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1권 신라본기
■ 신라 육촌장 사당(양산재)
●육부촌장 시조 탄강지(六部村長 始祖 誕降地)
순위 | 지역명(地域名) | 시조명(始祖名) | 탄강지(誕降地) | 성씨 |
첫째 | 양산촌장(楊山村長) | 알평(謁平) | 표암봉(瓢巖峰) | 李氏 |
둘째 | 돌산고허촌장(突山高墟忖 | 소벌도리(蘇伐道理) | 형산(兄山) | 崔氏 |
셋째 |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 | 구례마(俱禮馬) | 이산(伊山) | 孫氏 |
넷째 | 취산진지촌장(觜山珍支村) | 지백호(智伯虎) | 화산(花山) | 鄭氏 |
다섯째 |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 | 지타(祗沱) | 명활산(明活山) | 裵氏 |
여섯째 | 명활산고야촌(明活山高耶村) | 호진(虎珍) | 금강산(金剛山) | 薛氏 |
전한(前漢) 무제(武帝) 원수(元狩) 6년 갑자(甲子: 서기전 117)에 하늘에서 육대인(六大人)을 경주(慶州) 땅에 탄강(誕降)시켜 육촌(六村)의 장(長)을 삼았다.
●법흥왕[신라 23대 임금] 3년 병신[단기 2849년=서기 536년]에 육부장에게 시호를 추증하였다.
구분(區分) | 성씨(姓氏) | 시조명(始祖名) | 자(字) | 시호(諡號) |
양산부(楊山部) | 이씨(李氏) | 알평(謁平) | 천서(天瑞) | 문선(文宣) |
고허부(高墟部) | 최씨(崔氏) | 소벌도리(蘇伐道理) | 당운(當雲) | 충선(忠宣) |
대수부(大樹部) | 손씨(孫氏) | 구례마(俱禮馬) | 경운(景雲) | 충렬(忠烈) |
진지부(珍地部) | 정씨(鄭氏) | 지백호(智伯虎) | 인세(仁世) | 문화(文和) |
가리부(加利部) | 배씨(裵氏) | 지타(祗沱) | 즙문(葺文) | 문양(文讓) |
명활부(明活部) | 설씨(薛氏) | 호진(虎珍) | 백양(白楊) | 무신(武信) |
●태종무열왕[신라 29대 왕] 3년 병진[단기 2989년=서기 656년]에 육부장을 왕으로 추봉 하였다,
순 위 | 성 씨 | 시조명 | 왕 위 명 | 기 타 |
첫째 | 이씨(李氏) | 알평(謁平) | 은렬왕(恩烈王) | |
둘째 | 최씨(崔氏) | 소벌도리(蘇伐道理) | 문렬왕(文烈王) | |
셋째 | 손씨(孫氏) | 구례마(俱禮馬) | 문의왕(文義王) | |
넷째 | 정씨(鄭氏) | 지백호(智伯虎) | 감문왕(甘文王) | |
다섯째 | 배씨(裵氏 | 지타(祗沱) | 장렬왕(壯烈王) | |
여섯째 | 설씨(薛氏) | 호진(虎珍) | 장무왕(壯武王) |
↑위의 신라 여섯 성씨 시조분을 일컬어 6대인 즉 육촌장이라 부른다.
●입 군왕[임금을 세움]
전한 선제 지절 원년 임자[단기 2260년=서기 28년] 3월 1일에 여섯 분의 촌장과 더불어 양산기슭의 나정에 모였
다가 숲 사이에 흰말이 구부려 절하는 모양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가보니, 흰 말은 보이지 않고 박[표주박] 같이 생
긴 큰 알이 있어 깨어 보니 어린아이가 있었다.
이 점을 이상이 여긴 육촌장은 이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이 아이가 13세가 됨에 모든 것이 우뚝하였다.
그 아이의 태어 남이 신기하여 육 대인은 그 아이를 세워 임금을 삼고 나라 이름을 서라벌이라 하니,
즉 혁거세이다.
육촌장이 모두 좌명공신[천명을 받아 임금이 될 사람을 도운 공로가 있는 사람]이 되니 이때가 전한 선제 오봉 원
년 갑자[단기 2277년=서기전 57년] 여름 4월이다,
●사성(나라에서 성을 내려주는 것)
유리왕[신라 제 3대 왕]9년 임진[단기 2365년-서기 32년] 봄 에 부명을 고칠 때에 육 대인의 후손들에게 성을 하
사함.
○양산부를 급양부로 고치고 성을 이씨로 주고
○고 허부를 사량부로 고치고 성을 최씨로 주고
○대수부를 점양부(또눈 모량)로 고치고 성을 손씨로 주고
○진지부를 본 피부로 고치고 성을 정씨로 주고
○가리 부를 한 지부로 고치고 성을 배씨로 주고
○명활 부를 습 비부로 고치고 성을 설씨로 주었다
●증시[임금이 시호를 내림] 및 추봉[나중에 봉함]
법흥왕[신라 22대 임금] 3년 병신[단기 2849년=서기 516년]에 육 부장에게 시호를 추증하였다.
○알평의 자는 천서니 시호는 문선(文宣)이고 은열왕으로 봉하였다.
○소벌도리의 자는 당운이니 시호는 충선이고 문열왕으로 봉 하였다.
○구레마의 자는 경운이니 시호는 충렬이고 문의왕으로 봉하였다,
○지백호의 자는 인세이니 시호는 문화이고 감문왕으로 봉하였다,
○지타의 자는 즙문이니 시호는 문양이고 장렬왕으로 봉하였다,
○호진의 자는 백양이니 시호는 무신이고 장무왕으로 봉하였다,
●철향[충의와 도덕을 기리는 서원 사당에 배양함]
광복 후 24년 신해[서기 1971년]에 경주의 관민이 육촌장의 개국[나라를 세움]의 공을 기리는 뜻에서 경주시 탑
정동 나정리에 촌장각을 세워 묘는 입덕묘라고 하고 재는[제사] 양산재라 하고 육촌장을 철향하니 그 위차는
○첫째 알천 양산 촌장이고
○둘째는 돌산 고허 촌장이고
○셋째는 취산 진지 촌장이고
○넷째는 무산 대수 촌장이고
○다섯째는 금산 가리 촌장이고
○여섯째는 명활산 고야 촌장이다, 제사의 이름은 신라 대제라 하니 음력 8월 17일이다,
[참고]
상고하건대 취산 진지촌이 육촌에 있어서 삼국사기에는 셋째로 기록되었고 삼국유사에는 넷째로 기록되었는데 이제 입덕 묘의 철향[서원 사당] 위차에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버리고 삼국사기의 기록을 취하니 대개 유림의 중의를 쫓을 뿐이 아니라 또 삼국사기가 정사인 점을 중의 여긴 것이다,
●증거 : 삼국사기[신라 본기 시조 혁거세조]
시조의 성은 박씨이고 이름은 혁 거세이다, 전한 효 선제 오봉 원년 갑자[단기 4377년 서기전 57년] 4월 병진 날
[혹은 정월 15일이라고도 함]에 즉위[임금이 왕위에 오른 것]하여 왕호를 거서간[귀인을 일 커는 뜻이다]이라 하
고 그때 나이 13세로 나라의 서라벌이라 하였다,
일찍이 조선의 유민들이 이곳에 와서 산곡 간에 헤어저 여섯 촌락을 이루었다,
○첫째는 알천의 양산촌이고
○둘째는 돌산의 고허촌이고
○셋째는 취산의 진지촌이고
○넷째는 무산의 대수촌이고
○다섯째는 금산의 가리촌이고
○여섯째는 명활산의 고야촌이란 것이니 진한의 육부이었다,
고허 촌장 소벌 공이 하루는 양산 밑 나정 곁에 있는 숲 사이를 바라본 즉 말이 무릎을 꿇고 울고 있는지라 가보니
말은 간데없고 다만 있는 것은 큰 알 뿐이었다, 알을 깨어 보니 한 어린아이가 거기서 나왔다,
곧 소벌 공이 데려다가 길렀더니 나이 10여 세가 되매 유달리 솟아나게 일찍 되었다,육부 사람들은 그 아이의 출
생이 이상하였던 까닭에 높이 받들더니 이때에 이르러 그를 세워 임금을 삼았다, 진인(진나라 사람)은 박(표주박)
을 박씨라 함에 처음 큰 알이 박과 같아 하여 박으로써 성을 삼았았다, 거서간은 진인의 말에 왕이란 뜻이다,
●삼국사기(신라 본조 유리 마사 금조)
육부의 이름을 고치고 성씨를 줄 때,
○양산부를 급양부로 하고 이씨를 주고,
○고허부를 사양부로 하고 최씨를 주고,
○대수부를 점양부로 하고 손씨를 주고,
○진지부를 본피 부로 하고 정씨로 주고,
○가리 부를 한 지부로 하고 배씨로 주고,
○명활 부를 습 비부로 하고 설씨를 주다, 이때는 유리왕 9년 임진(단기 2365년) 봄이다,
●삼국유사
진한 땅(진한은 본래 진나라 사람이 난리를 피하여 들어오니 한에서 땅을 떼여 주었으니 이것을 진한이라 뒤에 신
라의 서울이 되었으니 지금의 경주이다)에 육촌이 있으니,
○첫째는 알천 양산 촌장 알평이니 처음 표암봉에 내려와서 급양부 이씨의 조상이 되고,
○둘째는 돌산 고허촌장 소벌도리니 처음 형산에 내려와서 사양부 최씨의 조상이 되고,
○셋째는 무산 대수 촌장 구례마이니 처음 이산에 내려와서 손씨의 조상이 되고,
○넷째는 취산 진지촌 장 지백호니 처음 화산에 내려와서 정씨의 조상이 되고,
○ 다섯째는 금산가리촌장 지타니 처음 명활산에 내려와서 배씨의 조상이 되고,
○여섯째는 명활산 고야촌장 호진이니 처음 금강산에 내려와서 설씨의 조상이 되었다,
●동국사
조선 백성이 동해 가에 헤어저 육촌으로 나누어 살았으니 이것이 진한이다, 전한 선재 오동 원년 갑자{단기 2277
년}에 육부의 장이 알천 언덕에 모여 의논하되 우리들이 임금이 없어니, 덕이 있는 사람으로 임금을 세우자 하고
양산촌장 알천 등이 혁거세을 세워 임금을 삼고 진한(경주) 땅에 서울을 정하였다,
유리왕 9년 임진{단기2365년}에 육부의 이름을 고치고 성씨를 줄 때,
○급양부를 이씨로,
○사양부를 최씨로,
○모양부를 손씨로,
○진지부를 정씨로,
○가리부를 배씨로,
○명활부를 설씨로 주니 이것을 신라 육부대성 이라고 한다.
여기 까지가《육대인》께서 처음으로 성씨을 부여받고 왕위를 진였던 기록입니다,
그리고 《혁거세》와의 동조상부 즉 육대인 과 혁거세 와의 두터운 친분관계가 형성 되어 있다는 기록 이기도 합
니다.
●경주 양산재(慶州楊山齋)
↑新羅六村長의 神位를 모셔 놓은 慶州 楊山齋의 立德廟의 내부
(소재지:경북 경주시 탑동 690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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