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중국사(中國史)

이백(李白) - 중국 당대(中國唐代)의 시인

야촌(1) 2005. 7. 26. 01:29

■ 이백「李白, 701~762. 중국(中國唐代)의 시인」

 

↑이백(李白)

 

자는 태백(太白). 청련거사(靑蓮居士)라고도 한다.두보(杜甫)와 함께 중국 최고의 고전시인으로 꼽힌다.
출생지와 혈통에 관해서는 촉(蜀)의 면주(綿州:지금의 쓰촨 성[四川省] 창밍 현[彰明縣])에서 출생했다는 설이다,

 

5세 때 아버지와 함께 서역에서 이주해왔다는 설과, 아버지가 상인이었다는 설, 또는 서북 지방의 이민족이었다는 설 등 일정하지 않다. 경제적으로 매우 풍족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25세경까지 일시적인 여행은 했으나 대체로 촉국에서 지낸 것으로 여겨진다. 일찍부터 독서를 좋아했고, 15세 무렵에는 시문 창작에도 높은 기량을 보였다고 한다.

 

이백의 현존하는 1,000여 수의 작품은 제재나 시의 형태로 보아 중국 고전시의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있다. 

그의 시의내용을 제재에 따라 자리매김할 경우 가장 대표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여행· 이별· 음주· 달빛· 유선(遊仙) 등 소위 그의 세계관에서 유출되는 일련의 제재이다.

 

그것들은 소재로서 사용되는 경우, 주제로서 사용되는 경우, 혹은 어느 쪽이라고 확정하기 어려운 경우 등 다양하면서도 공통된 감각과 발상으로 그의 시의 특색을 더욱 증폭시켜주었다. 이 때문에 이백의 작품에는 각 제재의 기본적인 성격이 집약적·전형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 많다.

 

그것은 1,000여 년에 걸친 이백 시의 읽기 방식에서도 어느 정도 확실하게 나타난다. '시사'(詩史)로 불리는 두보의 시집이 대체로 제작연대로 배열된 데 비해, 이백의 시집은 각 시대를 통해 오로지 제재로 구분된 '분류본'이 중심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작품의 제작연대가 불확실한 것이 많다는 외적 조건이 작용했으나 근본적으로 그의 시가 두보의 시와는 달리 개별 작품의 창작 상황을 사상(捨象)시킨 일반적인 상황을 노래했다는 것과 제작연대가 불확실하더라도 작품성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 등이 내적 조건으로 작용했다.

 

이 같은 관점에서 이백 시의 주요한 제재를 보면, 공통된 발상으로서 시공감각의 확대에 대한 지향, 미확정인 것에 대한 지향이라는 2가지 요소가 공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여행의 시에서 보이는 아득히 먼 시공에 대한 동경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관심, 이별의 시에서 보여지는 장래를 알 수 없는 흔들리는 심상(心象)의 상태, 음주라는 행위에 수반되는 수용하기 힘든 고양감, 심적 세계의 확대, 순간의 영원화, 광대 또는 영원한 시공에서 미지의 세계인 밝은 달빛에 대한 공감, 

 

그리고 인간이 지니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으로서 설정된 신선의 세계 혹은 그것을 향한 자유로운 비상 등 가장 이백적인 감각을 지닌 제재들 외에 여성의 슬픔을 노래한 규원(閨怨)의 시, 변경의 요새를 수비하는 병사를 노래하는 변새시, 역사를 장식한 장대한 드라마를 미미한 인간세계의 한순간의 꿈으로 노래한 회고시 등 이백은 다른 시인과 더불어 훌륭한 작품을 남겼다.

 

따라서 두보· 한유(韓愈:768~824)· 백거이(白居易:772~846) 등이 이룩한 시사(時事)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발언, 서사적 제재에 기초한 장대한 시편, 또는 시에 의해 인생과 자연계의 이치를 이야기하는 사변적인 작품 등은 이백에게서 찾아보기 어렵다.

 

한편 두보와 한유는 이백의 대표적 제재인 이별에서는 그리 저명한 작품을 남기지 못했다. 한편 시형(詩型)에 있어서도 이백의 작품은 흥미로운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대표적인 시형으로는 우선 절구(특히 7언 절구)를 꼽을 수 있으며, 다음으로 악부(樂府) 계열의 고체시를 들 수 있다.

 

율시에는 미숙했으며, 특히 7언율시에서는 소수의 작품을 제외하면 볼 만한 작품이 없다. 이백과 두보는 이 점에서도 대조적이다. 두보가 가장 성과를 거둔 시형은 7언 율시이며, 상대적으로 7언 절구에서는 뒤떨어졌다.

 

이러한 점에서 백거이의 작품은 비교적 균형 있는 분포를 보인다. 또 한유의 대표작에는 장편 고체시에 속하는 것이 많다. 이백은 왕창령(王昌齡:698~755경)과 함께 당대 7언 절구의 최고봉으로 평가되고 있다.

 

후세에 그의 작품은 '신품'(神品)으로도 일컬어졌다.

또 그의 대표작 중 7언 절구가 차지하는 비율이 상당히 높다.

결국 이 시형이 가진 표현기능의 존재방식은 이백에게 있어서 시적 이미지의 존재방식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