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촌 이재훈 435

조선 마지막 황실의 참상.

조선 마지막 황실의 참상 현재의 우리 황실은 일제침략자들이 원하던 대로 철저히 궤멸되어 비참한 상태에 있다. 심지어 공산국가의 모택동까지도, 더군다나 이민족인 만주족 황족들이었던 청나라 황실을 완벽하게 보호하고 예우를 했는데, 일제 침략자들이 망친 황실을 보호는 커녕 이승만이 선봉에 서서 짓밟았으니 황실도 망하고, 역사도 엉망이 되고, 민족의 뿌리도 심각히 흔들리는 비참한 상태가 되었다. 특히 더욱 비참하고 안타까운 것은 현재까지도 이승만의 아류들이 꽤 있어서 황실은 더욱 비참해지고 있음이다. 현재의 황실은 크게 몇 가지 형태로 잔존되고 있다. 첫째는 도피형이다. 많은 황손이 황실질서의 거센 흐름 속에 하나, 둘 고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미국 등에서 하층 민으로 비참하게 생존하고 있다. 둘째는 은둔형..

팔도 인물평.

■ 이전투구(泥田鬪狗) 泥(진흙이), 田(밭전), 鬪(싸움투), 狗(개구)는 "진창에서 싸우는 개" 라는 뜻으로 "강인한 성격" 을 일컬는 말이기도 하지만 "볼썽사납게 서로 헐뜻거나 다투는 모양" 을 비유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전투구의 고사는 조선의 태조 이성계와 건국 공신인 정도전 사이에 오고간 말로서 이성계가 즉위 초 어느 날, 정도전에께 팔도 사람들을 평해 보라고 한 적이 있었다. 이에 정도전은, 경기도를 경중미인(鏡中美人), 충청도를 청풍명월(淸風明月), 전라도를 풍전세류(風前細柳), 경상도를 송죽대절(松竹大節), 강원도를 암하노불(岩下老佛), 황해도를 춘파투석(春波投石), 평안도를 산림맹호(山林猛虎), 라고 평했었다. 즉 경기도는 거울에 비친 미인 같고, 충청도는 맑은 바람속의 밝은 달과 같으며..

서전서숙(중국용정실험소학교) 건교100주년기념행사

↑2006년 09월 20일 서전서숙(오늘날 중국 용정실험소학교) 건교 100주년 기념행사가 현지에서 성대히 거행되었다. ↑보재 이상설선생께서 1906년 만주에 최초로 항일민족학교를 사재(私財)로 설립한 후 전액 무상 교육을 실시한 근대교육의 요람 서전서숙(瑞甸書塾)이다. ↑행사장의 한국 측 내빈석이다. ↑행사장의 본부석(중국 측에선 수석 단이라 칭한다) ↑사단법인 보재 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 측에서 파송한 한국대표단 40명의 기념사진이다. 앞줄 좌측 끝이 인솔단장인 필자이고 다섯번째는 저의 내자이다. 사진 및 글 : 이재훈

인비목석(人非木石)

■ 인비목석(人非木石) 人(사람인), 非(아닐비), 木(나무목), 石(돌석),자로 사람은 감정을 지닌 동물로 나무나 돌과는 다르다는 뜻이다. 이 말은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司馬遷)의 편지에 있는 "신비목석(身非木石)" 이란 말과 육조시대(六朝時代)의 포조(鮑照)가 지은 의행로난(義行路難)이란 시에 있는 "심비목석(心非木石)" 이란 말에서 온 것이라 볼 수 있다. "집이 가난해서 돈으로 죄를 대신할 수도 없다. 같이 교유하던 사람들도 구하려는 이 없다. 좌우의 친한 사람들도 한마디 말이 없다. 몸이 목석이 아닐 진데 홀로 우리들과 짝을지어 깊은 감옥에 갖이게 되었다." 인간은 목석이 아니기에 희로애락의 감정이 있다. 이것은 한(漢)나라 무제(武帝)의 노여움을 사서 궁형(宮刑)이란 치욕적인 형벌을 선..

상탕왕,상주왕,이윤,기자,비간 ,미자,반경,부열,달기,

■ 상탕왕(商湯王) 이름 이(履) 또는 천을(天乙) ·태을(太乙). 탕은 자이며, 성탕(成湯)이라고도 한다. 史記에 의하면 시조 설(契)의 14세에 해당한다. 商은 원래 夏의 속국이었는데 하왕조 말년 걸왕(桀王)이 학정을 하여 내부 모순이 극에 다달았으나 성탕은 유덕하여 백성들이 따르고 제후들의 대부분이 유덕(有德)한 성탕에게 복종하여 세력은 날로 증강하였다. 걸왕은 이를 눈치채고 성탕을 하대(夏臺)에 유폐하여 죽이려 하였으나, 재화와 교환하여 돌아온 후 하나라를 치기위한 준비를 하였다. 탕왕은 박에서 제후들을 소집하여 하나라 정벌이 청명임을 선포하고 현상(賢相) 이윤(伊尹) 등의 도움을 받아 걸왕을 명조(鳴條)에서 격파하였으며 걸왕은 남소에서 죽었다. 성탕이 국호를 商이라 정하여 개국군주가 되었다. 탕..

드라마 주몽과 대소의 역사적 결말.

작성일 : 2006. 07. 30 현재 드라마 주몽이 상당한 인기를 얻고 있지요. 저도 어쩌다가 볼 때도 있습니다만, 역사적 사실과 다른 점이 많기 때문에 왠지 재미있다는 생각 보다는 약간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아쉬운 부분이 너무 많고 무기사가 전공 이다보니 고증에 어긋나는 게 많아서 걸리는 게 많지요. 아무튼...주몽과 대소의 싸움은 결론 적으로 말해서 우선은 대소가 이깁니다. 대소는 주몽을 쫒아내고 주몽은 오이, 마리, 협보와 함께 피신을 가게 되지요. 그 때 몸을 의탁한 사람이 바로 연타 발이고, 그의 딸이 소서 노입니다. 그러나 후에는 주몽이 죽고 나서, 그의 아들인 유리가 왕에 오르고, 그리고 유리왕이 죽고 나서는 그의 아들인 무휼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이게 대무신왕으로서 추모..

동방삭(東方朔)

■동방삭『東方朔 (BC154~93)』 / 三千甲子를 살았다는 익살의 文人 전한(前漢)의 제(齊)나라 태생. 무제(武帝)때의 문인으로. 字는 만천(曼倩). 기언기행(奇言奇行)으로 무제(武帝)의 총애를 받아 수십 년간 측근으로 있으면서 태중대부급사중(太中大夫給事中)까지 올랐다. 재산을 모두 미녀들에게 탕진했으며, 광인이라고 불렸다. 한때 부국강병책을 상주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를 자조하여 《답객난(答客難)》·《비유선생지론(非有先生之論)》을 비롯한 약간의 시문을 남겼다. 한대(漢代)부터 그에게 황당한 글들을 가탁(假託)하는 것이 유행하여 지금도 《신이경(神異經》·《십주기(十洲記》가 그의 저서(著書)로 전해지지만 모두 진(晉) 이후의 위작이다. 전설에 의하면 서왕모(西王母)의 천도복숭아를 먹어 대단히 오래 ..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 1870년(고종 7년). 1월 27일(음력12월 7일) ~ 1917년. 3월. 2일(음력 2월 9일 금요일)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선생은 1870년 1월 27일(음력 12월 7일) 충북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산직마을에서 경주 이씨 이행우(李行雨) 선생과 벽진이씨(碧珍李氏)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7세때 이조(吏曹)와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지낸 동부승지(同副承旨) 이용우(李龍雨)선생의 양자로 출계(出系)되어 서울로 상경한 그는 한학을 공부하는 한편, 독학으로 신학문을 깨우치는 등 두뇌가 명석하고 학문에 대한 열의가 대단하였다. 25세 때인 1894년에는 조선의 마지막 과거인 갑오문과에 급제하여 27세에 성균관 관장, 한성사범학교 교관 등을 역임하였다. 선생은 일제의 황무..

이재정 민주평통 수석 부의장의 중국 두만강 시찰.

↑2006년 4월 23일 부터 4박 5일간 선현들의 중국 만주지역 독립운동사 유적지 및 지방정부, 언론사 등을 시찰했다. 좌측으로부터 김순무 전 농축산물 유통공사 사장, 다음이 변경섭 민주평통 운영위 간사, 다음이 이재정 민주평통 수석 부의장, 다음이 허룡 훈춘시 부시장, 다음은 임장춘 연변일보 고문이 권하통상 세관장의 안내를 받으며 국경선인 다리의 중앙지점으로 이동하고 있다. 세관장의 뒷편 모자쓴이가 필자이고 그뒤 여성분은 시장(市長)을 대신하여 그의 부인 김성희(서울 성공회대학교 유학 출산)씨가 영접했다.

사마천(司馬遷)

■사마천(司馬遷, BC 145경~BC 85경). 중국의 천문관, 역관(曆官), 최초의 위대한 역사가(歷史家)이다. 그는 BC 140~110년 한(漢)의 조정에서 태사령(太史令)을 지낸 사마담(司馬談)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사령이란 천문관측, 달력의 개편, 국가 대사(大事)와 조정 의례(儀禮)의 기록 등을 맡는 직책이었다. 사마천은 젊어서 여러 지역을 여행한 뒤에 조정의 관리가 되었고, BC111년 중국 남서부지방의 군사원정에 참여했다. 기원전(BC) 105년 무제(武帝)가 즉위한 후 아버지가 못다 이룬 꿈이었던, 중국 역사서의 집필에 착수했다. 그러나 역사서를 완성하기도 전에 당시 평판이 나쁘던 이릉(李陵) 장군을 변호하다가 무제의 뜻을 거스르게 되어 황제 비방혐의(誹謗嫌疑)로 심문(審問)을 당했다. 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