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중국사(中國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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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촌(1) 2006. 8. 3. 19:00

■ 상탕왕(商湯王)

 

 

이름 이(履) 또는 천을(天乙) ·태을(太乙). 탕은 자이며, 성탕(成湯)이라고도 한다. 史記에 의하면 시조 설(契)의 14세에 해당한다. 商은 원래 夏의 속국이었는데 하왕조 말년 걸왕(桀王)이 학정을 하여 내부 모순이 극에 다달았으나 성탕은 유덕하여 백성들이 따르고 제후들의 대부분이 유덕(有德)한 성탕에게 복종하여 세력은 날로 증강하였다.


걸왕은 이를 눈치채고 성탕을 하대(夏臺)에 유폐하여 죽이려 하였으나, 재화와 교환하여 돌아온 후 하나라를 치기위한 준비를 하였다. 탕왕은 박에서 제후들을 소집하여 하나라 정벌이 청명임을 선포하고 현상(賢相) 이윤(伊尹) 등의 도움을 받아 걸왕을 명조(鳴條)에서 격파하였으며 걸왕은 남소에서 죽었다. 

 

성탕이 국호를 商이라 정하여 개국군주가 되었다. 탕이 즉위 후 관용으로 백성을 다스리니 국력이 강성하였다.

☀註>그가 걸왕을 멸한 행위는 유교에서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 주왕(紂王)을 토벌한 일과 함께, 올바른「혁명」 

  의 군사행동이라 불리고 있다. 「서경(書經)」의 탕서편(湯誓篇)은 그때의 군령(軍令)이라 전해진다.

 

一稱大乙、天乙、唐. 商王朝的第一代君王. 子姓. 商原?夏的屬國之一. 夏代末年,夏王室內部矛盾日趨尖銳. 成湯則在國內佈德施惠, 輕賦薄斂, 使百姓親附, 政令通行.商湯勢力日增,引起夏桀的注意,一度將湯囚於夏台. 湯返回國內後, 仍積極地作伐夏的準備.他在景這個地方召集諸候開會,申明他執行「天」的命令,必須征伐夏王朝. 以後他乘機發兵伐夏, 申明伐夏是受天之命.鳴條一戰,夏師敗績,夏桀奔南巢而死,成湯則成商代的第一位君王. 他位以後,「以寬治民國力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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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주왕(商紂王)

 

 

제을(帝乙)의 아들로 주(紂)라고도 한다. 夏나라 걸왕(桀王)과 더불어 중국 역사상 폭군의 대명사로 알려져 왔다.

수많이 저지른 악행중 달기와의「酒池肉林」「?烙의 刑」은 유명하다. 

 

商(殷)나라 마지막 왕으로 사기 은본기에는 「제을의 장자 미자계(微子啓)는 그 어미가 천한 출신이라 뒤를 잇지 못하고 차남 신이 정비 소생이니 뒤를 이었다. 제을이 죽고 신이 뒤를 이었으니 그가 제신이다. 사람들은 그를 주(紂: 포악하다는 의미)라 불렀다.」라 기록되어 있다.

 

제신은 힘이 장사이고 민첩했으며 문무 또한 겸비하여 수차례 동이족을 정벌하여 많은 노예와 재물을 획득했다. 그러나 사치스럽고 부패하여 사회모순을 가중시켰다. 문헌은 그가 즉위한 후 보물창고를 만들고 옥문을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신은 포악스럽고 간언을 듣지 않았을 뿐아니라 괴팍한 행동을 일삼아 미자(微子)가 떠나 갔고, 기자(箕子)가 천민이 되었으며, 비간(比干)은 간언하다 죽었다. 그는 천명을 타고나 하늘이 자신을 보호해 주어 멸하지 않을 것으로 스스로 믿고 있었다. 그러나 신하들이 주왕을 따르지 않고 백성들의 원망을 천하가 그를 이반하고 있었다.

 

주무왕은 오랫동안 준비한 끝에 주왕이 민심을 떠났다는 것을 보고 곧 군사를 일으켜 동진하여 목야(牧野)의 전쟁에서 주나라 武王에게 대패 당하고, 주왕은 정신없이 도망치다 녹대에서 스스로 불을 질러 타죽었다.

 

帝乙之子, 一稱紂, 是殷商王朝最後一個帝王.據《史記.殷本紀》記載:「帝乙長子曰微子,母賤,不得嗣. 少子辛, 辛母正后, 辛嗣. 帝乙崩, 子辛立,是帝辛,天下謂之紂」.帝辛勇力過人,反應敏捷,有文武才能. 曾多次征伐東夷, 獲得大量奴與財富.但他生活奢侈腐化,加劇了社會矛盾.據文獻記載,他位後,作瓊室,立玉門. 他橫徵暴斂, 行暴虐,不聽諫阻,一意孤行,致使微子去之,箕子以奴, 比干諫而死. 他自以上天會保佑他,說:「我生不有命在天乎」.以自己不會滅亡.但是,對於商王紂,大臣不親, 小民疾怨, 天下叛之. 周武王在經過長期準備之後,看到殷紂王已到了叛親離的地步,於是發兵東進.牧野之戰, 紂王的軍隊前徒倒戈, 他走投無路,到鹿台,自焚而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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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윤(伊尹)

 

 

이름은 집이고 아형이라고도 한다. 상나라 현신이다. 그는 지략이 뛰어나 하나라를 멸망시킬 때 큰 공을 세웠다. 상조 초기 탕왕부터 태갑(4대 왕)까지 줄 곧 상왕 조를 보필함으로서 국가정치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사기 은본기는 「帝 태갑이 즉위한 지 3년이 되었으나 현명치 못하고 포악스러우며 성탕법도 없애고 부덕하여 이윤이 그를 동궁(성탕의 묘가 있는 곳)으로 추방했다」고 적혀 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이윤이 태갑왕을 내쫒았다는 고사이다. 갑골문에 그를 축원하는 복사(卜辭)가 있는 점으로 보아 상왕 조에서 지위가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名摯,又名阿衡, 商湯之賢相.他具備運籌策劃的才能,在滅夏過程中起到重要的作用.他是商朝初年的元老, 自湯至太甲時一直是商王的輔佐大臣,在政治生活中起到了重要的作用.《史記.殷本紀》載:「帝太甲?立三年,不明,暴虐,不遵湯法,亂德,於是伊尹放之於桐宮」.這就是著名的伊尹放太甲的故事.甲骨文中有祀伊尹的卜辭, 可知他在商代的地位是高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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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箕子)

 

 

商나라 세명의 현인중의 한사람. 기(箕)나라의 군주로 주왕(紂王)의 친척이다. 

주왕이 교만하고 사치스럽고 음탕하여 기자가 간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어떤 사람이 그에게 떠날 것을 종용하였다.

 

그는 신하된 도리로 간언하여 군주가 듣지 않았다고 떠나는 것은 군왕의 악행을 부추키는 것으로 따를 수 없다하고 머리를 풀어 미친적 행세하고 스스로 천민이 되었다.


周무왕이 상나라를 멸한 후 기자를 찾아가 치국의 도를 구하고 그를 조선 땅에 봉하였다. 기자가 조선에서 폐허가 된 상나라 도읍터를 지나면서 그 폐허에 자란 보리가 팬 것을 보고 한탄하여 맥수의 노래를 지었는데 백성들이 듣고 모두 눈물을 흘리었다.

 

 ☀註 : 맥수지가(麥秀之歌) 또는 맥수지탄(麥秀之嘆)의 고사는 여기서 나왔다.

 

箕子箕國國君, 紂之親戚. 紂的生活驕奢淫逸, 箕子進諫,紂不聽. 有人勸他出走,他說作人臣, 因進諫不聽而出走, 是播揚君王之惡而自悅於民, 這種事情我不能做,於是箕子披髮佯狂而奴.周武王克殷後,曾訪問箕子,徵詢治國之道,將他封於朝鮮.箕子從朝鮮至周都朝拜時,路過殷墟,看到宮室壞,長滿禾黍, 傷感萬分, 乃作麥秀之詩.殷民聞之,皆流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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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간(比干)

 

 

商나라 세명의 현인중의 한사람으로 紂왕의 친척(숙부)이다. 사기 송미자세가에는 비간이 기자(箕子)가 간언을 듣지 않았다 하여 스스로 천민이 되었다는 것을 보고 「죽음으로서 간하지 않는다면 하물며 백성은 어떻겠는가」라 말했다고 적혀 있다.

 

비간은 계속하여 주(紂)왕에게 간언했다. 紂는 대로하여 「옛날부터 성인은 심장에 구멍이 7개나 있다는데 확인해 보자」며 그의 간을 도려내어 죽였다. 비간이 충간하다 죽은 것을 두고 후세사람들은 충의지사의 도(道)로 삼았다.

 

紂之親戚.《史記.宋微子世家》記載 : 比干「見箕子諫不聽而奴,則曰 : 『君有過而不以死爭,則百姓何辜!』 乃直言諫紂. 紂怒曰 :『吾聞聖人之心有七竅,信有諸乎』乃遂殺王子比干,視其心」. 比干忠諫被殺之事, 後代忠義之士所稱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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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자『微子(啓)』

 

 

이름은 계(啓)로 제을(帝乙)의 장남이나 그 모친이 천한 출신이라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미(微)에 봉해졌다. 계는 주(紂)왕(帝辛)의 이복형으로, 紂왕이 주색을 빠지고 관리들이 법을 어겨도 서로 비호해 주며 죄인들도 잡지못하는 등 정치가 부패하자 백성들이 불만을 품고 반란의 조짐을 보였다. 


이에 수차례 미자가 진언하였으나 紂왕은 듣지 아니하여 미자는 태사,소사와 상의하여 紂를 내쫒기로 결정하였다. 훗날 周 무왕이 주왕을 토벌했을 때 미자는 제사그릇을 들고 윗옷을 벗어 무릎으로 기어 무왕(武王)앞에 가니 무왕이 미자를 용서하고 복직시켜 주었다. 

 

무왕이 죽은 후 무경(武庚)과 관채(管蔡)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주공(周公 旦)은 성왕의 명을 받아 무경을 토벌하였고, 미자를 후임으로 은에 보내어 그곳에서 종묘에 제사를 지내게 하다가 송나라에 봉해졌다

☀註) 육단(肉袒): 사죄하기 위하여 윗옷을 벗는 것. 예법의 하나로 윗옷의 왼쪽 소매를 벗는 것을 袒免이라 함.

 

名,帝乙之長子, 因母賤, 不得嗣, 封于微.作帝辛的庶兄, 微子看到帝辛於酒色,不理政治,官吏相效犯法, 官官相護, 犯法的人又常常捉不到,政治腐敗,引起民的反抗, 數次向帝辛進諫.帝辛執意不聽,於是微子與太師、 少師商議後,決定離紂而去.周武王克殷後,微子持祭器,肉袒面縛,膝行於武王前,武王釋微子,復其位.武王死後, 武庚與管蔡作亂, 周公承成王之命誅武庚,命微子代殷後,奉其先祀,封於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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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경(盤庚)

 

 

반경(盤庚)은 은나라 19대 왕이였다. 염제 신농씨의 후예중 강씨 여인이 상나라 반경의 비가 되어 강씨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남적룡이라했다. 반경(盤庚)은 재능 있고 유능한 왕이었다. 당시 상 왕조의 도읍은 황하 북쪽에 있었다. 은나라에서는 반경 임금이 문물 부흥에 힘썼다.

 

반경은 찬란했던 상나라의 옛 영광을 되살리기 위해 다시 황하를 건너 성탕(成湯)의 고향인 박으로 도읍을 옮기고자 했다. 기원전 1402년(기해년) 은나라 19대 반경(盤庚) 즉위하여 수도를 "박"으로 삼았다. 

 

그때부터 은나라로 불렸다. 탕왕 상에 도읍한 후 여러 차례 천도해 탕왕에서 제18대 반경(盤庚) 때까지 다섯 차례나 도읍을 옮겼다고 한다. 은나라 반경(盤庚)왕 때, 이 지역을 북몽(北夢)이라 했고, 천도 이후부터는 은(殷)이라 했다고 한다.

 

반경이 신도읍의 주민에게 분발노력해서 위대한 국가의 운명과 인민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라고 격려하였다. 은허는 지금의 허난 성[河南省] 안양 시[安陽市] 샤오툰춘[小屯村]에 있다. 은나라는 반경(盤庚)으로부터 제신(帝辛)에 이르기까지(BC 1324~1065) 모두 이곳에 도읍을 세웠다.

 

이 무렵 은나라의 국운은 기울어져 있었다. 반경이 죽은 후부터 은나라의 도가 쇠하였다. 반경에서부터 3대째인 무정(武丁)이 제위에 올랐을 무렵 국력은 또다시 쇠퇴일로를 걷게 된다.

 

1928년 이후 몇 차례 발굴을 거쳐 은 갑골은 10만개 이상이었으며, 그 중 대부분은 상(商)왕조 후반 반경(盤庚)이그 중 대부분은 상(商)왕조 후반 반경이 엄(奄)에서 은(殷)으로 수도를 옮긴 이후부터 폭군(暴君)으로 알려진 상대(商代)의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에 이르기까지 약 273년 간 사용되었던 것으로, 시기는 대략 기원전 13~11세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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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열(傅說)

 

 

상나라 무정(고종) 때 현신(賢臣). 원래 죄수였으나 무정에게 발견되어 중용되었다. 사기 은본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무정이 즉위하여 다시 나라를 일으키려고 생각했지만 보좌해 줄 만한 사람을 찾지 못했다. 

 

어느날 꿈속에서 성인을 보았는데 이름이 열(說)이라고 했다. 꿈에서 본 인상을 가지고 군신,백관들을 관찰했는데 모두 아니었다. 그래서 비슷한 얼굴을 그려서 민가에서 찾게 했더니 부험(傅險) 가운데서 열을 찾아냈다. 이 때 열은 죄를 짓고 부험에서 축을 쌓는 노역을 하고 있었다. 

 

무정에게 보였더니 무정이 바로 그사람이라 했다. 대화를 해보니 과연 성인이었다. 그를 재사으로 등용했더니 은은 잘 다스려졌다. 그래서 부험의 성을 따 이름을 부열(傅說)이라 하였다.」부열은 모든 힘을 다하여 무정을 보좌함으로서 상왕조 국력을 크게 증강시켜 번영하게 되었다.

 

武丁賢相. 他原刑徒,被武丁發現後,加以重用.《史記.殷本紀》記載:「帝武丁位,思復興殷,而未得其佐」. 後來「武丁夜夢得聖人,名曰說.以夢所見視群臣百吏,皆非也.於是使百工營求之野, 得說於傅險中. 是時說胥靡,築於傅險.見於武丁,武丁曰是也.得而與之語,果聖人,以相,殷國大治. 故遂以傅險姓之, 號曰傅說」.傅說居相位,全力輔佐武丁,使商王朝的國力大增,出現了穩定發展的繁榮局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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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기(妲己)

 

 

자(字) 달(妲). 성(姓) 기(己)이다. 상(商)나라 유소(有蘇: 지금의 해남 海南 온현 溫縣) 출신으로 상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의 비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주왕은 학정(虐政)을 간(諫)하는 현신(賢臣)의 말은 듣지 않고 달기의 말만 잘 들었다고 한다.


주왕과 달기는 사람들에게 잔인한 형벌을 가하는 것을 즐겼다고 하는데 구리 기둥에 기름을 발라 숯불 위에 걸쳐 놓고 죄인으로 하여금 그 위를 걷게 하여 미끄러져서 타 죽게 하는 포락(炮烙)의 형을 구경하면서 웃고 즐기거나 돈분(躉盆)이란 형을 만들어 죄수들을 구덩이에 독사와 전갈을 집어넣고 그들이 괴로워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충신 비간(比干)이 죽음을 당한 일도 달기의 교사(敎唆) 때문이라고 하는데 달기는 주왕에게 자신의 심장병이 나으려면 비간의 심장을 먹어야 한다고 했고 이것를 들은 주왕이 충신 비간을 죽였다 한다. 

 

또한 '주지육림(酒池肉林)'이란 말도 연못을 술로 채우고 고기를 숲처럼 매달아 놓고 즐기던 주왕과 달기의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유흥행위에서 나왔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러한 달기에 대한 이야기는 대부분 야사들을 기록한 소설들에서 나온 것이며 은허에서 출토된 상나라의 유물에서도 달기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었다. 따라서 달기가 실존인물 인지 아니면 상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가 왕조 창건의 타당성을 목적으로 상나라의 주왕을 깎아내리기 위해 만든 상상의 인물인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달기가 죽은 시기도 기록에 따라 다른데 ≪사기(史記)≫에서는 "주왕이 녹대에서 뛰어내려 분신자살한 후에 달기는 주(周) 무왕(武王)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하였다" 고 했으나 ≪세설신어(世說新語)≫에서는 "공융(孔融)의 말을 인용하여 주나라 군대가 조가(朝歌)에 진입한 후에 주공(周公)이 달기를 취하여 그의 시녀로 삼았다고 하였다"고 나와있다. 

 

여하튼 그 실재여부를 떠나 달기는 주나라 유왕(幽王)의 애비(愛妃)인 포사(褒姒)와 함께 중국 역사상 음란하고 잔인한 대표적인 독부(毒婦)로 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달기[妲己]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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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호[歸好- 商武丁妃]

 

 

1976년 하남 안양에서 발굴된 은허에서 상나라 왕 무정의 왕비 귀호의 묘가 발견되었다.


1976年河南安陽的殷墟發現了商王武丁妃「歸好」的墓. 其中有「登歸好三千,登旅萬乎伐羌」的卜辭.在出土的文物中, 還發現有兩把「歸好」的銅戎,每把重達八、九公斤, 這在商朝事王權和軍權的象徵. 「歸好」是商朝著名的中興君主「武丁」的妃子之一. 有較高的文化修養,商王命?主持祭祀,通讀祭文,竝被認命卜官, 在出土的甲骨文中, 有些是出由歸好的手刻. 是商武丁是的一位女政治家. 「歸好」還是一位軍事家,多次帶兵出征, 立下赫赫戰功.曾帶兵多達一萬三千多人伐羌、夷、土方等族. 擁有自己的封地,常向商王進貢. 「歸好」死後,武丁十分悲痛, 每有兵事,常常祭祀「歸好」的在天之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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