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갈,묘비,묘표 207

健元陵 參奉 李公(鳳男)墓碣銘/26世

■ 健元陵參奉李公墓碣銘/26世 (八月 晦日) 朴世采 撰 公諱鳳男。字瑞仲。月城之李。世爲東方大族。有諱謁平。翊戴羅祖。是其鼻祖也。曾祖諱禮臣。上庠。祖諱夢尹。司導寺正。考諱安福。隱德不仕。公少孫。未幾母夫人又歿。繼祖母趙氏憐之。撫養如己出。十六歲始知爲學。慨然曰吾旣失父母。苟不力學自立。非人也。遂取小學近思錄及諸先儒書誦讀。輒提其要。遍交當世有識之士。以博歸趣。最與宋龜峯翼弼,鄭松江澈,金沙溪長生諸公友善。間游館學。力論妖僧普雨罪。又疏救松都儒生破淫祠者。時議快之。其疾惡持正類此。旣而棄擧子業。往來抱川忠州間。力田行義。事趙夫人及叔父某克底孝敬。鄕黨稱服。於是中外交薦公學行可用。命除禧陵參奉。未幾趙夫人卒。公哀悼特甚。持制一如文公禮。且結廬墓側。手具饋奠。不釋衰麻以終喪。壬辰上西狩。公聞變。間道跋涉。奔問行在。朝廷嘉之。將大用。旋除健元陵參奉。以萬曆癸巳十二月二十二日辛未卒。距其..

계림 부원군 양희공 묘갈명(鷄林 府院君 襄僖公 墓碣銘)

■ 계림 부원군 양희공 묘갈명(鷄林 府院君 襄僖公 墓碣銘) ◇국당공 후 제정공의 손자임(20世) 경기도 광주 산중에 신좌(辛坐)의 무덤이 있으니 이것이 곧 고 천관 태재(天官太宰 : 이조 판서) 이공의 묘소다 비(碑)가 오래 되어 글자가 망가저서 후세에 알려 줄 수가 없다. 후손 정호(靖浩). 보영(普榮). 동영(東榮). 세영(世榮) 등이 비를 다시 세워 각을 하려 하여 가승과 오랜 기록을 상고하여 변변치 못한 나에게 명을 청하여 왔다. 사양할 수도 없었다. 살펴 보건데 공의 이름은 흥적(興啇)이고, 자는 자연(子衍)이고 호는 겸탄(謙灘)이다. 신라 원훈(元勳) 알평(謁平)은 경주 이씨의 시조이다. 신라로 이어서 고려조가 들어선 뒤에 이름 있는 공경이 번갈아 일어났으니 평리(評理)로서 증직이 상서 좌복야..

덕봉 이종길 묘표(德峯 李宗吉 墓表)/익재공후 밀직공파

漫浪集卷之九 ■ 德峯李公墓表 만랑 황호 지음(漫浪 黃㦿 撰) 德峯李公歿三十年所。而昌原黃某爲之墓表曰。斯可以表矣。夫表者。揚之名而勸之義也。表死以勸生。表先以勸後。表鄕以勸鄕。勸鄕以風國矣。公其備矣。曷不爲之表哉。公生而有美質。稍長知孝於親。敬養無方。父母稱曰能子。壬辰島夷難作。公家大人勤王義州。公奉母夫人避兵。克免于刳。甲乙歲極凶人相食。公入耕出賈。仰事俯育。俾百口無菜色。以及于隣比。丁酉賊再動。闌入湖西殺掠。公與家大人隱林藪間。家大人遇賊。賊加之刃。公抱持號哭。爭命一劍。賊義而捨之。業刃殊矣。十日乃歿。公旣葬服除。遂絶意世事。廢擧子業。而曰余不得與余父同死于兵。余其非人子。而何心立於世。每讀小學至王裒事。輒廢卷流涕。痛終身不衰。其事亡也如存。齊明潔誠。久而彌篤。斯其爲孝也。公有弟二人。求分而不忍離。同居而無間言。有過而歸諸已。割產業轍婢侍而周之無少吝。又有兩堂兄。公常父事之..

오촌공 이대건 묘갈명 병서 - 간이 최립 찬

[생졸년] 1550년(명종 5) ~ 1574년(선조 7) 증(贈)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 이공(李公) 묘갈명(墓碣銘) 병서(幷序) 공의 휘(諱)는 대건(大建)이요, 자(字)는 경지(慶之)이다.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원래 그 선조가 알평(謁平)이라는 이인(異人)이니, 호암(瓠巖) 아래에서 태어나 실로 신라(新羅)의 개국(開國)을 도왔다고 전해진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대대로 명가(名家)의 전통을 이어왔는데, 급기야 고려(高麗) 말에 이르러서는 문하시중(門下侍中) 문충공(文忠公) 휘 제현(齊賢)이 덕업(德業)과 문장으로 천하에 이름을 드러냈으므로,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익재 선생(益齋先生)이라고 일컫고 있으니, 이분이 바로 공에게 10세조가 된..

領議政 雲谷 李光佐 墓表 陰記

■ 영의정 운곡 묘표음기(領議政 雲谷 墓表陰記) 족질(族姪) 종성(宗城) 지음 선생의 성(姓)은 이(李)씨요, 휘(諱)는 광좌(光佐), 자(字)는 상보(尙輔), 호(號)는 운곡(雲谷),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양와선생(養窩先生) 휘 세구(世龜)의 아들로, 휘 항복(恒福)의 현손(玄孫)이요, 구당(久堂) 박 문효공(朴文孝公) 장원(長遠)의 외손이다. 갑술년(숙종 20, 1694) 문과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한 뒤 청화직(淸華職)을 두루 역임하고, 이어 양전(兩銓)의 장관(長官)에 대제학(大提學)을 겸하였고, 계묘년(경종 3, 1723)에 정승(政丞: 우의정)이 되었다. 계축년(영조 9, 1733)에 벼슬에서 물러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수상(首相/領議政)이 된 것이 모두 세 번인데, 경신년(영조 16..

이예신 묘갈명(李禮臣墓碣銘)

◈시대 : 조선 ◈ 연대 : 1538년(중종33년) ◈ 유형/재질 : 비문/돌 ◈ 문화재지정 : 비지정 ◈ 크기 : 높이 98Cm, 넓이 55Cm, 두께 18Cm ◈ 소재지 : 경기도 포천군 가산면 금현리 광촌마을 ◈ 서체 : 해서(楷書) -------------------------------------------------------------------------------------------------------------------------------------- ■ 이예신묘갈명(李禮臣墓碣銘) 가선대부 한성부우윤 지제교(嘉善大夫漢城府右尹知製敎) 조인규(趙仁奎) 지음 가정(嘉靖) 병신년(1536 중종 31) 8월 진사(進士) 이군(李君)이 사망하여 그해 10월 그 아들들이 포천(抱川)의 추곡(..

창평 현령 이공 묘갈명(昌平縣令李公墓碣銘)

■ 23世 창평 현령공 묘갈명(昌平縣令公墓碣銘) [생졸년] 1437년(세종 19) ~1509년(중종 4), 고령 신용개 지음(高靈 申用漑 撰) 공의 이름은 공린(公麟)이고 자(字)는 정수(禎叟)이다. 경주(慶州)의 저명한 성씨다. 육 대조(六代祖)는 제현(齊賢)인데, 호(號)는 익재(益齋)라고 불렀다. 고려조 때 귀히 되어, 벼슬이 시중(侍中)이다. 문장(文章)과 덕(德)과 사업이 아울러 한때에 높았다. 그 뒤로 부터 높은 벼슬이 계속되어 세상의 이름있는 가문(家門)이 되었다. 관찰사(觀察使) 윤인(尹仁)에 이르러 만호 홍중량(萬戶 洪仲良)의 따님과 혼인하여 공(公)을 낳았다. 홍씨(洪氏)역시 남양(南陽)의 문벌(文閥)있는 씨족이다. 공(公)이 성질이 순후(淳厚)하고, 근실(勤實) 하였다. 아름다운 자질..

이인척 묘표(李仁倜 墓表)/이완장군 아들

■ 繕工監直長李公墓表 26世 이인척 : 생졸년 미상[16세기 인물] 嗚呼。李君子挺。卽右議政貞翼公諱浣之子也。貞翼以 三朝宿將。位至丞相。當 孝廟勵志修攘。與貞翼密論天下事。君弱冠。實與聞焉。每當軍國大計。貞翼嘗諮於君。君指畫事利病。燭後徵如契蔡。多所建明。始貞翼有錦州之役。以權宜佐師。受 中朝誥諭。北人以六事詰之。善其對。事得已。貞翼嘗條以與君曰。異時天或悔禍。漢室復興。此足以辨國誣矣。及先公之歿。君上疏言之。仍陳禦敵三策甚悉。 上嘉賞。命錄進其書。藏于史室。其事祕。世莫得以聞也。用薦者筮仕。監倉考工。非所以處長才也。朝廷將築江都。閔左相鼎重薦君管其事。 上曰。予已知其才。且嘗疏論此事。宜任之。會歲旱。寢不果。君旣富於才。志高而行修。顧厄於邦制。卒以不施。然名流長者。折人地契許。朝中大夫士。咸推將帥才。謂有緩急君可屬。噫。此可以知君矣。君娶參議延安李㦖女。生三男燽,熺,熀。一..

黃山察訪 李德嶂 碣陰銘 幷序

黃山察訪李公碣陰銘幷序 지은이 : 퇴계(退溪) 이황(李滉) 公諱德嶂。字缺。慶州人。新羅始祖赫居世佐 命大臣謁平之後。曾祖某。大司憲。祖某。生員。考某。進士。公生於成化壬寅十二月十九日。少習擧業。嘗擧於鄕試。禮部不中。蔭補黃山道察訪。嘉靖癸未。丁外艱。服闋。爲家貧親老。求再遂祿仕計。勉赴京師。明年四月二十七日。遇病不起。享年四十二。癸未十二月十七日。葬于皆丹縣雲峯山艮坐坤向之原。公自少軒輊尙氣。不肯齷齪庸流中。其在京師日。嘗草疏。欲陳時事。已而。戒出位而止。敎子弟甚嚴。鄕里後生。亦加勸督。不以生産作業爲務。嘗稱貸以自給。公配曰 豐山柳氏。進士子溫之女。工曹典書從惠之後。成化癸卯十二月二十日生。稟性閒靜。平居無疾言遽色。公歿。家益窮。猶不聽家人之歎貧曰。吾分止是。何恨焉。其訓子。以爲寧受凍餒。不可取不義之物。睦族交隣。盡心無慊。或拔貧以周急。又未嘗虛受人饋。族人有以祀事見推。柳氏無辨..

운와공 이달존 묘표(雲窩公 李達尊 墓表)

■ 이달존(李達尊) 이달존『李達尊 : 1313년(충선왕 5)~1340년(충혜왕 1)』의 자는 천각(天覺)이다. 세계(世界)는 계림(鷄林 : 경주)이다. 조부는 이진(李瑱)이며, 아버지는 이제현(李齊賢)이다. 권부(權溥)의 외손자이고, 백이정(白頤正)의 사위이다. 이달존은 문장과 시를 잘 지었다. 11세에 문음(門蔭)으로 별장에 임명되었으며,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충혜왕이 원나라에 갈 때 부친을 따라 수행하였다. 충혜왕이 복위 후 본국에 오던 중 죽었다. 28세였다. 자식은 5남매이다. 맏아들은 덕림(德林)으로 11세이고, 다음은 수림(壽林)으로 9세이며,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묘지명은 이곡(李穀)의 문집인 『가정집(稼亭集)』권11과 『동문선(東文選)』권124에 실려 있으며, 1340년(충혜왕 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