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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三一節)

작성일 : 2022. 3. 1. 11:04 우선 103주년 3.1절을 맞아 이땅의 독립을 위해 애쓰신 모던분들을 추모하고 기념하며 근검한 마음으로 이른 아침 태극기를 게양 합니다. 1919년 3월 1일 서울 종로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이 공동 서명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한 것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대대적인 만세 시위운동이 거행되었다. 약 백만명이 만세운동에 참여했고, 4만 7천여명이 구속되었다. 3.1운동은 신분. 지역. 계급을 초월해 우리민족이 하나로 통합된 역사적 사건이었고, 이를 계기로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우리 제헌 헌법에서는 3.1운동을 대한민국 건국의 기원으로 삼아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천명했다. "우리는 이에 조..

"명성황후 시해" ....일본 외교관 가담자 편지 발견.

작성일 : 2021. 11. 16. 22:30 SBS ㅣ 유성재 기자 입력 2021. 11. 16. 20:33 126년 전인 1895년 10월 일본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과 관련해 당시 여기 가담했던 일본 외교관이 쓴 편지가 최근 발견됐습니다. 왕비 시해가 생각보다 쉬워 놀랐다는 내용까지 적혀 있습니다. 도쿄 유성재 특파원입니다.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무참히 시해된 다음 날인 1895년 10월 9일, 당시 일본 영사관보로 조선에서 근무하던 외교관 호리구치 구마이치가 고향 니가타의 지인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왕비를 살해했다'고 붓으로 휘갈겨 쓴 문장이 선명합니다. 담장을 넘어 드디어 궁궐 안쪽에까지 도착했다며 시해 당시 자신의 행동을 상세히 기록하고, "예상 외로 쉬워 오히려 놀랐다"는 뻔..

'동맹록(同盟錄,독립운동가 113명 명적)' - 최익현

작성일 : 2021. 7. 16. 10:14 제석당 마애석각 명문에 나오는 박노익(朴魯翊) 1921년 함양 군수 민인호(閔麟鎬 1884~1950)는 산청 출신이다. 동경제국대학을 나와 일제 강점기에 탁지부 주부를 거처 함양군수(1919.10~1923.3)를 지냈으며, 1921년 함양명승고적보존회를 조직하여 지리산을 널리 알리는 데 힘썼다. 그 일환으로 1922년 4월 16일~20일(음)까지 고적조사원 권도용(1877~1959), 토목 기수보 大谷定浩(오오타니 사다히로), 고용인 2명, 벽송사 승려 김선응, 이종인, 마천면장 김병호 및 삯꾼 2인을 포함 모두 10명이 벽송사를 출발하여 천왕봉을 유람하였다. 유람의 목적은 함양 군수가 주도하는 함양명승고적보존회에서 마암에 마암당(이진우와 벽송사승 일동), 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그리고 대원군의 정치 체계

작성일 : 2021. 6. 1. 20:46 ■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그리고 대원군의 정치체계 병인, 신미양요는 사실 대원군 집권기에 일어난 일이고 그로인해 오히려 대원군은 집권기반을 더 튼튼히 하였다. 그렇기에 삼군부는 대원군의 개혁 때 다루어야 했지만, 후술하겠지만 병인양요 이후 완전 설치되었고 또 신미양요를 겪었기 때문에 따로 독립적으로 다루기로 하겠다. 하지만 병인, 신미양요를 논하자면 그 이전 대원군의 삼군부 복설부터 다루어야 한다. 병인, 신미양요는 삼군부의 복설 계기이자 시험대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원군의 삼군부 복설부터 병인, 신미양요의 뒤처리까지 다루기로 하겠다. 사실 삼군부 자체는 고려 말 삼군통제부가 태조 2년(1393)에 義興三軍府로 개편된 것이었으나 임란 이후 오위체제로 바뀌었다. ..

병자호란 다시읽기(7)

작성일 : 2021. 7. 14. 18:51 병자호란이 일어나다 Ⅱ 1636년 12월10일 압록강을 건넜다. 이렇다 할 저항이 없었다. 그들은 곽산(郭山)과 정주(定州)에 사실상 무혈 입성했다. 홍타이지는 투항해 온 곽산과 정주의 군민들을 해치지 말라고 유시하는 한편, 그들의 머리를 깎아 치발(髮)할 것을 지시했다. 또한 버일러 두도(杜度)에게 정예병을 뽑아 철산(鐵山)과 가도, 운종도(雲從島) 일대를 공략하라고 지시했다.15년 동안 목에 걸린 가시처럼 청을 배후에서 위협했던 가도의 동강진(東江鎭)을 제거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었다. ●동요하는 조선 조정 청군이 이미 안주를 지났다는 사실을 알리는 김자점의 장계가 조정에 들어온 것은 12월13일이었다. 인조는 대신들을 불러모았다. 영의정 김류는 경기 ..

병자호란 다시읽기(6)

작성일 : 2021. 7. 14. 13:37 (69) 후금 관계 파탄의 시초(Ⅱ) 용골대와 마부대 일행은 다목적 사절이었다. 새해가 밝았음을 축하하는 사절이자, 인열왕후의 죽음에 문상하기 위한 조문사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이 조선에 온 가장 큰 목적은 홍타이지를 황제로 추대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조선의 동참을 촉구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홍타이지 명의의 국서말고도 후금의 여덟 버일러(貝勒, 만주 팔기의 우두머리)들과 몽골 출신 마흔 아홉 버일러들이 작성한 서신을 각각 1통씩 소지하고 있었다. 서신들은 한결같이 엄청난 폭발력을 지닌 내용을 담고 있었다. ▲ 창경궁 명정전의 모습. ●용골대 일행 명버리고 후금 선택 강요 후금의 버일러들이 보낸 서신은 먼저 몽골 각부의 버일러들이 심양에 모두 모여 홍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