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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부통령 이시영선생 묘비명

야촌(1) 2005. 7. 19. 11:29

■ 성재 이시영선생 묘비명(省齋先生墓碑銘)

 

박종화 근찬(朴鍾和 謹撰)

 

여기 산(山) 좋고 물 맑은 삼각산(三角山) 밑 수유동(水踰洞) 푸른 언덕 가에 韓國의 높으신 분이 고요히 누워계시다. 누구이신가, 대한민국초대부통령성재이시영(大韓民國初代副統領 省齋李始榮)선생의 유택(幽宅)이다.

 

동포(同胞)여! 그대는 벽혈(碧血)을 뿌려 활화산(活火山)이 되게 한 대한독립운동사(大韓獨立運動史)를 읽었던가. 성재(省齋)선생은 바로 이 역사(歷史)속에 별같이 영생(永生)해 살아계신 분이다.

 

선생은 한제말(韓帝末)에 평남관찰사(平南觀察使)를 역임(歷任)하셨고, 애국(愛國)의 지사(志士)로 나라가 亡하니 一家의 富貴와 榮華를 버리시고 全 가권(家眷-가족을 말함)을 거느려 나만(南滿)에 亡命한 後 私財를 탕진(蕩盡)하여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창설(創設)하시니, 이는 곧 回天大業을 일으키는 일대 精神運動이요, 獨立 鬪爭을 전개(展開)하려는 일대 발원(發願)이었다.

 

마침내 先生은 저 有名한 韓日鬪爭 靑山里 싸움에서 왜적(倭賊)의 혼담(魂膽)을 무찌르는 原動力이 되셨고, 赤手 抗戰의 三·一 運動을 일으킨 大師表가 되셨다. 그로 因하여 大韓民國 上海 臨時政府의 法務總長· 財務總長의 大任을 맡는 等 異國風箱에 一平生을 신산(辛酸-슬프고 괴로움)과 비극(剕棘)속에서 오직 正義와 自由와 獨立을 爲하여 강의불굴(剛毅不屈) 추상(秋霜)같은 기백(氣魄)으로 용왕매진(勇往邁進-거리낌 없이 힘차고 용감하게 나아감) 마침내 大願이 達成 되었다.

 

선생은 일제(日帝)의 몰락(沒落)과 해방(解放)의 기쁨을 맞이하여 臨政의 還國과 함께 故國으로 돌아오니, 아아! 유지자 사의성(有志事意成-뜻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그 목적을 달성한다)이다. 西紀 一九四八年 戊子에는 初代 副統領에 就任하셨고, 庚寅 六·二五事變이 돌발(突發)하자 선생은 政府와 함께 南下하시어 東來 溫泉에 우거(寓居)하시었다.

 

그러나 이때 政府는 독재(獨裁)와 부패(腐敗)의 길을 밟기 始作했다.

선생은 드디어 西紀 一九五一年 辛卯에 決然히 副統領 職을 버리시고 全國民 앞에 성명서(聲明書)를 발표(發表)하시어 스스로 뜻을 결백(潔白케 하셨다. 슬프다. 世上에 이러한 분이 몇 분이나 되는가.

 

선생은 西紀 一八六九年 己巳 十二月 三日 서울 저동(苧洞)에서 父親 慶州李氏 左贊成 孝貞公 諱 裕承과 母親 貞敬夫人 東來鄭氏 사이에서 五男으로 출생하시어, 西紀 一九五三年 癸巳 四月 十七日 東來 우소(寓所)에서 別世하시니, 享年 八十五歲이시다.

 

初配 貞夫人 慶州金氏는 總理大臣 弘集의 딸로서 長男 규창(圭昶)을 낳으시고, 繼配 貞夫人 潘南朴氏는 승문(勝文)의 딸로서, 次男 규열(圭悅)을 낳으셨다. 규창(圭昶)의 子는 종건(鍾建)이요, 규열(圭悅)의 子는 종문(鍾文)· 종택(鍾澤)이다.

 

恒常 國土의 統一과 民生의 안위(安危)를 念願하시는 선생이 돌연(突然) 귀천(歸天)하시니 三千萬 겨레는 悲痛한 눈물을 흘렸으며, 國會는 國民葬으로 결정하였다.

 

영이(靈輀-시신을 안치한 관을 운반하는 자동차)가 東來를 出發하여 서울로 向하는 연도(沿道)에는 사녀(士女-남녀를 아울러 이르는 말)가 운집(雲集)하여 호곡(號哭)하였고, 葬禮委員들은 선생의 유해(遺骸)를 정릉동(貞陵洞) 南쪽에 임시(臨時) 예장(禮葬)하였다.

 

그 후 선생을 추모(追慕)하는 記念事業會 一同은 西紀 一九六四年 甲辰 四月 十七一 더 좋은 땅을 가리어 水踰洞에 천장(遷葬)해 모시고 비(碑)를 세워 千百世 젊은이들의 香火와 첨배(瞻拜-참배하다)를 받으시게 한다. 명(銘)에 이르되

 

나라가 어진 이들 마음속에 모셔두자

나라의 착한 이들 가슴 안에 수(繡)를 놓자

이 넋이 꽃피는 날에 이 겨레가 밝으리라.

 

西紀 一九六四年 甲辰 月 日

省齋 李始榮先生 記念事業會 建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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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월탄(月灘) 박종화(朴鍾和)

 

[漢譯] : 숭산초동(崇山樵童)

 

省齋先生 慶州李公 始榮 墓碑銘 幷序

 

玆是 山麗水淸 三角山下 水踰靑岸之上 我韓最賢碩人 寂廖暝目之處也 彼何人耶 大韓民國 初代副統領 省齋李始榮先生 幽宅也 借問同胞 君不見 ?碧血 成活火山之韓國獨立運動史乎 若省齋先生 卽是 歷史之中 與星辰同樣 永生之尊者也 先生 于韓帝末 歷任平南觀察使 俄而國亡 化爲一介愛國志士 棄一家之富貴榮華 視如弊履 而全率家眷 亡命南滿也 其後 盡傾私財 創設新興學校 此則 起回天大業之一大精神運動 而欲展開獨立運動之一大發願也 由是 遂成于彼名 巍巍靑山里一戰 蕩滅倭賊魂膽之原動力 至于三一運動 以爲大師表 而提示興起赤手抗戰之進路也 因而閱歷 大韓民國 上海臨時政府 法務總長 財務總長等 大任 其間 轍環異國風霜之中 生平堪耐辛酸荊棘 而唯爲正義 自由 獨立 以剛毅不屈 秋霜氣魄 勇往邁進 畢竟達成大願也 先生 當着 日帝沒落 與解放歡喜 隨臨政 還歸故國矣 於戱 有志事竟成乎 西紀一九四八年 戊子 就任初代副統領 而至庚寅 突發六二五事變 隨政府南下 寓居東萊溫川 然 自此時 政府已踏獨裁腐敗之汚途也 故決然辭副統領職 于西紀一九五一年 辛卯 發表聲明書 對於全國民 而表明自身潔白意志也 是也 當世之間 若此者 何須數乎 先生出生漢陽苧洞 於西紀一八六九年 己巳 十二月 三日 考 慶州李氏 左贊成 孝貞公 諱 裕承之第五子也 ? 貞敬夫人 東萊鄭氏也 一九五三年 癸巳 四月 十七日 別世於東萊寓所 初配 貞夫人 慶州金氏 領相 金弘集女 生一男圭昶 繼配 貞夫人 潘南朴氏 朴承文女 生二男圭悅 圭昶 生鍾建 圭悅 生鍾文 鍾澤 先生 恒常念願國土統一 與民生安泰之中 蓋然歸天 三千萬同胞 泣下悲淚 國會 決定國民葬 靈?發東萊 向京師之沿道 士女奔集 號哭震天 葬儀委員等 臨時禮葬 先生遺骸 於貞陵洞南麓 追慕先生記念事業會一同 西紀一九六四年 甲辰 四月 擇水踰好地 俄而遷葬安置立碑 欲俟千百世少壯後輩之香火瞻拜耳

 

銘曰

國有賢士 藏于北郊

國有善人 針繡胸巢

英靈開花 明明同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