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투쟁의 원로 이상설선생.
글(1972. 01) : 광복회 회원 이용화
이상설(李相卨, 1870(고종 7)∼1917)선생은 당시 블라디보스톡에 있던 우리나라 독립기관의 최고 지도자였으므로 북경. 상해. 북간도. 미주등지에서 활동하던 애국지사들이 이곳으로 오면 으례 선생을 찾고, 국권회복을 위해 서로 흉금을 터놓고 의논하였다.
네델란드의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특사로 참석하려던 밀사의 사명이 싪패로 끝나자, 이상설선생은 일제의 침략상과 한국의 비참한 실정을 호소하고 국권(國權)을 회복하기 위해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때 이상설선생은 여러 나라에서 뜨거운 후대를 받았는데, 루우즈벨트 미국대통령은 사견례(私見禮)로써 면접을 하락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재미 한교(在美韓僑)들은 이상설선생에게 자기들이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여 보내 줄테니 극동(極東)으로 가서 투쟁하라고 권유하였다는 것이다. 국권회복을 위해 미국, 프랑스, 독일, 영국 등을 역방한 이상설선생은 1909년에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스부르커를 거쳐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왔다.
이때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에 능숙하고 박학다식(博學多識)한 선생의 인품에 감동한 러시아 극동군 사령관인 보스타빈 총독이 이상설선생을 극동군 고문관으로 추대하고, 매달 생활비를 지불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설선생은 구덕상(具德相)을 브라디보스톡 주재 러시아 군대 통역관으로 천거하고, 윤일병(尹逸炳)을 하바로프스크 총독 소재지 군대의 통역관으로 천거하여 활동케 했다.
이 무렵 재미 한교들이 독립활동 자금을 모금하여 보내왔다. 이상설선생은 그 돈으로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지대인 밀산현(密山懸)에 땅을 매입하여 독립군의 양성을 위해 조선인 부럭을 만들고, 우리 동포 30여가구 1백여명을 정착시켰다.
이곳에서 이상설선생은 이승만(李承晩). 박용민(朴容萬). 정순만(鄭淳萬)등의 독립지사들을 만나 우리나라의 독립 방책을 강구했다. 내가 25세 때인 1910년의 어느날 원산(元山)에 있는 나를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동생인 안정근(安定根)이 찾아와 커다란 상자 2개를 주며, 며칠 후 리 상자를 찾으러 오는 사람이 있을테니 주라고 하며, 맡기고 가버렸다.
그 후 며칠이 지나도 찾으러 오는 사람이 없어 내가 그 상자를 열어 그 안에는 우리나라 각 지방 읍. 면의 동포들에게 의병 봉기를 촉구하는 의병 통문이 가득 들어있었다.
이 의병 통문은 당시 국내에서는 볼수없는 최고급의 서양지를 사용하여 블라디보스톡에서 인쇄한 것이었는데, 나는 일경(日警)에게 발각될까 우려하여 프랑스인 신부와 1주일간 매일밤 불에 태워 재를 땅에 묻어 없애버렸다.
의병 통문을 태워 없애버린 후 나는 안정근(安定根)을 찾아 블라디보스톡으로 갔으며, 이해 10월 초순에 이곳에서 이상설(李相卨)선생을 처음으로 뵈옵게 되었다. 당시 러시아는 동양(東洋)을 침탈(侵奪) 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동양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관비(官費)로 일어, 중국어, 인도어, 몽고어 등을 가르쳐 매년 여름 방학이면 정세 정탐(偵探)차 학생들을 여러나라에 파견 시켰다.
나는 이 동양대학 사무원으로 10여 년간 근무하며, 각국에서 배달되어 오는 신문, 잡지등을 접수하여 홋수를 매겨 정리하는 일을 하였다. 매일 오후 4시에 도서관 일이 끝나면, 나는 곧 바로 우체국에 들러 편지, 신문, 잡지 등을 거두어 이상설(李相卨) 선생이나 신한촌(新韓村)에 사는 우리 교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을 되풀이 했다.
나는 이때, 이상설선생을 7년 동안 가까이 모시며, 선생의 통신사무를 전담 하다시피 했던 것이다. 한일 합방 후, 4. 5년이 지나 일본의 총리대신 카쓰라(柱太郞)가 러시아에 갈때의 일이다. 카쓰라를 암살하기 위해 이규풍[李奎豊, 1865(고종 2) 충남 아산생~1932.]이 러시아로 갔으나 만나지 못해 실패했고, 이때 러시아군은 예비 검속으로 이상설선생을 감금(監禁) 했다.
그 후 러시아 군사령관이 감방으로 이상설선생을 찾아와서 술잔을 권하며, “정부의 명령이므로 하는수 없이 선생을 감금하였으나 조금만 참으십시요 그가 이곳을 지나가고 나면 즉시 석방해 드리겠습니다”하고 예우를 갖추어 정중히 사과 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온 남부 사람들은 대부분 학식이 있었으므로 이상설선생이 이들 가운데서 2. 30명을 각 지방 국민학교의 교사로 천거하였는데, 이들은 토요일이면 블라디보스톡으로 와서 선생을 찾았다. 이상설(李相卨) 선생은 이들을 만나 담소하고 숙식을 제공한 다음, 일요일 오후에 돌려보내곤 했다.
나도 이상설선생 한테, 가는 편지나 신문이 있으면 종종 선생을 찾아뵙고, 저녁 식사를 대접 받고 밤새도록 얘기를 나누다가 자고 오기도 했다. 선생은 이들과 함경도에서 건너온 북부 사람들을 융화시켜 독립활동을 전개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함경도에서 노령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온 북부사람들은 우리나라 남부에서 건너온 남도인들과 상종(相從)하기를 꺼려하고 자기들끼리만 협조하는 등, 지방색(地方色)이 강해 동족간에 종종 알력을 빚었는데, 이상설선생은 이들을 단합시켜 노령(露領)에서 국권회복운동(國權恢復運動)을 전개하고자 꽤했던 것이다.
이상설선생은 동족간의 융화를 다지기 위한 방책으로 중매를 서서 남부 출신의 남자와 함경도 출신의 여자를 혼인 시키기 까지 했다. 그러나 이살설선생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도인에 대한 함경도인의 적대감은 해소되지 않았으며, 선생은 조국을 잃고 이역으로 흘러온 동족들이 서로 다투눈 것을 보고, 울분을 억누르지 못해 워트카(vodka)를 마시고 취하면 한인촌을 한바퀴 돌며, 스스로의 심사(心思)를 달래곤 했다.
이상설선생은 당시 블라디보스톡에 있던 우리나라 독립기관의 최고 지도자였으므로 북경. 상해. 북간도나. 미주(美洲) 등지에서 활동하던 애국지사들이 이곳으로 오면, 으례 선생을 찾고 국권회복을 위해 서로 흉금을 터놓고 의논하였다.
이때 이상설선생이 만나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한 애국지사 가운데는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1880(고종 17)∼1936], 백암 박은식[白巖 朴殷植, 1859(철종 10)∼1925], 이회영[李會榮,1867(고종 4)∼1932], 이시영[李始榮,1869(고종 6)∼1953]및 《권업신문(勸業新聞)》의 주필을 지낸 조성환[曺成煥, 1875(고종 12)∼1948]선생 등이 있다.
이상설(李相卨) 선생은 1911년 11월에 교포들의 산업권장과 교육 보급을 목적으로 러시아 극동 총독 「보스타빈」과 교섭하여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고 신채호(申采浩). 김하구[金河球, 1880∼? 일제강점기의 사회주의운동가, 함경북도 명천 출신] 선생을 주필로 삼아 기관지인 《권업신문(勸業新聞)》을 발행하여 산업발전과 교포들을 계몽하여 구국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그러나 이 권업회에서도 이상설선생은 막후 조정을 하였지,직접 표면에 나서서 활동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제1차 세계대전(1914. 07. 28 ~ 1918. 11. 11)이 발발하고 일본군이 블라디보스토크 까지 진출하여 독립운동을 탄압하고, 러시아 관헌에게 이상설선생의 신병을 인도하여 달라고 요구하는 등. 신변이 위태로와 지자 러시아인은 선생을 하바로프스크로 모셔갔다.
이곳으로 옮아온 후 이상설선생은 모든 계획이 뜻대로 되지 않으므로 침식을 잊고, 상심 하였으며 워트카(vodka)를 더욱더 많이 마시게 되었다. 이때 이상설선생은 장도순(張道淳),이 경영하는 한약국에 자주 드나들며 세계대세를 논하고 가슴속의 울분을 토로 하였다.
원래 건강한 체질이 되지 못하는 이상설선생은 마침내 토형하기 시작하셨다. 선생의 동지들이 권하여 하바로프스크보다 기후가 온화한 니콜리스크로 옮겨 이민복(李敏馥)의 집에서 정양(靜養)하였으나, 아무런 보람도 없이 끝내 회춘하지 못하고 1917년 3월 2일에 운명하고 말았다.
운명하기 직전에 이상설선생은 이동녕(李東寧), 백순(白純)등 임종을 지킨 동지들에게 자기의 후계자로는 은계 백순[隱溪 白純, 1864(고종 1)∼1937. 대종교인.충남 공주 출신. 일제하에 대종교(大倧敎)를 이끈 최고원로 중의 한 사람이다]선생을 삼으러고 말하고, 서로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고 유언했다.
그리고 가족에게는 “내가 죽은 뒤에 상복을 입지말고 3년상도 싫으니 하지 말라.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아무 한일도 없이 가니 내가 죽은 뒤에 화장하여 그 가루를 바다에 뿌리고, 재도 남기지 말라. 그리고 조국이 광복되기 전에는 제사도 지내지 말라” 하고 유언했다.
이상설선생의 유해는 그의 유언대로 화장해서 아무르강 상류에 뿌려젔다. 이상설선생이 별세한뒤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우리나라 독립기관의 지도자로는 선생의 유언대로 백순(白純)선생이 추대되어 활동했다.
[참고문헌]
*나라사랑 제20집(1975. 09. 23 발행) : 보재이상선생 특집호
*편집겸 발행인 : 백낙준(白樂濬/연대 초대총장, 문교부장관)
*발행 : 외솔회
옮긴이 : 野村 李在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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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인물소개]
●이용화(李容華)
◇구분 : 독립운동가|국가유공자
◇성별 : 남(男)
◇생졸년 : 1890년 9월 9일(고종 27) ~1980년 9월 24일 하오 8시 46분 서울시 동작구 동작동 반포아파트 79동
302호자택서 노환으로 별세, 향년 90세. 발인은 26일 상오10시 장지는 김포(金浦) 장승묘지, 유족
으로는 장남 이홍근씨와 딸이 있다.
◇독립운동사건 : 공명단사건
◇경력 : 건국포장|애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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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고종 27) ~1980년. 일명 중실(仲實). 호는 백원(白園). 1910년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재미 한국인들이 발간하는 『국민보』· 『신한일보(新韓日報)』· 『한민보』 등의 총지국을 경영하면서, 각 지역 동포들의 통신연락업무를 맡아 활약하였다.
1912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갑(李甲) 등과 함께 항일운동 및 교민들의 경제적 지위향상을 목적으로 하는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였다. 1919년에는 여준(呂準)과 함께 독립군자금모금활동을 하였다.
1920년에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위촉으로 체코군으로부터 다수의 무기를 구입하여 서일(徐一)에게 전달하였으며, 1923년에는 북중국에서 신덕영(申德永) 등과 함께 독립군자금모금활동을 하였다.
1927년 중국 산서성 타이위안(山西省太原)에서 안창남(安昌男)·최양옥(崔養玉)·김정련(金正連)·신덕영 등과 함께 독립군 비행사를 양성하기 위한 비행학교설립을 계획하고, 흑룡강성에 토지 300만평을 구입하기로 하였다.
이에 자금모집차 1929년에 동지 최양옥·김정련·이선구(李善九) 등이 국내에 잠입, 서울교외 망우리에서 일본우편자동차를 비롯하여 지나가는 차량들을 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는 공명단사건(共鳴團事件)이라 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大韓民國獨立有功人物錄)』(국가보훈처, 1997)
『독립운동사』 7(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5)
『한국독립사(韓國獨立史)』(김승학, 독립문화사, 1965)
『무장독립운동비사(武裝獨立運動?史)』(채근식, 대한민국공보처,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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