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갈,묘비,묘표 207

牛峰桃李村先塋墓壇碑 譯文.

우봉도리촌선영묘단비 역문 (牛峰桃李村先塋墓壇碑 譯文) 후손 유원(裕元) 지음 이씨(李氏) 옛 족보에「경주이씨(慶州李氏)의 선영(先塋)이 우봉도리촌(牛峰桃李村)에 있다」하였으니 살피건대 우봉(牛峰)은 지금 서해안(西海岸) 금천군(金川郡)이니. 숭양(崧陽: 개성) 개성開城)과의 거리가 三十里도 안되는 가까운 지점이다. 우리 이씨(李氏)의 세묘(世墓: 대대로 내려온 묘소)가 처음 부터 그 자리를 얻어서 익재선생 제현(益齋先生 齊賢)의 묘소와 그의 자제 밀직사(密直使: 중추원의 從二品 벼슬) 창로(彰路)의 묘소가 현재 마을 가운데 있어, 자손(子孫)들이 대대로 지켜왔다. 그 위에 선조(先祖)의 묘소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틀림없다. 경주 부 금오산(慶州府 金鰲山)에 시조(始祖)의 산소라고 하는 것이 징빙할 수 ..

奉常寺正 李瑛 墓碣銘 幷序 - 국당공후 정순공파

이영『李瑛, 1501년(연산군 7)∼1558년(명종 13)』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윤(子潤). 이혁손(李赫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증(李增)이다. 아버지는 부사과 이양필(李良弼)이고, 어머니는 이수유(李守柔)의 딸이다. 1525년(중종 20)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39년(중종 3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문한관(文翰官)에 임명되었다. 1544년 예조정랑이 되었고, 그 뒤 병조정랑·정언·지평 등을 역임하면서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50년(명종 5) 경연(經筵)에 참가하여 명나라가 우리나라의 사신접대를 소홀히 함을 지적하고 북경(北京)과의 무역금지를 건의하였다. 이후 장령·수찬·부교리·사간·사인·집의 등을 역임하였다. -------------------------------..

재사당 이원선생 묘갈명.행록.적거 유허비.유사(1471추정-1504)

■ 재사당 이원 선생 묘갈명(再思堂李黿先生墓碣銘) 김상헌 지음(金尙憲 撰) 재사당(再思堂) 이 선생이 홍치 갑자(弘治 甲子:연산10년, 서기1504년) 10월 24일에 화(禍)를 당한 뒤 120년(실제로는 131년이 됨) 숭정 8년 을해(崇禎 8년 乙亥: 인조13년 서기 1635년)에, 증손 대정(曾孫 大鼎)이 양주(楊州)의 시골집으로 나를 찾아왔다. 읍하고 인사를 하고 다가오기에 맞아보니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 얼굴에 근심하고 슬퍼하는 빛이 있어 깊은 슬픔이 있는 것 같았다. 뒤돌아서 가져온 한 책자(冊子)를 꺼내어 주면서 이르기를 저의 선조 재사 당 공(先祖再思堂公)의 행적(行跡)입니다. 때를 만남이 불행하여 땅위에 뿌린 피가 푸르게 엉기어 굳은 한이 서린 산소 앞에 아직도 비명(碑銘)하나 새겨 ..

慶尙道觀察使淸湖公李暿墓碣銘

■ 경상도 관찰사 증 이조판서 청호공 묘갈명. (慶尙道 觀察使 贈 吏曹判書 淸湖公 墓碣銘 ) 후손 상경 지음(後孫 相慶 撰) 부군(府君)의 휘(諱)는 희(暿)요, 字는 명중(明仲)이요, 호(號)는 청호(淸湖)요, 성은 이씨(李氏)니 경주(慶州)사람이다, 신라 좌명공신(新羅 佐命功臣),휘(諱), 알평공(謁平公)이 그의 시조다. 고려(高麗)말에 휘 제현(齊賢)공이 계시니 호(號)는 익재(益齋)요, 계림 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군(封君)되시고 시호(諡號)는 文忠(문충)이니, 공(公)의 고조(高祖)시다. 증조(曾祖)의 휘는 달존(達尊)이요, 호는 운와(雲窩)로, 임해군(臨海君)에 추봉(追封)되었다. 조부 학림(祖父,學林)은 소부윤(小府尹)을 역임 하셨고, 아버지, 담[擔, 1370 (공민왕 19) - 1405 ..

성균진사 이성일 묘갈명(成均進士 李聖一 墓碣銘)

성균진사 이공 묘갈명(三十二世) 창녕 성기덕 찬(昌寧 成耆悳 撰) 고(故) 성균진사 죽창 이공(成均進士 竹窓 李公)의 휘(諱)는 성일(成一)이요, 자(字)는 일지(一之)니 경주(慶州)로 이어왔다. 문충공 익재선생(文忠公 益齋先生)의 후(後)요, 충익공 벽오 시발(忠翼公 碧梧 時發)의 현손(玄孫)이라. 증조(曾祖)는 경선(慶善)이니 호조좌랑(戶曺佐郞)이시다. 장릉 병자(長陵 丙子)에 순절(殉節)하여 정려(旌閭)와, 예조참의(禮曺參議)를 증직(贈職) 받았다. 조(祖)는 인형(寅炯)이니 진사(進士)요, 고(考)는 준곤(埈坤)이니 학문(學文)에 전념 하시다가 일찍 별세(別世)하셨다. 외조(外祖)는 호군 고령 김정중(護軍 高靈 金鼎重=行 從仕郞)이다. 숙묘 경신(肅廟 庚申), 10월 13일에 고령 양전원 외가(高..

신라소판경주이공사단비명(역문)

■ 신라소판경주이공사단비명(역문) 이땅에 민생이 있으면 하늘이 신성한 임금을 반드시 낳으시며 현철충량한 보필도 반드시 있게되어 국가를 세우고 정치를 이루나니 이는 천하만세의 통한 의리인것이다. 저 옛날 한유민들이 육부촌을 만들고 각각 촌장을 두어 다스리다가 박혁거세의 신성함을 보고 임금으로 세웠으니 겸양하는 풍토를 볼 수 있도다. 이때 양산촌장 휘 謁平께서 선두에서 주장하였으니 바로 우리 경주이씨의 시조이시다. 경주 표암에서 태어나신 성문무겸전하여 나라를 세우고 임금을 도와 민생을 보살피었으니 지극한 덕망은 하늘과 사랑의 도움을 얻어 높은 벼슬과 긴 수명을 모두 누리게 된 것이다. 유리왕 구년에 이씨의 성을 받았고 대대로 진골이 되었으니 아 성대하도다 그러나 초창시대로 문헌이 남아있지 않아 계보를 찾지 ..

초대부통령 이시영선생 묘비명

■ 성재 이시영선생 묘비명(省齋先生墓碑銘) 박종화 근찬(朴鍾和 謹撰) 여기 산(山) 좋고 물 맑은 삼각산(三角山) 밑 수유동(水踰洞) 푸른 언덕 가에 韓國의 높으신 분이 고요히 누워계시다. 누구이신가, 대한민국초대부통령성재이시영(大韓民國初代副統領 省齋李始榮)선생의 유택(幽宅)이다. 동포(同胞)여! 그대는 벽혈(碧血)을 뿌려 활화산(活火山)이 되게 한 대한독립운동사(大韓獨立運動史)를 읽었던가. 성재(省齋)선생은 바로 이 역사(歷史)속에 별같이 영생(永生)해 살아계신 분이다. 선생은 한제말(韓帝末)에 평남관찰사(平南觀察使)를 역임(歷任)하셨고, 애국(愛國)의 지사(志士)로 나라가 亡하니 一家의 富貴와 榮華를 버리시고 全 가권(家眷-가족을 말함)을 거느려 나만(南滿)에 亡命한 後 私財를 탕진(蕩盡)하여 신흥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