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중국사(中國史)

측천무후(則天武后),

야촌(1) 2005. 8. 7. 18:39

■ 측천무후(則天武后, 625~705, 중국 역사상 유일한 女帝)

 

↑당 태종의 후궁에서 당 고종의 황후가 되어, 

  황제자리까지 오른 측전무후

 

성은 무(武), 이름[諱]은 조(曌), 시호(諡號)는 측천순성황후(則天順聖皇后)이다. 중국에서 여성으로 유일하게 황제(皇帝)가 되었던 인물로 무후(武后), 무측천(武則天), 측천후(則天后), 측천제(則天帝), 측천여제(則天女帝), 측천여황(則天女皇) 등으로도 불린다.


측천무후(則天武后)라는 호칭은 당(唐) 고종(高宗)의 황후(皇后)로서의 지위를 나타내지만, 690년 당(唐)의 국호를 주(周)로 고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15년 동안 중국을 통치하였던 사실에 비추어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때문에 중국에서는 ‘무측천(武則天)’이라는 호칭이 더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이름인 ‘조(曌)’는 ‘비출 조(照)’의 뜻을 나타내는 측천문자(則天文字)로서 해(日)와 달(月)이 하늘(空)에 떠있는 모양처럼 세상을 비춘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측천무후(則天武后)는 624년 2월 17일(武德 7년 1월 23일) 당(唐)의 수도인 장안(長安, 지금의 陕西省西安)에서 당의 건국 공신(功臣)인 무사확(武士彠)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그는 당 고조(高祖, 재위 618~626) 이연(李淵)이 수(隋) 양제(煬帝, 재위 604∼618)에 맞서 타이위안[太原]에서 반란을 일으킬 때부터 그를 지원하여 당 건국에 큰 공을 세웠고, 당이 건국된 뒤에 원종공신(元從功臣)으로 대우를 받으며 공부상서(工部尙書), 이주(利州, 지금의 四川廣元)와 형주(荊州, 지금의 湖北江陵) 도독(都督) 등을 지냈다. 

 

그는 620년에 본처를 잃고 양(楊)씨를 새로 처로 맞이해 세 딸을 낳았는데, 그 가운데 둘째가 무후(武后)이다. 무후는 637년(貞觀 11년) 당 태종(太宗, 재위 626∼649)의 후궁으로 입궁하였으며, 4품(四品) 재인(才人)으로서 태종에게 ‘미(媚)’라는 이름을 받아 ‘무미랑(武媚娘)’이라고 불렸다. 649년에 태종이 죽자 무후는 황실(皇室)의 관습에 따라 감업사(感業寺)로 출가(出家)하였다.

 

그러다 651년 고종(高宗, 재위 649~683)의 후궁으로 다시 입궁하였고, 이듬해에 2품(品) 소의(昭儀)가 되었다. 무후는 고종과의 사이에서 4남 2녀를 낳았으며, 655년 왕황후(王皇后)와 소숙비(蕭淑妃) 등을 내쫓고 황후(皇后)가 되었다.

 

황후가 된 무후는 고종을 대신해서 정무(政務)를 맡아보며 태종 때부터 봉직해온 장손무기(長孫無忌, 미상~659), 저수량(褚遂良, 596~658), 우지녕(于志寧) 등의 대신들을 몰아내고 신진 세력을 등용해 권력을 장악하였다.

 

656년 황태자(皇太子)였던 이충(李忠, 643~664)을 폐위시키고 자신의 장남인 이홍(李弘, 652~675)을 황태자로 앉혔고, 664년부터는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통해 실질적으로 중국을 통치하였다.

 

675년 고종의 병세가 악화하자 무후는 섭정(攝政)이 되어 전권을 행사했으며, 그 해 이홍이 죽자 둘째 아들인 이현(李賢)을 황태자로 세웠다. 그러다 680년에는 이현(李賢)을 폐위시키고 셋째 아들인 이현(李顯, 656~710)을 황태자로 세웠다.

 

683년 고종이 죽자 이현(李顯)이 황제가 되었는데, 당의 4대 황제인 중종(中宗, 재위 683~684, 705~710)이다. 하지만 중종의 황후인 위후(韋后)가 아버지 위현정(韋玄貞)과 함께 정권(政權)을 장악하려 하자 684년 중종을 폐위시키고 넷째 아들인 이단(李旦, 662~716)을 황제로 세웠다. 그가 당의 5대 황제인 예종(睿宗, 재위 684~690, 710~712)이다.

 

그 해 서경업(徐敬業), 서경유(徐敬猷) 형제가 일부 황족(皇族)들과 연합하여 양주(揚州)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무후는 40일만에 이를 진압하였다. 688년에도 태종의 아들인 월왕(越王) 이정(李貞)이 아들인 이충(李沖)과 함께 박주(博州, 지금의  山東省濟寧)와 예주(豫州, 지금의 河南省汝南)에서 무후에 반대해 군사를 일으켰지만 곧바로 진압되었다.

 

무후는 내준신(来俊臣), 색원례(索元禮), 주흥(周興) 등을 등용해 반대파에 대한 밀고와 감시에 기초한 공포정치를 펼치며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였다. 이처럼 황실(皇室) 안팎의 반대파를 제거한 무후는 690년 예종을 폐위시키고 자신이 직접 황제가 되어 나라 이름을 ‘대주(大周)’라 하고 수도를 장안(長安)에서 신도(神都)라 이름을 바꾼 뤄양[洛陽]으로 옮겼다. 

 

역사가들은 이를 고대의 주(周, BC 1046∼BC 771)와 구분하여 ‘무주(武周)’라고 부른다. 무후는 과거제도를 정비해 적인걸(狄仁傑), 요숭(姚崇), 송경(宋璟) 등의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행정 체계를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다. 무후는 반대파를 매우 엄격히 감시하고 통제하는 공포정치를 실시했지만, 상대적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안정되었다.

 

그녀의 통치기는 태종이 통치하던 ‘정관(貞觀)의 치(治)’에 버금간다는 평가를 받아 ‘무주(武周)의 치(治)’라고 불리며, 이후 당(唐)의 전성기인 현종(玄宗, 재위 712∼756) 때의 ‘개원(開元)의 치(治)’의 기초를 마련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699년 이후에는 장역지(張易之), 장창종(張昌宗) 형제와 환관(宦官) 설회의(薛懐義) 등의 총신(寵臣)들이 횡포를 부리는 등의 폐단이 발생했다. 결국 705년 무후가 병을 앓아눕자 재상(宰相) 장간지(張柬之, 625~706) 등이 그녀에게 양위(譲位)를 압박하였고, 무후는 태상황(太上皇)으로 물러나고 698년에 다시 황태자가 되었던 중종(中宗)이 복위되어 당(唐) 왕조가 부활하였다.

 

그리고 무후는 그 해 12월 16일(長安 5년 11월 2일) 황제(皇帝)가 아니라 황후(皇后)로서 장례(葬禮)를 치르고, 묘비에 한 글자도 새기지 말라는 등의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출처: 네이버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