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 886

김선달과 여사공

■ 김선달과 여사공 천하를 유랑하던 김선달, 어느날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게 되었는데...사공은 30대 젊은 여자였다. 강 한가운데쯤 왔을 때 농담을 좋아하던 김선달이「여보, 마누라!」하고 불렀다. 여 사공은 당황하여「보아하니 점잖으신 선비양반 같은데 어째서 초면인 나를 마누라라 하는 겁니까?」 「여보시오, 내가 당신 배 위에 올라탔으니, 당신은 내 마누라가 아니고 누구란 말이요?」 여 사공은 아무 대꾸도 없이 노만 젓더니 어느덧 배는 강가에 닿았다. 김선달이 배에서 내려 서너 발자국 걸어 갈때쯤 여 사공이「얘 아들아, 잘 가거라!」깜짝 놀란 김선달이 돌아서 삿대질하며 큰소리로「아니, 여보시오. 내 나이 지금 40줄인데 어째 내가 당신 아들이란 말이요?」 「잘 생각해보거라, 이놈아! 네가 지금 내 뱃속..

평양에서 내려온 국보들

북녁에서 내려온 국보들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이건무)에서는 "북녘의 문화유산-평양에서 온 국보들"이란 제하의 ’특별전이 지난 2006년 6월 13일 부터 8월 16일 까지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북한이 소장하고 있는 구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문화재들 중 엄선된 90점의 유물들을 가져와 전시한 유물들 중에는 북한의 국보50점과 우리나라 보물에 해당하는 준국보 11점이 포함되어있다. 남과 북으로 분리된 이후 북쪽의 유물이 공식적으로 내려와 전시된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는 것에 이번 전시는 그 의미가 남다르다고 할수있다. 전시된 유물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그동안 교과서에서만 볼수있었던 평양시 상원군 검은모루 출토의 구석기가 있다. 한 진열장에 나란히 전시되어 있는 이 유물은 찌르개, 뗀석기, 주먹 도끼..

발해 화폐로 추정되는 금화 첫공개.

2006년 10월 4일 (수) 07:22 세계일보 [단독]발해 화폐로 추정되는 금화 첫 공개 발해 때 제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금화가 발견됐다. 발해사를 전공한 서병국 대진대 사학과 교수는 3일 “한 국내 소장가로부터 최근 전달받은 5점의 ‘발해통보(渤海通寶)’ 감정 결과 발해의 금속화폐로 판정됐다”고 밝혔다. 서 교수는 “그동안 존재했을 것으로만 추정되던 발해 화폐의 실체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다음주 중 언론과 학계에 공개해 후속검증 절차를 밟겠다”고 덧붙였다. 발해 수도였던 상경성(중국 흑룡강성 영안시 발해진)에서 1930년대 출토된 것으로 추정되는 금속화폐에는 ‘발해통보’와 ‘천통팔년(天統捌年)’이라는 명문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팔(八)자와 뜻과 음이 같은 팔(捌)자는 중국의 강희자전..

광개토대왕비문 조작(廣開土大王碑文造作)

■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는 우리 역사상 최고의 정복군주, 가장 위대한 고구려의 왕으로 칭송받는 고구려 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로서 높이가 6.39m에 이르고 무게가 37톤으로 추정되는 세계적 규모를 지니고 있다.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사후2년)이 세웠으며 높이만 3층 건물과 맞먹고, 방추형의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비석의 배면 너비는 1.46미터, 1.35미터 2미터 1.48미터로 각 면이 다른 크기와 문양을 지니고 있다. 땅에 비석을 고정시켜 주는 대석과 비문을 새겨진 비신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대석은 길이 3.35m, 너비 2.7m의 불규칙한 직사각형이고, 두께는 약 20cm이나 고르지 않으며 비신에는 총 1775자의 비문이 음각되어 있다. 개석 (蓋石)이 없는..

삼국유사 발문(跋文) - 慶州府尹 李繼福

이계복(李繼福)의 삼국유사 발문(跋文) 우리 동방 삼국(三國)의 본사(本史)나 유사(遺事) 두 책이 딴 곳에서는 간행된 것이 없고 오직 본부(本府)에만 있었다. 세월이 오래 되매 완결(완缺)되어 한 줄에 알아볼 수 있는 것이 겨우 4, 5 자밖에 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건대, 선비가 이 세상에 나서 여러 역사책을 두루 보고 천하의 치란(治亂)과 흥망(興亡), 그리고 모든 이상한 사적에 대해서 오히려 그 견식을 넓히려 하는 것인데, 하물며 이 나라에 살면서 그 나라의 일을 알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이에 이 책을 다시 간행하려 하여 완본(完本)을 널리 구하기를 몇 해가 되어도 이를 얻지 못했다. 그것은 일찍이 이 책이 세상에 드물게 유포되어 사람들이 쉽게 얻어 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지금 ..

신라육성(新羅六姓)

삼국사기 1권 신라본기 ■ 신라 육촌장 사당(양산재) ●육부촌장 시조 탄강지(六部村長 始祖 誕降地) 순위 지역명(地域名) 시조명(始祖名) 탄강지(誕降地) 성씨 첫째 양산촌장(楊山村長) 알평(謁平) 표암봉(瓢巖峰) 李氏 둘째 돌산고허촌장(突山高墟忖 소벌도리(蘇伐道理) 형산(兄山) 崔氏 셋째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 구례마(俱禮馬) 이산(伊山) 孫氏 넷째 취산진지촌장(觜山珍支村) 지백호(智伯虎) 화산(花山) 鄭氏 다섯째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 지타(祗沱) 명활산(明活山) 裵氏 여섯째 명활산고야촌(明活山高耶村) 호진(虎珍) 금강산(金剛山) 薛氏 전한(前漢) 무제(武帝) 원수(元狩) 6년 갑자(甲子: 서기전 117)에 하늘에서 육대인(六大人)을 경주(慶州) 땅에 탄강(誕降)시켜 육촌(六村)의 장(長)을 삼았다. ..

조선 마지막 황실의 참상.

조선 마지막 황실의 참상 현재의 우리 황실은 일제침략자들이 원하던 대로 철저히 궤멸되어 비참한 상태에 있다. 심지어 공산국가의 모택동까지도, 더군다나 이민족인 만주족 황족들이었던 청나라 황실을 완벽하게 보호하고 예우를 했는데, 일제 침략자들이 망친 황실을 보호는 커녕 이승만이 선봉에 서서 짓밟았으니 황실도 망하고, 역사도 엉망이 되고, 민족의 뿌리도 심각히 흔들리는 비참한 상태가 되었다. 특히 더욱 비참하고 안타까운 것은 현재까지도 이승만의 아류들이 꽤 있어서 황실은 더욱 비참해지고 있음이다. 현재의 황실은 크게 몇 가지 형태로 잔존되고 있다. 첫째는 도피형이다. 많은 황손이 황실질서의 거센 흐름 속에 하나, 둘 고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미국 등에서 하층 민으로 비참하게 생존하고 있다. 둘째는 은둔형..

방덕(龐悳)

■ 방덕전(龐悳傳) 위(魏)나라 장군 방덕(龐悳)은 자가 영명(令明)이고 남안군(南安郡) 훤도현 사람이다. 젊었을 때 군리(郡吏)와 주(州)의 종사(從事)가 되었다. 초평 연간, 마등(馬騰)을 따라 모한반 강족(羌簇)과 저족을 공격하여 여러 차례 공을 세웠으므로 교위까지 승진했다. 건안 연간, 조가 여양에서 원담과 원상을 토벌하였을 때, 원담은 곽원(郭援)?고간(高幹) 등을 보내 하동을 공격해 점거하였고, 조조는 종요로 하여금 관중(關中)의 여러 장수들을 통솔하게 하여 그들을 토벌했다. 방덕은 마등의 아들 마초(馬超)를 따라 평양에서 곽원과 고간을 방어했는데, 방덕이 선봉에 서서 곽원과 고간을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무찔렀으면, 직접 곽원의 머리를 베었다. 중랑장에 임명되고, 도정후(都亭侯)로 봉해졌다. ..

삼복(三伏)

■ 삼복(三伏) 삼복(三伏)은 음력(陰曆)의 개념이 아닌 양력(陽曆)의 개념을 적용한 것으로 초복(初伏)은 하지(夏至)로 부터 세번째 돌아오는 경일(庚日)이고, 중복(中伏)은 네번째 경일(庚日)이며, 말복(末伏)은 입추(立秋)로 부터 첫번째 경일(庚日)이다. 그리고 경일(庚日)이란 60 甲子 중에서 경(庚)자로 시작되는 날을 말합니다. 그런데 삼복과 관련하여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 조선의 정조와 순조 시대의 학자인 홍석모의 저서를 말함)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복(伏)날 먹는 음식으로 개를 푹 삶아 파를넣고 끓인것을 개장이라하고 하는데 이것에 닭이나 죽순을 넣으면 더욱 좋고 또 개국에 고추가루를 타서 밥을 말아 시절(계절)음식으로 먹고 땀을 흘리고 나면 더위를 물리 치게되며 또한 몸이 허한것을 보강..

상탕왕,상주왕,이윤,기자,비간 ,미자,반경,부열,달기,

■ 상탕왕(商湯王) 이름 이(履) 또는 천을(天乙) ·태을(太乙). 탕은 자이며, 성탕(成湯)이라고도 한다. 史記에 의하면 시조 설(契)의 14세에 해당한다. 商은 원래 夏의 속국이었는데 하왕조 말년 걸왕(桀王)이 학정을 하여 내부 모순이 극에 다달았으나 성탕은 유덕하여 백성들이 따르고 제후들의 대부분이 유덕(有德)한 성탕에게 복종하여 세력은 날로 증강하였다. 걸왕은 이를 눈치채고 성탕을 하대(夏臺)에 유폐하여 죽이려 하였으나, 재화와 교환하여 돌아온 후 하나라를 치기위한 준비를 하였다. 탕왕은 박에서 제후들을 소집하여 하나라 정벌이 청명임을 선포하고 현상(賢相) 이윤(伊尹) 등의 도움을 받아 걸왕을 명조(鳴條)에서 격파하였으며 걸왕은 남소에서 죽었다. 성탕이 국호를 商이라 정하여 개국군주가 되었다. 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