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조선사(朝鮮史)

병자호란의 광교산 전투

야촌(1) 2010. 7. 21. 20:04

광교산 전투에 참전한 경주이씨 인물

 

◈28世 이호(李浩) - 익재공후 청호공파

    남포현감(藍浦縣監)을 역임하고 삼례역(參禮驛). 연서역(延曙驛)의 찰방을 지낸 30世 죽암공(竹菴公) 이송재

   (李松齋)의 조부(祖父)이다. 호남 창의록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의병으로 전라감사 이시방(李時昉 : 연안이씨)

   이 이끄는 왕의 근왕병으로 참전했다..

 

◈계대(系代) 

   21世 청호공 희((暿)→22世 부제학 문환(文換)→23世 상(詳)→24世 동(棟)→25世 효량(効良)→26世 희윤(希

   尹)→27世→정(艇)→28世 호(浩)→29世 의규(義奎)→ 30世 죽암공(竹菴公) 송재(松齋

 

[참고문헌]

 

◈호남 창의록

-------------------------------------------------------------------------------------------------------------------------------------

 

■ 광교산전투(光敎山戰鬪)

     1637년 경기도 용인 광교산에서 벌어진 청나라 군대와의 전투.

 

[개설]

1637년 1월 4일부터 6일까지 전라병사 김준룡이 광교산에서 청나라 장수 양굴리[楊古利]가 이끄는 청군과 싸워 승리한 전투이다.

 

[역사적 배경]

1636년 12월 1일, 청나라 태종이 조선을 침략하자 인조는 세자와 백관을 대동하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이후 인조는 1만 3,000여 명의 군사로 남한산성을 지키도록 하고 도원수·부원수와 각 도의 관찰사와 병사에게는 근왕병을 모으도록 하였다.

 

이와 함께 인조는 명나라에 위급함을 알려 지원병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조선의 군대는 군수물자를 비축하여 장기적인 태세를 갖춘 뒤 남한산성을 지원하려고 하였으나, 청나라 군대는 근왕병의 진출을 차단하여 남한산성을 고립시켰다.

 

[발단]

1636년 12월 20일, 국왕의 근왕병 소집 명령을 받은 전라감사 이시방(李時昉)은 6,000여 명의 근왕병을 모집한 다음, 12월 29일에 전라병사 김준룡(金俊龍)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진군하였다. 

 

이때 화엄사의 승려 벽암(碧巖) 각성(覺性)이 승병 2,000여 명을 이끌고 합세하여 전라도 근왕병은 8,000여 명에 이르렀다. 1월 2일, 이시방은 양지에 도착하여 전라병사 김준룡이 지휘하는 선봉군 2,000명을 남한산성으로 진군하도록 하고 자신은 본대와 함께 그 뒤를 따라 북상하였다.

 

[경과]

1637년 1월 4일, 전라병사 김준룡의 선봉군은 광교산(光敎山: 남한산성 남방 100리 지점)에 당도하였다. 광교산에 포진한 김준룡은 진영 중앙에 군수물자를 비축하고 장기항전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자 청나라 장수 양굴리는 병력 2,000명을 광교산 동방에 투입하여 남한산성과의 통로를 차단하고 주력 5,000명으로 광교산의 전라도 근왕병 진영을 공격할 준비에 들어갔다.

 

1월 5일, 청군은 조선군 진영에 집중적인 화포 사격과 함께 수차례에 걸친 공격을 감행하였다. 전라도 근왕병은 진영 제1선에 포수, 제2선과 제3선에는 궁병과 창검병을 각각 배치한 후 청군이 전진하면 총포 사격을 집중하고, 후퇴하면 궁병과 창검병이 배후를 엄습함으로써 청군에 큰 타격을 입혔다.

 

1월 6일, 청나라 장수 양굴리는 전 병력을 투입하여 광교산에 대한 또 한 차례의 공격을 시도하였다. 근왕병들은 끝까지 진지를 지키기 위하여 선전 분투하였으나 유시(酉時) 무렵에 광교산 동남방에 있던 광양현감 최택(崔擇)의 방어진지가 무너지면서 청군이 진내로 진입하였다.

 

이에 전라병사 김준룡이 광교산 북방에서 동방으로 급거 이동하여 청군과 혼전을 벌였다. 이러한 혼전 가운데 청군의 주장 양굴리가 근왕병 포수의 총탄에 맞아 말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그러자 청나라 진영은 순식간에 전열이 흐트러지며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이틈을 타 조선군은 일제히 반격을 가하였다.

 

[결과]

광교산 전투에서 청나라 군대는 반수 이상의 병력을 잃고, 광교산 동방 10리 지점까지 퇴각하였다.

 

[의의와 평가]

병자호란 기간 중에 얻은 최대의 전과로, 청나라 군대에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특히 사살된 청나라 장수 양굴리는 청나라 태종의 매부이며, 청국 제일의 명장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조선의 군대는 1월 6일 밤, 탄약과 군량이 고갈된 상태에서 청군과 교전을 계속하기가 어렵다는 판단을 내리고 수원 방면으로 철수하였다.

 

[참고문헌]

◇인조실록(仁祖實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병자호란사(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7)

◇한민족전쟁통사 2(국방군사연구소, 1993)

 

자료출처 : 디지털 용인문화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