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중국사(中國史)

사마광(司馬光)/중국 송(宋)나라의 학자· 정치가· 시인

야촌(1) 2005. 7. 1. 01:40

■ 사마광(司馬光) 1019년-1086년 - 중국 송(宋)나라의 학자· 정치가· 시인.

 

▲사마광 초상

 

중국 북송시대의 역사가이자 뛰어난 정치가로 한림학사(翰林學士)와 재상(宰相)을 지냈다. 사마광(司馬光)은 섬주(陝州)의 하현(夏縣) 출신인 아버지 사마지(司馬池)가 광산(光山-지금의 하남성)에 근무할 때에 관사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천장각(天章閣) 대제(待制)를 지냈다.


사마광의 자(字)는 군실(君實)이라 하고 속수(涑水)선생으로 불리었으며, 죽은 다음에는 온국공(溫國公)에 봉해졌다. 그는 고결(高潔)한 도덕성(道德性)을 가지고 있었으며, 학문에 조예(造詣)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정치가(政治家)로서 《자치통감(資治通鑑)》을 편찬(編纂)하였다.

 

유교경전(遺敎經典)을 공부했으며, 과거(科擧)에 합격한 후 고속 승진(昇進)했다. 1069년 부터~1085년에는 개혁가 강서(江西) 출신 왕안석(王安石)의 급진적인 개혁에 반대하는 당파인 구법당(舊法黨)을 이끌었다.

 

유교경전(遺敎經典) 해석에 보수적(保守的) 입장을 취했던 그는 단호(斷乎)한 조치(措置)보다는 도덕적(道德的)인 지도력(指導力)을 통해, 그리고 엄청난 변화보다는 기존(旣存) 기구의 활성화를 통해 훌륭한 정부를 만들 것을 주장(主張)했다.

 

죽기 직전에 왕안석 일파의 신법당(新法黨)을 조정에서 제거(除去)하는 데 성공했으며, 자신은 문하시랑(門下侍郞-宰相)에 임명되어 왕안석이 시행한 개혁정책을 대부분 폐지(廢止)했다. 근래까지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사마광을 호의적(好意的)으로 평가(評價)한 반면 왕안석은 그 반대로 평가했다.

 

그러나 최근의 역사서에서는 왕안석의 개혁에 반대한 사마광의 정책이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고 여긴다. 사마광은 편찬국 관리들과 함께 BC 403~AD 995년의 중국역사를 다룬 《자치통감(自治通鑑)》을 편찬(編纂)했는데, 이 책은 공자가 편찬했다고 알려져 있는 《춘추(春秋)》에 필적하는 편년체 역사서로 중국에서 가장 뛰어난 역사서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유교적(儒敎的) 도덕론(道德論)의 관점(觀點)에서 인물·기구를 비평(批評)했다. 그의 관심은 대부분 정치적 사건에 집중되어 있었으나, 제례(祭禮)· 음악(音樂)· 천문(天文)· 지리(地理)· 경제(經濟) 등과 같은 다양한 주제(主題)들도 다루었다. 그의 도덕적인 전망에도 불구하고 자치통감에는 엄격(嚴格)하고 비판적(批判的)인 기준을 나타내는 부분이 존재한다.

 

그는 수많은 사료(史料)에서 나타난 모순(矛盾)을 다루고, 사료의 신빙성(信憑性)에 대한 그 나름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자치통감과는 별도로 《자치통감고이(資治通鑑考異)》를 편찬(編纂)했다.

 

1949년 이후 중국공산당 정권이 유교(儒敎)를 공격(攻擊)했음에도, 사마광의 학문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는 뛰어난 시인이며, 현대 중국의 아동서적에 나오는 영웅이기도 하다.

 

특히 유년시절에 같이 놀던 친구가 물독에 빠졌을 때 돌로 그 독을 깨뜨려 친구를 구했다는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