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중국사(中國史)

왕발(王勃)/당나라 초기의 시인

야촌(1) 2005. 7. 13. 23:40

■ 왕발(王勃, 650~676)

 

 

↑왕발(王勃)

 

자는 자안(子安). 강주(絳州) 용문(龍門:山西省 河津縣) 출생. 일설에는 강주(絳州) 용문(龍門 : 지금의 山西省 河津縣) 출생이다.

그는 수(隋)나라 말의 유학자 왕통(王通)의 손자로. 조숙한 천재로 6세 때 이미 문장을 잘하였고, 17세 때인 666년 유소과(幽素科)에 급제하였다. 젊어서 그 재능을 인정받아 664년에 이미 조산랑(朝散郞)의 벼슬을 받았다.

자는 자안(子安). 강주(絳州) 용문(龍門:山西省 河津縣) 출생. 일설에는 강주(絳州) 용문(龍門 : 지금의 山西省 河津縣) 출생이다. 그는 수(隋)나라 말의 유학자 왕통(王通)의 손자로. 조숙한 천재로 6세 때 이미 문장을 잘하였고, 17세 때인 666년 유소과(幽素科)에 급제하였다.

왕족인 패왕(沛王) 현(賢)의 부름을 받고 그를 섬겼으나, 당시 유행하였던 투계(鬪鷄)에 대하여 장난으로 쓴 글이 고종(高宗) 황제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중앙에서 쫓겨나 쓰촨[四川] 지방을 방랑하였다.

 

뒤에 관노(官奴)를 죽였다는 죄로 관직을 빼앗기고 교지(交趾:베트남 북부)의 영(令)으로 좌천된 아버지 복치(福畤)를 만나러갔다가 돌아오던 중, 배에서 바다로 떨어져 익사하였다.

 

양형 ·노조린(盧照鄰) ·낙빈왕(駱賓王) 등과 함께 초당(初唐) 4걸(四傑)이라 불리는 당나라 초기의 대표적 시인이다. ‘왕양노락(王楊盧駱)’이라 불렸던 그는 종래의 완미(婉媚)한 육조시(六朝詩)의 껍질을 벗어나 참신하고 건전한 정감을 읊어 성당시(盛唐詩)의 선구자가 되었다.

 

특히 5언 절구(五言絶句)에 뛰어났으며, 시문집 《왕자안집(王子安集)》 16권을 남겼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