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보재이상설선생.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

야촌(1) 2006. 5. 2. 01:25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 1870년(고종 7년). 1월 27일(음력12월 7일) ~ 1917년. 3월. 2일(음력 2월 9일

    금요일)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선생은 1870년 1월 27일(음력 12월 7일) 충북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산직마을에서 경주 이씨 이행우(李行雨) 선생과 벽진이씨(碧珍李氏)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7세때  이조(吏曹)와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지낸 동부승지(同副承旨) 이용우(李龍雨)선생의 양자로 출계(出系)되어 서울로 상경한 그는 한학을 공부하는 한편, 독학으로 신학문을 깨우치는 등 두뇌가 명석하고 학문에 대한 열의가 대단하였다.
 
25세 때인 1894년에는 조선의 마지막 과거인 갑오문과에 급제하여 27세에 성균관 관장, 한성사범학교 교관 등을 역임하였다. 선생은 일제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대해 철회운동을 주도하면서 본격적으로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또한 의정부 참찬의 자리에 있으면서 을사늑약의 강제를 막지 못하자 관직을 버리고 자결을 시도하며 을사늑약의 무효와 을사오적의 처단을 주장하였다.보다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위해 1906년 국외로 망명한 선생은 북간도 용정촌에 근대민족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을 설립하고 학생들에게 항일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이듬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자 선생은 이준, 이위종 열사와 함께 광무 황제의 특사로 파견되어 을사늑약의 무효화와 일제침략의 실상을 열강에 호소하였다. 유럽순방을 마친 선생은 미국에 1년 남짓 머물면서 한인단체의 통합을 추진하여 대한인국민회가 결성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1909년에 다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온 선생은 신한촌 등 항일독립운동기지 개척에 힘을 쏟았다. 또한 연해주와 북간도 일대를 비롯한 국내외의 의병세력을 총집결하여 항일투쟁연합체인 13도의군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선생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한일강제병탄조약이 체결되자 선생은 성명회를 조직하고 병탄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하며 항일독립의지를 만방에 알렸다. 이어 이주한인의 자치를 도모하고자 권업회를 조직하고 독립전쟁론을 구현하기 위해 나자구에 대전학교를 설립하였다.

 

또한 이를 토대로 1914년에 국외 최초로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하기에 이른다.일제의 사주를 받은 러시아의 탄압으로 대한광복군정부 조직이 와해되자 선생은 상해에 신한혁명당을 결성하며 독립운동의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건강이 점차 악화되어 결국 1917년 3월 2(음력 2월 9일 금요일)일에 48세를 일기로 니콜리스크에서 순국하였다. 이에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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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정치문화사에서 발행한 <서울대관(大觀)>을 보면 “낙산(駱山=종로구 이화동,동숭동,창신동, 동대문구

     신설동, 성북구 보문동,삼선동에 걸쳐 있는 산으로서, 낙타산,타락산이라고도 한다.)에 두개의 약수가 있었는데

     이 근처에 이상설 선생의 별장이 있었다.



   그는 을사보호조약이 성립되었다는 말을 들은 후 어느 날 밤 달 밝고 시원한 바람이 불며 만물이 고요한 때 이 별

   장에서 피눈물을 뿌리며 홀연히 종적을 감추었다.[망명길 나섬]” 라고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