하였다. 이상설은 그리하여 죽음을 맞아 모든 것을 깨끗이 태워버리고, 본인도 화장을 하게 유언을 남겼다.

 

조국광복을 못한 죄인으로, 부끄럽다며 묘지도 남기지 않았다. 나라를 잃고 나랏님을 잃은 불충의 인물이, 무엇을 남긴다는 생각이 추호라도 있다면 그것조차 불충이라고 생각한 최고 충신다운 마지막이었다.

 

매국노 역적질을 하고도 무덤 치장이 요란한 자가 적지 않은 나라에서, 최고 충신 독립운동가 이상설의 죽음은 이상설다웠다. 그래서 우스리스크에 이상설은 흔적도 없게 되었다. 그런데 많은 시간이 흘러서, 훗날 ‘이상설 유허비’가 수분하(綏芬河) 강변에 현대시대에 세워졌다.

 

이상설의 유골을 뿌리며 망명 최고지도자를 사실상의 국장으로 모셨던, 피눈물 통곡의 장소를 찾아가 세웠던 것이다. 시간이 흘러 흘러 오늘날의 현대인들 까지도 이상설의 위대함을 너무나 아쉬워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우리들은 항일전쟁사를 크게 오해하는 것이 많이 있다.

 

아무 것도 남기지 말라고 한 최고충신 이상설에 비해, 독재자로의 오명을 남길 만큼 장수하면서 수많은 자료를 남기고 국립묘지에 잠든 이승만이나, 오랫동안 백범일지 저서나 쓰고 있던 김구가 어떻게 감히 대비될 수 있을 것인가?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를 ‘president’로 번역해 갖고 다닌 이승만이나, 긴 세월에 걸쳐 주석(主席) 자리를 지키려고 했던 김구가 어떻게 비교될 것인가? 거대한 백두산과 동네 뒷산을 비교한다고 하면 말이 되겠는가? 차라리 비교한다는 말도 꺼내기 어렵다고 하겠다.

 

항일전쟁사는 현대시대에 있어서도 아직 연구가 진행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하겠다.

아직도 근현대 항일전쟁사는 초보적 단계에서 진행중이다. 항일전쟁사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다.

 

특히 러시아, 프랑스, 타이완의 자료는 별로 알려지지도 않았고, 너무나 황당하게도 침략전범국 일본 자료만 널리 편향되게 알려진 상태일 뿐이다. 그래서 큰 숲을 보지 못하고, 지엽말단만을 갖고 오해하며 오판하는 것이 널려 있다.

 

앞으로 항일전쟁사는 다시 새로 써야 할 것이다. 현재와는 전혀 다르게 써야 할 것이다. 이상설 정통령의 참된 평가가 제대로 되는 때는 언제일 것인가? 상해의 허상을 깨닫고, 우스리스크,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의 위대한 모습이 부각될 날이 언제일 것인가?

 

오늘날 최고의 항일애국 성지 우스리스크 국민의회 건물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국민도 별로 없다. 서울 시내 가장 중심부로서, 서울 경찰청 앞에 예전 강점 치하에서도 용감하게 항일에 나섰던 자랑스런 한성정부 옛터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도 거의 없다. ‘수분하’ 그 이름은 예전 발해 옛터를 흐르는 ‘슬픈 강’의 음차 호칭이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

 

황량한 수분하 강변에 세워진 이상설 정통령의 유허비는, 오늘도 슬프고 쓸쓸하기만 하다. 어즈버 진정한 항일전쟁사의 참모습은 그 언제 완성될 것인가? 수분하 강변에 서서 이상설 유허비를 참배하는 마음이 답답하고 서글프지 않다면, 결코 진정한 우리민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