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보재이상설선생.

보재 이상설선생 약력

야촌(1) 2013. 9. 23. 01:54

보재 이상설선생 약력

 

[해설]

이 글은 1975년 5월 31일 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에서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남산골에 이상설선생의 숭모사(崇慕祠)인 숭렬사(崇烈祠)를 세울 때 지은 보재 이상설의 약력이다. 이곳의 숭렬사는 1996년 8월 3일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산직마을의 선생의 생가 경내로 이전 중건하고 주변을 정화하였다,

 

이상설(李相卨)선생은 제국주의 열강이 한반도를 에워쌌던 1870년(고종 7년) 음력 12월 7일 충청북도 잔천군 덕산면 산척리 산직(忠淸北道 鎭川郡 德山面 山尺里 山直) 마을에서 선비 이행우(李行雨)와 벽진이씨(碧珍李氏)의 장남으로 탄생 하시었다.

 

선생의 자(字)는 순오(舜五). 호(號)는 보재(溥齋). 본관은 경주(慶州)이시고 고려 말의 명유(名儒)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21대손이시며, 어려서 이조참의(吏曹參議-正三品)를 지내시던 이용우(李龍雨)에게 출계(出系)하여 학문에 전심 하시었다.

 

선생은 25세가 되던 해인 1894년(고종 31)에 갑오문과(甲午文科)에 급제(及第)하시고, 이미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을 조술(祖述=본받아 서술함)할 큰 학자(學者)로 칭송 될이만큼 학문이 숙성 하시었다.

 

그 후 관계(官界)에 나가시어 한림학사(翰林學士=한림원의 正四品 벼슬). 승지(承旨-正三品으로 왕의 비서직) 등을 거쳐 27세에는 성균관 관장(成均館館長-유학 교육 관청의 수장으로서 正三品의 관직)에 오르시었다.

 

관직(官職)이 누진(累進-직급이 늘어남)하여 궁내부특진관(國內府 特進官-경연(經筵)에 참여하여 임금의 고문에 응하던 관원으로 從二品벼슬). 법부(法部)와 학부(學部)의 협판(協辦-조선말 각부의 대신 다음의 벼슬로 오늘날 차관급) 등을 두루 거쳐, 36세가 되던 해인 1905년(고종 42)에는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최고 중앙행정기구의 正二品벼슬로 오늘날 부총리이다)에 발탁 되시었다.

 

그러나 선생은 이해 말, 소위 을사늑약(乙巳勒約) 이라는 나라와 민족의 비운을 맞이하여 순국(殉國)의 결의로 그 조약 파기에 진력(盡力-있는 힘을 다하다) 하시었지만,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5차에 걸친 사직소(辭職疏)를 올리어 관직(官職)을 벗고, 저 유명한 해아 사행(海牙使行)을 비롯한 국권 수호와 그를 이은 민족 독립운동에 온 생애를 바치어 우리나라 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에 새 장을 기록 하시었다.

 

선생은 구학문을 수학한 왕조관인(王朝官人)이시지만 누구보다 앞장서 근대 사상(近代思想)과 학문(學文)을 받아들여 구미(歐美-유럽과 미국을 아울러 이르는 말)의 정치(政治). 경제(經濟). 문화(文化)를 성취 하시었고, 영(英). 불(佛). 노(露). 알어(日語)를 구사 하실수 있으시었다.

 

더우기 선생은 국제 정치와 세계 대세를 인식하시어 국가와 민족의 진로를 밝힐 수 있는 당대의 동량(棟樑-나라를 떠받들어 이끌어 갈 젊은이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으로 추앙(推仰)되시었고, 또한 선생은 스스로 앞장서 그를 구현하기 위하여 형극(荊棘)에 찬 민족 독립운동을 전개 하시었다.

 

선생의 그 같은 활동 중 두드러진것 만을 들면,

첫째 1907년 6월에 네덜란드 헤이그(海牙)에서 개최된 만국 평화회의에 이준(李儁). 이위종(李瑋鍾)을 대동하시고 참석하시어 한국의 주권 수호(主權守護)를 위한 국제 외교를 시도 하시었다.

 

대한제국(大韓帝國=1897년에 정한 우리나라의 국호) 최후의 외교인 이 비밀 사행에서 온갖 고초 끝에 회의장에 당도 하시었으나, 국력의 뒷받침이 없고, 제국주의(帝國主義=군사적, 경제적으로 남의 나라 또는 후진 민족을 정복하여 큰 나라를 건설하려고 하는 침략주의적 경향) 열강의 이권협상(利權協商)의 성격을 지닌 동 회의에서 소기의 목적은 달성치 못하시었다.

 

그러나 그분으로서는 일제에 짓밟히는 한국의 실정을 국제 공의(公議)에 제기 시키고자 최선을 다 하시었고, 또한 그 길로 윤병구(尹炳求). 이위종(李瑋鍾). 송헌주(宋憲澍) 등을 대동하시고, 영국(英). 불(佛). 독(獨). 미(美). 노(露). 제국을 직접 순방 하시면서 한민족의 독립이 동양평화(東洋平和)의 관건(關鍵)임을 주장하고 나아가 한국의 영세 중립을 역설하시었다.

 

1909년 봄까지의 이와 같은 선생의 폭넓은 국제적 활동이 민족 수난에 접어든 한국민족의 독립문제를 비로소 국제 정치에 제기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핳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1909년 여름 노령(露領=러시아의 영토) 시베리아 블라디보스톡에 먕명지를 정한 선생은 그 후 시베리아와 중국령 서 북간도(西北間島=두만강과 마주한 간도 지방의 동부). 멀리 하와이와 미주 본토에 교우(僑寓=타향에 임시로 머물러 삶)하는 모든 해외 한민족을 조직하여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의 터전을 잡고, 1914년에는 연해주(沿海州=러시아 연방 시베리아 동해의 연안에 있는 지방)에 국권 상실 후 최초의 망명정부(亡命政府)의 이름을 전할 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를 세워 그 정통령(正統領)에 추대되어 국내의 민족운동을 총령하시었다.

 

이 동안에도 선생은 성명회(聲明會). 13도의군(十三道義軍). 권업회(勸業會) 등을 조직 지도하여 일제와의 일관된 항일운동을 계속하시었다. 그 중 성명회(聲明會)에서는 일제의 소위 한일 합병조약 반대운동을 전개하고, 미국. 러시아 등 열강에 대하여 일제의 침략 규탄과 한민족 독립의 정당성을 밝히는 선언서(宣言書=어떤 일을 널리 펴서 공표하는 글)를 보내기도 하시었다.

 

선생은 8,624명에 달하는 민족운동자의 서명이 붙은 이 선언서에서

“우리는 세계속에서 ‘대한국(大韓國’ 의 이름을 간직하고 한국민은 ‘대한국민인(大韓國民人’ 이란 지위를 결코 잃지 않을 것을 결정한 것이다. 우리의 과업이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광복과 국권의 회복에 기필코 도달할때 까지 손에 무기를 들고 일본과 투쟁하기로 한 것이다.

 

장차 어떻한 일이 일어 나더라도 진정한 한국 국민은 자신의 자유와 국가의 광복을 획득하기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있다”고 조국의 독립의지를 표명하시었다.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는 수립된 후 곧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 틈에 일제와 제휴한 노제(露帝=러시아제국)와 연합군의 일원으로 등장하는 일제의 탄압으로 표면적 활동 기록을 남기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경륜과 정신은 이동년(李東寧). 이회영(李會榮). 이시영(李始榮). 이동휘(李東輝). 조성환(曺成煥) 등 기라성 같이 많은 선생의 동지들에게 계승되어 1919년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건립되어 활동하게 되었고, 한편 서.북간도와 연해주에서는 독립군이 항일전을 수행하게 되었다고 할 것이다.

 

세째는 1906년 8월 헤이그에 가시는 도중에 북상한 한민족이 개척한 북간도(北間島=간도 지방의 동부로 두만강과 마주한 지역) 용정(龍井) 땅에 근대적 항일민족 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건립하여 1백여만의 한민족이 사는 북간도를 비롯한 남. 북만주와 시베리아 지방에 민족주의 교육을 펴시고, 나아가 조국 광복운동의 기지화의 계기를 마련하시었다.

 

서전서숙은 그 다음해인 1907년 헤이그로 사행(使行)하는 이유에서 선생의 동지인 여준(呂準) 등에 맡겨서 잠시 더 운영되었으나 곧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폐숙(廢塾) 하였다. 그러나 그 설립의 목적과 이념은 가까이는 명동학교(明東學校)와 신흥학교(新興學校)로 이어지고, 멀리는 국내의 각 지방마다 한민족의 터전에는 어디에나 이와 같은 민족주의 교육이 확대되어 수많은 민족운동의 역군이 배출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상설(李相卨)선생은 조국 광복을 못 보시고 1917년 3월 2일 연해주(沿海州) 니콜리스크(雙城子)에서 48세의 한창 나이로 천추의 한을 품으신 채 순국하시었다. 젊어서도 병약하여 몇 차례 요양하시었던 그분은 10여년 동안 해외에서 자기 몸을 돌보시지 않으시고 오로지 조국 광복에 심신을 다 바치신 까닭에 1916년 부터는 피를 토하는 중병으로 병석에 누우시었다.

 

그리고 1년을 두고 투병 하시었으나 아무 효험이 없어 임종이 가까와지자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孤魂=문상할 사람이 없는 외로운 넋)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불태우고, 그 재마저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서릿발 같은 유언을 남기시었다.

 

1975년 5월 31일 숭렬사준공식전(崇烈祠竣工式典)

윤병석(尹炳奭)

 

옮긴이>野村 李在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