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보재이상설선생.

勸業會 ㅣ 大韓光復軍政府

야촌(1) 2014. 7. 2. 11:17

권업회(勸業會)

 

권업회 [勸業會] ...1911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조직된 항일독립운동 단체.

 

이종호(李鍾浩)·김익용(金翼鎔)·엄인섭(嚴仁燮) 등이 결성하고 초대회장에 최재형(崔才亨), 부회장에 홍범도(洪範圖)를 선임하였다. 본부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 두었으며, 주요 도시에 지회와 분사무소를 두었다.

 

같은 해 12月 총회에서 회칙을 개정하여 조직을 의사부와 집행부로 나누고, 의사부의 의장과 부의장이 회를 대표하기로 하였다. 이에 의장에 이상설(李相卨), 부의장에 이종호가 선임되어 회무를 총괄하였다.

 

권업회라는 이름만 보면 정치적인 색을 띠지 않는 순수 경제단체인 것처럼 보이나 이것은 일제와 러시아의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붙인 위장명칭이고 실제는 항일구국운동이 목적이었다. 회원은 21세 이상이면 남녀·신앙·교육의 차별 없이 될 수 있었으나 3人 이상의 보증서가 있어야 가입시켰다.

 

그들은 효과적으로 활동하기 위하여 기관지 《권업신문》을 창간하였으며, 이를 통해 민족정신을 고양시켜나갔다. 또한 항일독립운동 전개, 교민의 단결과 지위 향상에 애썼으며, 각종 기념일에 행사와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회원은 1913年 10月 2,600명, 1914年 8,579명이었다. 그러나 1914年 러시아는 대일관계의 악화를 우려한 나머지 강제로 해산하였다. 그 후 이 전통은 1917年 창설된 전로한족중앙회(全露韓族中央會)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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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光復軍政府

 

대한광복군정부 [大韓光復軍政府] ...1914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권업회(勸業會)를 이끈 이상설(李相卨)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망명정부. 1911年 항일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조직된 권업회는 이상설을 초대 의장으로 추대하고, 광복군 사관을 양성하기 위하여 1913年 사관학교 대전학교(大甸學校)를 설립·운영하였다.

 

또한, 러시아의 극동지역 총독과 교섭하여 광복군이 사용할 군영지를 조차하고, 광복군 병사의 양성을 위하여 양군호(養軍號)와 해도호(海島號)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그 결과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시베리아 전역에서 훈련받은 무장 병력 약 3萬 명을 확보하게 되었다.

 

권업회의 이상설·이동휘(李東輝)·이종호(李鍾浩)·정재관(鄭在寬) 등은 시베리아와 만주 및 미주 지역에 흩어져 있는 무장 독립운동단체를 모아 효과적인 독립전쟁을 전개하기 위한 조직을 갖추기로 하였다. 이들은 러일전쟁 10週年을 맞아 러시아에서 반일 감정이 한창 고조되어 있었고, 또한 한국인의 시베리아 이민 50週年이 되는 때에 맞추어 1914年 대한광복군 정부를 수립하고 대통령에 이상설, 부통령에 이동휘를 선출하였다.

 

대한광복군정부 산하에 편성된 광복군의 규모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일본군경에 압수당한 독립운동 관계문서에 따르면, 1914年 당시 이상설 주관하에 있던 3萬 명의 시베리아 병력을 제외하고도 만주에서 수만 명, 미국에서 855명의 한인이 훈련받고 있었다고 한다. 광복군 정부는 이들을 중심으로 국외의 모든 독립운동을 주도하면서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1914年 8月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러시아 정부는 일본과 공동방위체제를 갖추고 한국인의 정치·사회활동을 금지하여 그 여파가 모든 한국인 단체에 미치게 되었다. 이어 같은 해 9月 대한광복군정부의 건립 모체가 된 권업회가 해산당하자 대한광복군정부도 크게 타격받고 더 이상 활동을 지속할 수 없어 해체 되었다.

 

●이상설(李相卨, 1870.12.7~1917.3.2) ...독립운동가.

 

본관 경주(慶州). 호 부재(溥齋). 본명 순오(舜五). 충북 진천(鎭川) 출생. 일찍이 신학문에 뜻을 두고 영어 ·러시아어 ·법률 등을 공부하면서도 1894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여러 요직을 거쳐 1904年 보안회(保安會) 후신인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 회장이 되었고, 1905年 법부협판(法部協辦) ·의정부참찬(參贊)을 지냈다. 그 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병세(趙秉世) 등과 협의, 조약의 무효를 상소하고 자결을 기도하였으나 실패에 그쳤다.

 

1906年 이동녕(李東寧) 등과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노우키에프스크[煙秋]로 이주, 원동임야회사(遠東林野會社)를 세우고, 간도(間島) 룽징춘[龍井村]으로 가서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 교포자녀의 교육과 항일민족정신 고취에 진력하였다.

 

1907年 고종의 밀지(密旨)를 받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李儁) ·이위종(李瑋鍾)과 함께 참석, 일본의 침략행위를 규탄하여 전세계에 알리려 하였으나 일본의 계략으로 참석을 거부당하였다. 이 때 이준은 자결을 단행, 세계를 놀라게 하였는데, 본국에서는 일본의 압력으로 궐석재판(闕席裁判)이 진행되고 이상설에게는 사형이,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종신형이 선고되었다.

 

그래서 귀국을 단념하고 영국 ·미국을 거쳐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유인석(柳麟錫) 등과 성명회(聲鳴會)를 조직, 국권침탈의 부당성을 통박하는 성명서를 작성하여 각국에 발송하는 등 세계를 상대로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일본의 요청을 받은 러시아 관헌에게 붙잡혀 투옥되었다.

 

이듬해 석방되어 이동녕 등과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고, 《권업보(勸業報)》 《해조신문(海潮新聞)》 등을 발행,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62年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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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호(李鍾浩, 1885~1932) ...육영사업가.

 

함경북도 명천 출생. 1907年(융희 1) 조부 이용익(李容翊)의 뒤를 이어 제2代 보성(普成)학교(고려대학교의 전신) 교주(校主)가 되었으며, 협성(協成)학교·강화 보창(普昌)학교·청주 보성(普成)학교 등을 경영하였다. 그 밖에 보성사 인쇄소를 경영하여 많은 서적과 교과서를 간행, 전국 각 학교에 무료로 배부함으로써 후진 교육에 크게 힘썼다.

 

1910年(융희 4) 국권을 상실하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고 《권업신문》을 발행하였다. 1917年 상하이[上海]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귀국, 명천에서 1年間 거주의 제한을 받고, 이듬해 상경하여 천도교에 이관된 보성학교 재단을 인수받으려 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62年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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