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갈,묘비,묘표

신라소판경주이공사단비명(역문)

야촌(1) 2005. 8. 6. 22:57

■ 신라소판경주이공사단비명(역문)


이땅에 민생이 있으면 하늘이 신성한 임금을 반드시 낳으시며 현철충량한 보필도 반드시 있게되어 국가를 세우고 정치를 이루나니 이는 천하만세의 통한 의리인것이다.

 

저 옛날 한유민들이 육부촌을 만들고 각각 촌장을 두어 다스리다가 박혁거세의 신성함을 보고 임금으로 세웠으니 겸양하는 풍토를 볼 수 있도다. 이때 양산촌장 휘 謁平께서 선두에서 주장하였으니 바로 우리 경주이씨의 시조이시다.

 

경주 표암에서 태어나신 성문무겸전하여 나라를 세우고 임금을 도와 민생을 보살피었으니 지극한 덕망은 하늘과 사랑의 도움을 얻어 높은 벼슬과 긴 수명을 모두 누리게 된 것이다.

 

유리왕 구년에 이씨의 성을 받았고 대대로 진골이 되었으니 아 성대하도다 그러나 초창시대로 문헌이 남아있지 않아 계보를 찾지 못하고 신라끝에 이르러 휘 居明에서부터 족보계대를 세우게 되었으니 이 어른이 우리 이씨의 중간시조가 된것이다.

 

족보에 이르기를 벼슬이 소판에 이르렀다 하였으니 소판은 신라때 높은 벼슬인즉 공의 덕업과 행실이 풍부하였을 것인데 자취를 찾을 수 없고 배위 생줄묘소가 모두 실전되었으니 연대가 멀어 자연 그렇게된 것이다.

 

아들 金現은 병부령이고 승자 金書는 고려개국을 도와 삼한공신이 되었고 증손 潤弘은 병정이고 현손 承訓은 시랑 承謙은 판이부사이다.

 

십사대손에 이르러 휘 翮은 호 悅軒이며 문하평리이고 휘 강은 판전객시사이다.

 

십오대손에 휘仁挺은 호 誠菴이며 문하평리이고 瑱은 호 東菴이니 해군으로 시호 文定이고 世基는 호 松巖이니 대제학으로서 시호 文僖이고 신유는 예의판서이다.

 

십육대손에 榑는 양시장원으로 사인이고 樛도 양시장원으로 헌납이고 琯은 호 怡菴이며 양시장원으로 가락군이고 薺賢은 호 益齋이며 양시장원으로 일곱 임금에 걸쳐정승을 네 번이나 역임하였고 시호 文忠이다.

 

蒨은 호 菊堂이며 양시장원으로 대제학이고 시호 文孝이다 邁는 부정이고 薖는 상서이며 蓨는사인이고 元茂는 보승낭장이다.

 

십칠대손에 元善은 전서 依班은 군기감 壽得은 밀직은 상서이고 天柱가 있고 瑞種은 부령 達尊은 호 雲窩 문과 직제학이고 彰路는 밀직사 敬中은 월성군으로 시호 文貞이고 培中은 문과 판서이고 達衷은 호 霽亭 계림부원군으로 시호 文靖이고 誠中은 대제학으로 시호 靖順이다.

 

 敬之는 대제학으로 오성군이고 敬元은 수찬 元普는 지인주사 淑魯는 가선處中이있고 元敬은 첨정이다.

십팔대손에 養吾는 직장 存吾는 호 石灘 문과정언으로 辛旽을 논박 고려충신으로 유명하고 存中은 진사 存斯는 문과교감이다 그 외에도 申佑 시랑이있고 후손에 之秀는 월성군이다.

 

공의 후손이 천년이 넘는 동안에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분적종도 합천 우계 아산 재령 원주 진주등의 성씨가 전국에 펴져있으며 도학 문장과 현상 양파와 문재덕으로 세상의 추앙을 받는 이도가 기록할 수 없으므로 공의 현손까지만 기재하고 이하는 고려 이상에 특별한 이만 기록하였다 아 하늘이 이처럼 보답함은 반드시 그 까닭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후손이 공을 추모하는 사업이 없었으니 어찌 통한이 아니리오 지난 해 평리공파에서 추모사업을 발논하여 所要대지를 안성군 원곡에 확보하고 중앙화수회에 상의 온 종문의 찬동을 얻고 그 종회장 埈鎬와 各派  代表가 찾아와 글을 청하였다.

 

그윽히 생각건대 옛 사람이 묘를 잃으면 부득이 설단하였으니 이제 분묘와 제단의 차이와 거리의 멀고 가까움은 논할것이 없도다 자손의 기운이 바로 선조가 남긴 기운이므로 지성으로 제사하면 선조가 감응함을 어찌 믿지 않으리오.

 

우리 일가들은 서로 정성을 다해 위로는 선조의 영령을 위로하고 아래로는 후손의 사모하는 마음을 펴서 천년동안 못했던 일을 이루면 선조의 영혼이 반드시 나도 후손이 있었구나 하면서 무궁한 복록이 내리도록 하시리라.

 

銘에 이르되 신라보다 먼저 육부촌장 있었으니 표암공 신명하여 백성들 모여 들었네 박씨 임금 옹립하니 공로지대 진골되었구나 신라말에 소판공 일어나 중시조 되었는데 자손들 온 나라에 가득하나 유적은 없어졌네 이를 개탄 제단모시니 정리에 맞는 구나.

 

큰 비석 원곡에 세워 이 글을 천추에 보이련다.


檀紀四千三百二十七年 得姓一千九百六十三年 甲戊  四月二十三日에 세우다

尙書公派 白沙文忠公十二世孫 國會議員 鍾贊 國譯
蘇判公祀壇建立推進委員長 評理公派 埈鎬 謹竪
菊堂公派 相千 謹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