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보재이상설선생.

이상설의 한역육법전서 초고

야촌(1) 2013. 10. 28. 15:32

법률신문       2012. 02. 06

[고미술이야기] (10) 한역육법전서 초고

기고 : 김영복 KBS 진품 명품 감정위원

 

2000년쯤으로 기억되는 때에, 경주이씨종친회에서 사무를 보던 이 선생이 찾아 오셨다. 통문관 때부터 책을 수집하던 분으로 집안 관련 책이나 문서, 선조(先祖) 간찰을 그동안 꽤 많이 가지고 있었다. 

 

두 종의 책을 내놓으시는데 한 권은 이순신장군 관련이고 한 첩은 지금 소개하려는 보재 이상설(溥齋 李相卨;1870~1917)이 일본글로 된 국제관계에 관한 법령을 한문(漢文)으로 번역한 초고였다. 

 

↑보재 이상설이 국제관계 법령을 한문으로 번역한 친필 초고.

 

일본책이 어떤 책인지는 모르지만 그 책의 제10장 간섭(干涉)과 제11장 국제쟁의조화방법(國際爭議調和方法) 두 장(章)만 번역한 12쪽에 불과한 얇은 서첩이다. 글씨는 매우 날렵하면서도 날카로워 함부로 범접하기가 어려운 느낌이 들었다.

 

맨 뒷장에는 1937년에 쓴 야원 박철희(也園 朴喆熙;1877-?)의 발문이 붙어 있다. 이 발문과 이회영약전(李會榮略傳; 李丁奎, 李觀稙 공저)을 보면, 1904년과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기 전 친우인 우당 이회영(友堂 李會榮; 1867~1932), 시당 여준(時堂 呂準; 1862~1932) 등 뜻있는 젊은 지식인들이 늦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당시의 어려운 상황을 타개할 목적으로, 이상설의 서재를 연구실 겸 회의실로 사용하여 신구(新舊)의 많은 서적을 모아 놓고 정치, 경제, 법률 등의 여러 문제를 토론하고 읽고 연구하였다.

 

이 초고는 바로 이 때 국제관계에 대한 법령을 강론하고, 아울러 일본어를 모르는 이를 위해 한문으로 번역한 것임을 알았다. 박철희는 어사 박문수의 혈손으로 보재 집안과는 대대로 세교가 있는 것은 알았지만, 보재와도 이렇게 가까운 사이인 줄은 처음 알았다.

 

두 책 모두 양도를 받아 지금은 내 서재에 비치해 두고 가끔 꺼내어 읽어보며 보재선생을 또 다시 생각해 본다. 보재선생은 1894년 조선시대 마지막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구한말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 소신있는 관리생활을 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폐기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고 자결을 시도하다 실패하고,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였다.

 

그 이후에는 돌아가실 때까지 해외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하신 후 42살의 나이로 외롭게 객지에서 세상을 떠나셨다. 알 만한 사람도 헤이그사건을 통해 이준 열사와 함께 겨우 선생의 이름을 떠올릴 뿐이니 마음이 서글플 뿐이다.

 

국내에 계실 때 국제정세를 알려면 국제법을 알아야 한다고 애써 번역하신 초고가 책으로 출간되지도 못한 채 선생은 해외에서 무주고혼이 되고, 초고는 이렇게 몇 장만 남아 선생의 못다 이룬 독립의 한이 되어 내 책상 앞에 있다. 

 

선생 친구 중에 앞장서서 독립을 위해 싸우지는 못했어도 국내에서 술이나 글로 마음을 달래며 음(陰)으로 독립자금을 거둬 드린 분들이 의외로 많은데, 야원 박철희를 비롯하여 치재 이범세(恥齋 李範世; 1874~1940), 송거 이희종(松居 李喜鍾; 1876-1941)이 그 중의 한 분이다.

 

 

이범세의 “치재유고초(恥齋遺稿抄)”에 <書溥齋手筆漢譯日文六法全書後,代朴也園>란 글이 실여 있다. ‘보재가 친히 일문을 한문으로 번역한 육법전서 뒤에 쓴다. 야원 박철희를 대신하여 짓다’라는 글이 바로 이 첩에 실려 있는 박철희의 발문과 동일한 내용이다. 

 

이로 보아 박철희의 부탁으로 지어준 글인 줄 알겠다. 이 초고는 일본책 육법전서의 한 부분이라 했지만, 내용으로 보아 국제관련 법령집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