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고구려(高句麗)

드라마 주몽과 대소의 역사적 결말.

야촌(1) 2006. 7. 30. 22:51

작성일 : 2006. 07. 30

 

현재 드라마 주몽이 상당한 인기를 얻고 있지요.

 

저도 어쩌다가 볼 때도 있습니다만, 역사적 사실과 다른 점이 많기 때문에 왠지 재미있다는 생각 보다는 약간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아쉬운 부분이 너무 많고 무기사가 전공 이다보니 고증에 어긋나는 게 많아서 걸리는 게 많지요.

 

아무튼...주몽과 대소의 싸움은 결론 적으로 말해서 우선은 대소가 이깁니다. 대소는 주몽을 쫒아내고 주몽은 오이, 마리, 협보와 함께 피신을 가게 되지요. 그 때 몸을 의탁한 사람이 바로 연타 발이고, 그의 딸이 소서 노입니다.

 

그러나 후에는 주몽이 죽고 나서, 그의 아들인 유리가 왕에 오르고, 그리고 유리왕이 죽고 나서는 그의 아들인 무휼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이게 대무신왕으로서 추모왕(주몽)과는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지요.

이 무휼이 동 부여를 공격하게 되고, 그때 까지 대소는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대무신왕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지요. 이게 전체적인 결론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삼국사기를 통해 천천히 짚어 가면서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금와 에게는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들은 항상 주몽과 함께 놀았는데, 그들의 재주가 모두 주몽을 따르지 못하였다.

 

그의 맏아들 대소가 왕에게 말했다. “주몽은 사람이 낳지 않았으며, 그 사람됨이 용맹 하므로, 만일 일찍 처치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려우니, 청컨대 그를 없애버리소서.” 그러나 왕이 이를 듣지 않고, 주몽에게 말을 기르게 하였다.

 

<金蛙>有七子, 常與<朱蒙>遊戱, 其伎能皆不及<朱蒙>. 其長子<帶素>言於王曰: “<朱蒙>非人所生, 其爲人也勇, 若不早圖, 恐有後患, 請除之.” 王不聽, 使之養馬.

 

 

『삼국사기』「고구려본기」

  권 제13 '동명왕조'

 

>이 부분은 추모왕의 어릴 적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여기에서 부터 대소가 등장 하는데, 금와왕의 일곱 아들 중 맏형 이라고 하지요. 금와왕은 기록 상 으로선 주몽를 싫어하지는 않으나 약간 경계하는 듯한 느낌을 주긴 합니다. 그리고 대소는 애초부터 주몽을 싫어하여 처치하자고 까지 하였지요.

 

왕자와 여러 신하들은 주몽을 죽이려 하였다. 주몽의 어머니가 그들의 책략을 몰래 알아 내고 주몽에게 말했다. “사람들이 장차 너를 죽이려 한다. 너의 재능과 지략 이라면 어디 간들 살지 못하겠는가? 

 

여기에서 주저 하다가 해를 당하기 보다 차라리 멀리 가서 큰 일을 도모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에 주몽은 오이․마리․협보 등의 세 사람과 벗이 되어, 엄호수[개사수라고도 하는데, 현재의 압록강 동북방에 있다.]에 이르렀다.

 

王子及諸臣又謀殺之. <朱蒙>母陰知之, 告曰: “國人將害汝. 以汝才略, 何往而不可? 與其遲留而受辱, 不若遠適以有爲.” <朱蒙>乃與<鳥伊{烏伊}>������․<摩離>․<陜父>等三人爲友, 行至<淹淲水>[一名<盖斯水>, 在今<鴨綠>東北]. 

 

 

『삼국사기』「고구려본기」

 권 제13 '동명왕조'

 

> 결국 대소와 다른 형제들과 동 부여의 신하들은 주몽을 잡으려고 안달이 나지요. 그들은 주몽를 죽이려고 하였으며, 이에 주몽은 오이, 마리, 협보와 함께 동 부여를 빠져 나갑니다. 그리고 나서 졸본 부여로 향하게 되지요. 여기에서 성공하여 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14년 가을 8월, 왕의 어머니 유화가 동 부여에서 죽었다. 그곳의 왕 금와가 그를 태후의 예로 장례 지내고, 그의 신묘를 세웠다.

(十四年, 秋八月, 王母<柳花>薨於<東扶餘>. 其王<金蛙>以太后禮,)

 

 

『삼국사기』「고구려본기」

 권 제13 '동명왕조’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 부인은 결국 부여에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러자 금와왕이 그녀를 태후로서 대하고 장례를 치러 주지요. 이는 고구려의 주몽왕과의 외교적인 이유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금와왕이 뒤를 봐주던 유화 부인마저 죽게되자, 주몽의 본 부인인 예씨 부인과 유류(유리)는 위기를 느끼고 동 부여에서 빠져 나오게 되지요.

 

유리명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유리인데, 혹은 유류 라고도 하였다. 그는 주몽의 맏아들이다. 그의 어머니는 예씨이다. 예전에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에게 장가 들었는데 그녀에게 태기가 있었다. 그녀는 주몽이 떠난 뒤에 아이를 낳았는데 이 아이가 유리였다.

 

<瑠璃明王>立. 諱<類利>, 或云<孺留>. <朱蒙>元子, 母<禮>氏. 初, <朱蒙>在<扶餘>, 娶<禮>氏女有娠. <朱蒙>歸後乃生, 是爲<類利>. 

 

 

『삼국사기』「고구려본기」

 권 제13 '유리왕조'

 

>유류명왕에 대한 부분 입니다. 유류명왕은 이렇게 부여에서 자라났으며, 예 씨 부인과 함께 지냈었지요. 그러다가 추모왕의 부름을 받고 옥지, 구추, 도조와 함께 고구려로 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 추모왕은 숨을 거두게 되지요.

 

14년 봄 정월, 부여왕 대소가 사신을 보내와 방문하고, 인질의 교환을 요청하였다. 왕은 부여의 강대함을 두려워하여, 태자 도절을 인질로 보내려 하였다. 그러나 도절이 두려워하여 가지 않자 대소가 분개하였다. 

 

겨울 11월, 대소가 군사 5만을 거느리고 와서 침범 하였으나, 큰 눈이 내려 동사자가 많이 생기자 곧 돌아갔다.

 

十四年, 春正月, <扶餘>王<帶素>遣使來聘, 請交質子, 王憚<扶餘>强大, 欲以太子<都切>爲質, <都切>恐不行, <帶素>恚之. 冬十(-一)������月, <帶素>以兵五萬來侵, 大雪人多凍死, 乃去.

 

 

『삼국사기』「고구려본기」

 권 제13 '유리왕조'

 

>대소왕에 대한 기사가 나타 나는군요. 유리왕 14년 정도엔 이미 대소가 왕위에 올라 있습니다. 이 대소는 금와왕과는 달리 고구려에게 적대적으로 행동 하지요. 그래서 결국엔 군사를 이끌고 침공 하기마저 합니다. 

 

그러나 천행으로 눈이 많이 내렸기에 그만 물러나게 되지요. 허나 이 때 이 후로는 고구려와 동 부여의 관계가 급속도로 냉각됩니다. 32년 겨울 11월, 부여가 침범해왔다. 왕이 아들 무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이를 방어하게 하였다. 

 

무휼은 병력이 적어 대적할수 없음을 염려하여, 기묘한 계책을 내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산골 짜기에 숨어 기다리고 있었다. 부여 군사가 곧 바로 학반령 아래에 이르자, 숨겼던 군사를 출동시켜 불의의 공격을 하니, 부여 군사들이 크게 패하여 마필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무휼이 군사를 풀어 그들을 전부 죽여 버렸다.

 

三十二年, 冬十一月, <扶餘>人來侵. 王使子<無恤>, 率師禦之. <無恤>以兵小, 恐不能敵, 設奇計, 親率軍, 伏于山谷以待之. <扶餘>兵直至<鶴盤嶺>下, 伏兵發, 擊其不意, <扶餘>軍大敗, 棄馬登山. <無恤>縱兵盡殺之.

 

 

『삼국사기』「고구려본기」

 권 제13 '유리왕조'

 

>후에 또다시 동 부여는 고구려를 침입 합니다. 그러나 유류명왕의 아들인 무휼이 이들을 격퇴하지요. 무휼은 이로 인하여 그 실력을 인정받게 되고 어린 나이에 태자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 후에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이게 바로 대해 주류왕, 즉 대무신왕 입니다.

 

겨울 10월, 부여왕 대소가 사신을 통하여 붉은 까마귀를 보내왔다. 그 까마귀의 머리는 하나이고 몸은 둘이었다. 처음에 부여 사람이 이 까마귀를 얻어서 왕에게 바쳤는데, 어떤 사람이 부여 왕에게 “까마귀는 검은 법인데, 이제 빛이 변하여 붉게 되었고, 또한 머리는 하나인데 몸이 둘이니, 이는 두 나라가 병합될 징조입니다.

 

왕께서는 고구려를 합병함이 어떤가요?”라고 말하였다. 

대소가 기뻐하며 붉은 까마귀를 고구려에 보내면서, 동시에 이 사람이 한 말도 전하였다. 

 

왕이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고 부여왕에게 대답하기를 “검은 색은 북방의 색깔인데, 이제 변하여 남방의 색이 되었으며, 또한 붉은 까마귀는 상서로운 것인데, 그대가 이것을 얻었으나 가지지 못하고 나에게 보냈으니, 두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구나!”라고 하였다. 대소가 이 말을 듣고 놀라며 후회하였다.

 

 冬十月, <扶餘>王<帶素>遣使送赤烏, 一頭二身. 初, <扶餘>人得此烏獻之王, 或曰: “烏者黑也, 今變而爲赤, 又一頭二身, 幷二國之徵也, 王其兼<高句麗>乎?” <帶素>喜送之, 兼示或者之言. 王與群臣議答曰: “黑者, 北方之色, 今變而爲南方之色, 又赤烏瑞物也, 君得而不有之, 以送於我, 兩國存亡, 未可知也.” <帶素>聞之, 驚悔.

 

 

『삼국사기』「고구려본기」

 권 제14 '대무신왕조'

 

>대해주류왕의 뛰어남을 볼 수 있는 하나의 일화입니다. 사실 이로 인하여 동부여의 대소왕과 고구려의 대해주류왕의 사이가 어떤지를 잘 알 수 있겠지요. 이 당시 대해주류왕의 나이는 놀랍게도 13살입니다. 길을 떠나려 할 때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의 키는 9척 가량이었으며, 얼굴이 희고 눈에서 광채가 빛났다.

 

그는 왕에게 절을 하고 “저는 북명 사람 괴유입니다. 듣건대 대왕께서 북쪽으로 부여를 친다하니 제가 따라 가서 부여왕의 머리를 베어 오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왕이 기뻐하며 이를 허락하였다.

 

上道有一人, 身長九尺許, 面白而目有光. 拜王曰: “臣是<北溟>人<怪由>. 竊聞大王北伐<扶餘>, 臣請從行, 取<扶餘>王頭.” 王悅許之.

 

 

『삼국사기』「고구려본기」

 권 제14 '대무신왕조'

 

>괴유의 등장입니다. 몇몇 사람들은 아시겠지만 온라인 게임에 나오는 캐릭터인가요? 바람의 나라를 안해봐서 어떻게 나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 괴유가 대소를 죽이게 됩니다.

 

5년 봄 2월, 왕이 부여국 남쪽으로 진군하였다. 그곳에는 진흙 수렁이 많으므로 왕은 평지를 선택하여 병영을 만들고, 말안장을 풀고 병사들을 쉬게 하여, 두려 워 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도록 하였다.

 

부여 왕이 전국의 군사를 동원하여 출전하였다. 그는 고구려가 대비하지 않는 틈을 노려 기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말을 급히 몰아 진군하다가 진흙 수렁에 빠져서 앞으로 갈수도 뒤로 갈 수도 없게 되었다.

 

왕이 이 때 괴유를 출동시켰다. 괴유가 칼을 뽑아 들고 고함을 지르며 공격 해가니, 부여의 1만여 군졸들이 넘어지고 쓰러져서 버틸 수 없었다. 이 때 괴유가 곧 바로 전진하여 부여왕을 붙잡아 목을 베었다. 

 

五年, 春二月, 王進軍於<扶餘國>南, 其地多泥塗{淖}������, 王使擇平地爲營, 解鞍休卒, 無恐懼之態. <扶餘>王擧國出戰. 欲掩其不備, 策馬以前, 陷濘不能進退. 王於是揮<怪由>. <怪由>拔劍號吼擊之, 萬軍披靡, 不能支. 直進執<扶餘>王, 斬頭. 

 

 

『삼국사기』「고구려본기」

  권 제14 '대무신왕조'

 

>대소왕의 최후 입니다. 결국 대해 주류 왕과의 싸움에서 지게 되고, 죽음을 맞게 되지요. 이때 그의 목을 벤 것이 바로 괴유입니다. 이처럼 동 부여와 고구려는 "삼국사기" 에 따르면 초기부터 첨예하게 대립 합니다.

 

그러나 그 후에까지 동 부여가 보이는 것을 보아서, 이 때 동부여가 망했다고 보기는 왠지 석연찮은 점이 있지요. 그러니 이를 무조건적인 역사적 사실로 인식하기에는 약간의 조심성이 가해집니다.

 

MBC 드라마 '주몽'은 앞으로 어떻게 줄거리를 진행할지는 모르겠으나, 그에 대한 역사의 기록을 직접 보여주고자 하였습니다. 참고하십시오.  <끝>

 

출처 : 블로그 >운명과 흥망을 건 한판 승부[乾坤一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