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갈,묘비,묘표

성균진사 이성일 묘갈명(成均進士 李聖一 墓碣銘)

야촌(1) 2005. 12. 25. 20:09

성균진사 이공 묘갈명(三十二世)

 

창녕 성기덕 찬(昌寧 成耆悳 撰)

고(故) 성균진사 죽창 이공(成均進士 竹窓 李公)의 휘(諱)는 성일(成一)이요, 자(字)는 일지(一之)니 경주(慶州)로 이어왔다.

문충공 익재선생(文忠公 益齋先生)의 후(後)요, 충익공 벽오 시발(忠翼公 碧梧 時發)의 현손(玄孫)이라. 증조(曾祖)는 경선(慶善)이니 호조좌랑(戶曺佐郞)이시다. 장릉 병자(長陵 丙子)에 순절(殉節)하여 정려(旌閭)와, 예조참의(禮曺參議)를 증직(贈職) 받았다.

조(祖)는 인형(寅炯)이니 진사(進士)요, 고(考)는 준곤(埈坤)이니 학문(學文)에 전념 하시다가 일찍 별세(別世)하셨다. 외조(外祖)는 호군 고령 김정중(護軍 高靈 金鼎重=行 從仕郞)이다.

숙묘 경신(肅廟 庚申), 10월 13일에 고령 양전원 외가(高靈 良田院 外家)에서 탄생(誕生)하시니 즉 선공(先公)이 별세(別世)하신 다음 달이다.

어려서 부터 지극한 정성(精誠)이 있어 효도로 편친(偏親)을 모시고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아니 하시다가 나이 40세 되던해 모친(母親)과 함께 천연두(天年痘)에 이병(罹病)하여 공(公)이, 아직 완쾌(完快)하기도 전에 모친(母親)께서 별세(別世)하시니 공(公)이 애통(哀痛)함이 심(甚)하여 기절(氣節)했다가 겨우 살아나니 보는 사람들이 눈물 안흘리는 이가 없었다.

이미 장성하여 골몰히 글을 읽어서 세세(細細)한 말과 깊은 문의(文義)도 밝게 통(通)하여 아니함이 없고 시(詩)와 말(言)이 사람을 놀라게 하여 글씨는 신(神)의 경(境)에 들었다.

신청천 유한(申靑泉 維翰)과 같이 배우매 신공(申公)이 필(筆)을 놓고 말씀 하시기를 나는 못따르겠다고 했으며 널리 경사(京師)에 놀매 최곤륜 창대(崔昆侖 昌大)와 공(公)의 재종조 담헌 하곤(再從祖 澹軒 夏坤)또한 극구칭찬(極口稱讚)하였다.

과장(科場)에 다섯번 출제(出題)하여 세번 합격(合格)해서 나이 50에 비로소 진사(進士)가 되니, 혹자 음직(或者 蔭職)으로 권유(勸諭)하나 공왈(公曰), 나의 소지(素志)가 아니라 하고 다시 진취를 구(求)하지 아니하고 다시 촌장(村庄)으로 돌아오니 초옥수간(草屋數間)에 조석(朝夕)도 근근(僅僅)히 유지하여 처지(處之)가 담박(淡泊)하였다.

오직 서적(書籍)이나 보고 후배양성(後輩養成)함을 낙(樂)으로 삼았다. 선공(先公)을 모시지 못함을 원통(寃痛)해 하여 복을 입고저 하다말고 백부 호군공(伯父 護軍公)께 더욱 정성(精誠)을 다하다. 죽창문집(竹窓文集)이 전(傳)해오고있다.

73세 임신(壬申) 1752년 1월 29일에 별세(別世)하고 동년(同年), 2월 24일에 현동 사례산향 사혈(縣東 舍禮山向 巳穴)에 장사(葬事)하니 선조(先兆)를 따름이라.

배(配)는 진양정씨 증 참의 선영(晋陽鄭氏 贈 參議 善韺)의 여(女)요, 충의공(忠毅公), 기룡(起龍)의 증손(曾孫)이라. 정사(丁巳) 1677년 탄생(誕生), 정축(丁丑), 1697년 8월27일 하세(下世)하여 동원(同原)에 장사(葬事)하다.
3남(三男)을 두었으니 장(長)에 사유(思游)요, 차(次)는 사수(思洙), 사기(思淇)요, 일녀(一女)는 황득정(黃得正)이라. 사유(思遊)의 남(男)은 회근(晦根)이요, 진사(進士)라, 차(次)는 후근(厚根) , 노근(老根)이요, 여(女)는 이치은(李致殷), 설홍일(薛弘一), 정홍좌(鄭弘佐)라,

사수(思洙)의 남(男)은 창근(昌根)이라. 사기(思淇)의 남(男)은 성근(成根)이요, 여(女)는 이신(李紳), 김즙(金, 화할즙), 황모(黃某), 황의, 남(男)은 재표(載杓), 재두(載斗), 재규(載奎)라,

증손, 남여(曾孫 男女)는 다 기록(記錄)치 못한다. 팔세손 덕희(八世孫 德熙)가, 공(公)의 묘문(墓門)에 궐현(闕顯) 됨을 개탄(慨嘆)하여 돌을 이미 다듬어 놓고 춘희군(春熙君)이 공(公)의 손(孫), 회근(晦根)의 행장(行狀)을 가지고 여러번 우리 문(門)에 발걸음 하여 내게 글을 청하니 사양치 못하고 이에 가감(加減)하여 우(右)와 여(如)히 서(叙)하고 따라서 명(銘)에 가로되, 명문(名門)의 자손(子孫)이요, 일방(一方)에 엄지 손가락이다.

 

때이냐 명(命)이냐 천리마(千里馬)가 막판에 늙었도다. 뒷 자손을 기다려서 건상(巾箱)에 사적(事跡)을 남겼도다. 효자(孝慈)로운 감회(感懷)가 일어나서 갈사(碣辭)를 돌에 새기었다.

이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