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보재이상설선생.

이상설 선생이 편지를 쓰면서 흘린 눈물

야촌(1) 2013. 7. 2. 21:29

헤이그 밀사 파견 당시 비화 중,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밀사 일행들이 헤이그로 가기 전에 당시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이승만에게 협조를 요청했다는 것이다.

 

이상설은 헤이그로 떠나기 직전 영어에 능통한 통역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하고

당시 미국에서 명성을 떨치던 젊은 이승만에게

만국평화회의에 동행, 통역을 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이 요청을 거절했고,

결국 박용만이 뒤늦게 윤병구, 송헌주를 헤이그로 보냈다.

 

이후 이준을 헤이그 인근의 공원묘지에 묻은 뒤

이상설은 미국에서 이승만에게 재차 도움을 요청했다.

 

다음은 당시 이상설이 이승만에게 보낸 한문 편지다.(번역본)

 

'지난번에 만나서 할 말을 다 했기에 다시 되풀이할 필요는 없겠소이다.

큰 국면을 둘러보건대 오직 이 한 가지 방법뿐이외다.

 

형이 세상일에 뜻이 없으면 그만이거니와 있다면 속히 도모하시오.

시기를 정해서 알려 준다면 제가 페테르부르크에서 기다리면서 먼저 여비를 보내리다.

뜻은 길되 말이 짧아 눈물이 흐르오.

저는 지금 배편을 찾아보려고 하오.

편안하시기 빌며 답장 기다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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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얼마나 기회주의적 인간이었는지는 짧게나마 이 편지로 알 수 있을 것 같다.

국내에 있을 때, 보안회(保安會)의 후신으로 결성된 대한협동회(大韓協動會)에서 회장은 이상설선생이고,  다섯 살 아래인 이승만은 총무를 맡고 있었다.

 

1917년 이상설이 일찍 세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임시정부의 수반은 당연히 이상설이 맡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우리의 독립운동사가 훨씬 달라졌을 것이다.

아쉬울 뿐이다......

 

‘형(이승만)이 세상일에 뜻이 없으면 그만이거니와 있다면 속히 도모하시오.

~~~뜻은 길되 말이 짧아 눈물이 흐르오’

 

이상설이 이 편지를 쓰면서 흘린 눈물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오늘날 이승만을 추종하는 세력들에게 이 편지 내용을 전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