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역사이야기

노론의 천주교 탄압 요구, 문체반정 앞세워 정면 돌파

야촌(1) 2010. 11. 13. 23:45

작성일 : 2010. 11. 03

 

노론의 천주교 탄압 요구, 문체반정 앞세워 정면 돌파

 

이덕일의 事思史 : 조선 왕을 말하다

[제172호] 20100626 입력

 

내세관이 없는 유학은 종교가 아니라 모든 보편적 종교와 공존이 가능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문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노론 유학자들은 유학(주자학)을 유교라는 유일사상의 종교로 만들었다.

 

노론 정권 유지의 이념이 된 유교는 다른 모든 사상을 이단으로 몰아 탄압했다.

이런 유일사상의 나라 한 구석에서 자생적으로 천주교가 자라고 있었다.

 

전주 전동성당은 윤지충과 권상연이 사형당한 전주 풍남문에 세워졌다.

    1891년에 대지를 매입하고 1908년 착공해 6년 만에 준공했다. <사진가 권태균>

 

성공한 국왕들 정조

④북경서 세례받은 이승훈

 

정조 7년(1783) 12월 이승훈(李承薰)은 북경에 도착했다.

동지사 황인점(黃仁點)의 서장관(書狀官)이 된 아버지 이동욱(李東郁)을 따라간 여행이었다.

부친에게는 견문을 넓힌다는 명분을 댔지만 속내는 따로 있었다. 정약용의 자형(姉兄)이기도 한 이승훈은 먼저 북경의 북천주당(北堂)을 찾았다.

 

그라몽(J.J. de Grammont: 중국명 梁棟林) 신부는 선교사가 파견되지 않은 나라에서 온 젊은이가 영세를 받겠다고 요청하자 깜짝 놀랐다. 이듬해 초 이승훈은 베드로(Peter)라는 영세명을 받고 십자가를 비롯한 천주교 성물들, 그리고 천주교와 과학서적 등을 가지고 귀국했다.

조선에는 이미 이벽(李蘗)이 지도하는 자생적인 천주교 조직이 있었다.

주자학 유일사상의 나라에서 선교사가 파견되기 전에 자발적으로 천주교가 수용된 것이다.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의 처남이기도 한 이벽의 고조부 이경상이 심양에서 소현세자를 모셨다.

이런 인연으로 천주교 서적 일부가 집안에 전해져 왔는데 이를 통해 이벽은 천주교를 접했다.

 

이벽은 천주공경가(天主恭敬歌)에서

“집안에는 어른 있고 나라에는 임금 있네.

 

네 몸에는 영혼 있고 하늘에는 천주 있네.

부모에게 효도하고 임금에겐 충성하네”

 

라고 노래해 천주교 신앙과 유교의 충효는 서로 배치되지 않는 개념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천주교를 받아들였던 대부분의 남인가 자제들도 마찬가지였다.

 

정조가 재위 2년(1778) 초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이가환(李家煥)과 더불어 예수교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이마두), 아담 샬(J. Adam Shall: 탕약망)에 대해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눌 정도로 서학(西學)은 비밀도 아니었다.

남인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성호 이익은 서학 중 천문·지리·수학·역법 등의 과학이론은 받아들였지만 천주교 교리는 불교와 같다고 보고 배격했다. 이익은 생전에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를 보고 “그 학(學)이 오로지 천주를 숭배했는데 천주란 것은 유교의 상제(上帝)에 해당하는 것이며…예수는 서쪽나라의 말로 구세(救世)란 뜻이다”라고 썼다.

 

↑이승훈이 정조 때 스스로 찾아가 영세 받기를 요청했던 북경 북천주당.

 

서학이 양반 사대부들 중에 근기(近畿) 남인들에게 주로 받아들여진 데는 정치·사회적 배경이 있었다. 조선 후기 일당독재 체제를 구축한 노론은 성리학(주자학)을 절대권력을 배타적·독점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지배도구로 만들었다.

 

그 결과 중국에선 유학의 주류 중 하나로 통하는 양명학(陽明學)까지 이단으로 몰았다. 반면 현실에서 소외된 남인들은 성리학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다른 세계관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었다. 남인 신서파(信西派=천주교를 받아들인 남인)는 중인이나 평민들에게도 교리를 전파했다.

 

이벽이 최창현(崔昌顯)·최인길(崔仁吉)·김종교(金宗敎)·김범우(金範禹)·지황(池璜) 등의 중인들에게 전파하고, 황사영이 유명한 백서(帛書)에서 “(정약종은) 일찍이 무식한 교우들을 위하여 이 나라의 한글로 주교요지(主敎要旨) 두 권을 저술했다”고 쓴 대로 평민들에게도 전파했다. 천주교 조직은 이승훈이 영세를 받고 귀국한 후 빠른 속도로 그 세를 확장했다.

이런 와중에 발생한 사건이 정조 9년(1785)의 ‘을사추조(乙巳秋曹) 적발사건’이었다.

정조 9년(1785) 봄 추조(秋曹:형조)의 금리(禁吏)들이 명례방(明禮坊=서울 명동)의 중인 김범우의 집에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것을 수상쩍게 여겨 도박장 단속 차원에서 들이닥쳤다.

 

그러나 그곳은 도박장이 아니라 이벽의 주재로 이승훈과 권일신·권상학 부자, 정약전·정약종 형제 등의 양반들과 다수의 중인들이 예배를 보는 현장이었다. 형조판서 김화진(金華鎭)은 정조가 천주교에 유화적이라는 사실을 감안해 중인 김범우만 충청도 단양으로 유배 보내고 천주교 서적 소각령을 내리는 선에서 마무리 지었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성균관 태학생들을 중심으로 반(反)천주교 운동이 일어났다.

유학자들은 국법으로 천주교를 금하고 형조 같은 국가기관이 나서 천주교도들을 색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정조는 천주교 탄압 주장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정학(正學:성리학)이 밝아져서 사학(邪學:천주교)이 종식되면 상도(常道)를 벗어난 이런 책들은 없애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져서 사람들이 그 책을 연초(燕楚)의 잡담만도 못하게 볼 것이다…조정에서 이 일에 많은 힘을 쓸 필요가 없다. (정조실록 12년 8월 6일)”

정조는 성리학자들이 제구실을 하면 천주교는 자연히 없어질 것이라는 논리로 천주교가 성행하는 책임을 성리학자들에게 되돌렸다. 성리학자들이 성현(聖賢)의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에 천주교가 창궐한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정조의 이런 유화책은 재위 15년(1791) 전라도 진산(珍山)에서 진사 윤지충(尹持忠)과 그의 내외종 사촌 권상연(權尙然)이 조상의 제사를 폐지하고 부모의 위패(位牌)를 불태운(廢祭焚主) ‘진산 사건’이 발생하면서 위기에 봉착했다.

 

사건 발생 초기 채제공은 진산 군수 신사원(申史源)이 형에게 신주소각설은 잘못 전해진 것이라는 편지를 썼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서 정조에게 “장례 때 가난한 자는 형편상 예를 제대로 갖추지 못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라고 보고했다.

 

신주를 불태운 것이 아니라 가난 때문에 예법대로 장사를 치르지 못한 것이 확대된 것으로 인식한 것이다.
그러나 진산군수 신사원과 충청감사 정민시의 조사 결과 신주를 불태운 것이 사실로 드러났다.

 

유교국가에서 부모의 신주를 불태운 행위는 국왕도 보호할 수 없었기에 정조는 ‘위정학(衛正學=정학을 보위하라)’을 주창하면서 윤지충과 권상연의 사형을 명했다. 둘은 정조 15년(1791) 11월 13일 전주 풍남문 밖 형장에서 참수 당했다.

 

진산 사건 이후 천주교와 유교가 공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지면서 정약용을 비롯한 많은 양반 신서파는 천주교를 버렸다. 반면 중인들은 대부분 그대로 신앙을 고수했다. 노론에서는 진산사건을 이용해 조정에 진출한 이가환·이승훈 등의 남인들을 제거하려고 했다.

이때 정조가 남인 신서파를 보호하기 위해 들고 나온 논리가 ‘문체반정(文體反正)’이었다.

정조는 “내가 일찍이 연신(筵臣)에게 ‘서양학을 금지하려면 먼저 패관잡기(稗官雜記)부터 금지시켜야 하고, 패관잡기를 금지하려면 먼저 명말 청초(明末淸初)의 문집들부터 금지시켜야 한다’고 말했다”면서 패관잡기 식의 문체를 바로잡을 것을 지시했다.

 

패관(稗官)이란 민간에 나도는 풍설과 소문을 수집하는 일을 맡은 말단 관리를 뜻하는데, 이들이 모은 잡다한 이야기가 패관잡기다. 정조는 패관잡기와 명말 청초의 문집들을 읽고 베끼는 풍조가 서양학을 유행시키는 근본원인이라고 말한 뒤 “대저 그 근본을 바르게 하는 것은 오활하고 느슨한 것 같아도 힘을 쓰기가 쉽고, 그 말단을 바로잡는 것은 비록 지극히 절실한 것 같아도 공을 이루기가 어려운 것이다”라고 말했다.

 

서학을 바로잡는 근본대책은 패관식의 문체를 바로잡는 것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 정조는 재위 11년에도 이상황(李相璜)·김조순(金祖淳)이 예문관에서 숙직하면서 청나라 천화장주인(天花藏主人)이 쓴 평산냉연(平山冷燕)이란 소설을 읽고 있는 걸 발견하자 책을 불태우고 일종의 반성문인 함답(緘答)을 받은 일이 있었다.

 

정조가 문체반정의 당사자로 지목해 반성문을 요구했던 이상황·김조순·남공철 등은 모두 노론 인사였다. 문체반정은 상당히 떠들썩한 사건이었으나 실제로는 일부 노론 인사들에게 반성문을 요구하고 반성문을 쓰면 관작을 회복시켜 준 작은 사건에 지나지 않았다. 반성문 쓰기를 거부한 박지원에게 별다른 조치가 없었던 데서도 문체반정을 일으킨 정조의 의도를 알 수 있다.

다만 과거 시험마다 거듭해 패관문체적인 답안지를 제출한 이옥(李鈺)의 합격을 취소시키고 잠시 동안 경상도 삼가현(三嘉縣:합천군)의 군사로 충군(充軍)시킨 것이 유일한 실형이라면 실형이었다. 노론 가문 출신들이 문체반정의 대상으로 계속 적발되자 노론은 더 이상 천주교 문제로 공세에 나서기 어려웠다.

 

정조가 문체반정이란 새로운 정국 현안을 만들어 내면서 천주교 문제는 자연히 정치 현안에서 사라져갔다.

이것이 정조가 문체 문제를 제기한 정치적 의도였고 그 의도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정조 18년(1794) 말 중국 소주(蘇州) 출신의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중인 약사(藥師) 지황과 중인 역관 윤유일의 안내로 밀입국하면서 천주교는 다시 조정의 현안이 되었다. 이듬해 주문모 입국 사건이 알려지면서 노론은 다시 조정 내 남인들을 축출하기 위한 총공세를 펼쳤다.

 

정조도 이 공세에 밀려 재위 19년(1795) 7월 이승훈을 예산으로 유배 보내고, 공조판서 이가환을 충주목사(정3품), 승지 정약용을 금정 찰방(金井察訪:종6품)으로 좌천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조정 내 남인들은 몰락했지만 정조 사후 닥칠 천주교도 사냥에 비하면 이는 호시절의 일이었다.

 

[출처]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노론의 천주교 탄압 요구, 문체반정 앞세워 정면 돌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