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조선사(朝鮮史)

병자호란 전사자

야촌(1) 2010. 5. 10. 03:49

고종 4년 9월 15일(을축) 원본2718책/탈 초본128책(11/21) 1867년 同治(淸/穆宗) 6

 

병자년 등에 전사한 사람의 성명과 사연을 일일이 조사 보고하라는 계

<고종 4년 정묘(1867, 동치 6) 9월 15일(을축)>

 

■ 병자년 등에 전사한 사람의 성명과 사연을 일일이 조사하여 들인다는 홍문관의 계.

 

○ 홍문관이 아뢰기를,

“병자년ㆍ정묘 년에 전사한 사람들을 홍문관으로 하여금 조사하여 들이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삼가 성상의 하교대로《병자록(丙子錄)》 및 《존주휘편(尊周彙編)》의 배신전(陪臣傳) 등 책을 조사하였습니다.

 

검천(儉川) 싸움에서 공주(公州)의 영장 최진립(崔震立)은 몸에 수십 군데 상처를 입으면서도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싸우다가 죽었는데, 정무(貞武)라는 시호를 내렸습니다. 연산 현감(連山縣監) 김홍익(金弘翼)은 직접 수십 명을 찔렀으나 칼이 부러지는 바람에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는데,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충민(忠愍)이라는 시호를 내렸습니다.

 

연산의 관노(官奴) 장사정(張士貞)도 오랑캐에게 피살되었습니다.

금정 찰방(金井察訪) 이상재(李尙載)는 오랑캐의 화살이 가슴과 어깨에 꽂히자 화살촉을 뽑아 적을 쏘았으며, 적이 또 이마를 쏘아 맞추자 그제 서야 쓰러져 죽었는데, 부제학을 추증하고 정려(旌閭)하였습니다.

 

남포 현감(藍浦縣監) 이경선(李慶善)은 용감히 싸우다 군중(軍中)이 전의(戰意)를 잃고 무너지자 말에서 떨어져 적과 싸우다 죽었는데, 예조 참의를 추증하고 정려하였습니다.

 

남포의 아전 이귀남(李貴男)이 함께 전사하였는데, 부윤 황박(黃珀)이 국난에 목숨을 바쳤다고 하여 이름을 드러내어 정려하였습니다. 이영화(李永華)는 출신으로서 싸움터에 나가 죽었는데, 함께 죽은 조원(趙瑗)ㆍ조영(趙瑛)과 함께 모두 추증하였습니다.

 

김문부(金文孚)는 정세규(鄭世規)를 따라 전사하였는데, 추증하고 정려하였습니다. 현감 이건(李楗)은 싸움에서 패하게 되었을 때 노복이 말을 채찍질하며 피하기를 청하자 ‘나더러 나라를 배반하고 구차하게 살라는 말이냐?’ 하고는 끝내 죽었는데, 일이 알려지자 병조참의를 추증하고 정려하였습니다.

 

정세망(鄭世望)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바위에 추락하여 죽었습니다. 출신 박신길(朴愼吉)은 군대가 궤산하자 손가락 하나를 잘라 노복에게 주면서 돌아가 부모의 묘소 옆에 묻어 달라고 하고는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예빈시 첨정 노봉천(盧奉天)은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었는데, 공조참의에 추증하였습니다. 신오(申澳)는 천총으로서 싸움터에 나갔다가 군대가 무너지자 늙은 나무아래에 꼿꼿하게 선 채로 무척 많은 오랑캐를 쏘아 죽이고는 화살이 다하여 죽었는데, 주부(主簿)를 추증하였습니다.

 

노도응(盧道凝)은 노비 충복(忠福)과 함께 전사하였는데, 군자감 주부를 추증하였습니다.

도총부 도사 변희일(邊希一)은 싸움이 벌어지자 손가락을 깨물어 띠에다 피로 글을 써서 노복에게 주면서 돌아가 어미에게 드리라고 하고는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었는데, 병조참판을 추증하고 정려하였습니다.

 

충의(忠義) 김자빈(金自鑌)은 모집에 응하여 전사하였는데, 훈련원판관을 추증하였습니다.

박동룡(朴東龍)은 급제하고 창방(唱榜)하기 전이었는데도 ‘내가 이미 출신하였는데 어찌 감히 집에 있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종군하다가 죽었는데, 주부를 추증하고 정려하였습니다.

 

출신 윤승원(尹承元)은 검을 차고 종군하다가 전사하였고, 출신 남무성(南武星)은 수십 명을 사살하고 죽었는데, 훈련원판관을 추증하였습니다. 박대항(朴大恒)은 선봉에 속해 있다가 오랑캐를 만나 얼굴에 일곱 개의 화살을 맞고 죽었는데, 참판을 추증하고 정려하였습니다.

 

군자감 주부 박의겸(朴義謙)은 그의 형 원겸(元謙)ㆍ인겸(仁謙)ㆍ예겸(禮謙)과 같은 때에 전사하였는데, 의겸의 동리에 정문을 세워주었습니다. 출신 이성길(李成吉)은 선봉에서 화살에 맞아 죽었는데, 군자감 주부를 추증하였습니다.

 

옥포 만호(玉浦萬戶) 권임길(權臨吉)은 종군하여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었으므로 복호하였고, 주부 윤익중(尹翊中)은 화살이 다 떨어져서 죽었으므로 정려하였습니다. 이저소(李弤少)ㆍ유사(柳泗)ㆍ성대유(成大裕)는 모두 정세규의 막비(幕裨)로서 전사하였는데, 모두 참의를 추증하고 정려하였습니다.

 

이천민(李天民)은 척후(斥堠)로서 많은 적을 죽이고 전사하였습니다. 정의백(鄭義伯)과 양수(楊洙)는 같은 때에 전사하였는데, 의백에게 주부를 추증하였습니다. 초관 김종립(金宗立)은 전사하였으므로 정려하였고, 천총 경지연(慶之衍)은 전사하였으므로 추증하였습니다.

 

북문의 전투에서 체부(體府)의 별장 신성립(申誠立)은 힘껏 싸우다가 화살이 다하자 마침내 자신이 거느린 200여 명과 함께 죽었는데, 상이 듣고 성에 임하여 애도를 표하였으며, 한성부판윤을 추증하고 그의 후손을 녹용하였습니다.

 

체부 종사관 지여해(池汝海)는 어영청의 포수를 거느리고 성벽을 타고 내려가서는 오랑캐가 철기(鐵騎)로 짓밟자 육박전을 벌이다가 죽었는데, 병조참판을 추증하였습니다. 

 

선전관 이찬조(李纘祖)는 이의배에게 명을 전하기 위해 칼날을 무릅쓰고 달려 나갔는데, 남성(南城) 아래에 이르렀을 때 적이 급히 추격해 오고 말이 탄환에 맞아 주저앉아 달려가지 못하게 되자 맨주먹을 휘둘러 몇 명의 적을 연달아 죽인 다음 힘이 다해 오랑캐에게 잡혔습니다.

 

그런데도 욕설을 퍼부어대며 조금도 굽히지 않자 적이 노하여 묶어서 숯불위에 놓았습니다. 끝내 불에 타 죽고 말았는데, 병조참판을 추증하고 정려하였습니다. 도총부 도사 정탁(鄭倬)은 한 부대의 군사를 요청해서 진격하여 오랑캐 진영으로 돌격하였다가 수십 발의 화살을 맞고 죽었는데, 호조참의를 추증하고 정려하였습니다.

 

선전관 이남(李枏), 만호 조득남(趙得男), 의병장 박동영(朴東榮), 출신 이원길(李元吉)ㆍ오동량(吳東亮)도 모두 전사하였는데, 조득남과 이원길은 추증하고 정려하였으며, 오동량은 복호하였습니다.

 

쌍령(雙嶺)의 싸움에서 경상도 병마절도사 허완(許完), 우병사 민영(閔栐), 충청병사 이의배(李義培)가 들어가 구원하다가 쌍령에 이르러 전사하였습니다. 허완은 병조판서를 추증하고 충장(忠莊)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민영은 병조판서를 추증하고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이의배는 영의정을 추증하고 충장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이들 모두를 정려하였습니다.

 

안동(安東)의 영장 선세강(宣世綱)은 구원하러 들어가 힘껏 싸우다가 죽었는데, 병조참의를 추증하였습니다. 상주(尙州)의 영장 윤여임(尹汝任)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근왕(勤王)하여 앞장서서 적을 향해 총을 쏘아 세 손가락이 다 해졌으며, 오랑캐가 이르자 죽고 말았는데, 배에 꼽힌 화살촉을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병조 판서를 추증하고 영원군(鈴原君)에 봉하였습니다.

 

창원부사(昌原府使) 백선남(白善男)은 삼영(三營)의 군사가 모두 궤산되자 오랑캐 진영으로 달려가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었는데, 그를 따르다가 죽은 자가 10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창원의 아전 황시헌(黃是憲)은 흩어진 졸개들을 불러 모아 힘껏 싸우다가 백선남의 곁에서 죽었는데, 그에게 병조좌랑을 추증하였습니다. 현감 손종로(孫宗老)는 허완의 군대를 따랐다가 군대가 궤산되자 꼿꼿하게 선 채로 죽었는데, 훈련원정을 추증하고 정려하였습니다. 그의 노복 억부(億夫)도 그를 따라 죽었습니다.

 

강운서(姜雲瑞)는 남한산성이 포위되었다는 말을 듣자 ‘군부(君父)가 곤란한 지경에 빠졌는데 감히 집에 있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조카 기업(起業)ㆍ기군(起軍)과 함께 힘껏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경상도 중군 우성적(禹成績)이 쌍령에서 전사하자 그의 노복 귀동(貴同)이 따라서 죽었는데, 사복시 정을 추증하고 노복과 아울러 정려하였습니다. 하계인(河繼仁)ㆍ정복초(鄭復初)ㆍ강홍신(姜弘信)도 모두 전사하였는데, 하계인은 감찰을 추증하고 정복초는 첨정을 추증하였습니다.

 

정대업(鄭大業)은 의병을 거느리고 근왕하여 오랑캐 진영으로 돌격하여 세 명의 적을 때려죽이고 죽었는데, 호조좌랑을 추증하였습니다. 출신 권극상(權克常)은 선세강을 따라 근왕하여 무척 많은 적을 쏘아 죽였고, 손가락을 삐었으면서도 사기가 꺾이지 않았으나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는데, 훈련원첨정을 추증하였습니다.

 

권용휴(權用休)는 군대가 궤산되었을 때 같은 부대의 사람들이 함께 달아나자고 하자 ‘위험을 보고 살기를 도모하는 것은 의리가 아니다.’ 하고는 마침내 몇 명의 적을 쏘아 죽이고 죽었는데, 군자감주부를 추증하고 정려하였습니다.

 

김몽린(金夢麟)은 안동의 영교(營校)로서 선봉대에 소속되어 오랑캐 몇 명을 죽이고 자신도 죽었는데, 사도시주부를 추증하였습니다. 이서우(李瑞雨)는 관찰사의 막비로, 같은 고을의 졸개가 이서우를 잡아당기며 달아나자고 하였으나, 그는 ‘오늘은 실로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날이다.’라고 하면서 꼿꼿하게 선 채 오랑캐를 향해 활을 쏘다가 화살이 다 떨어져 죽었는데, 군기시부정을 추증하였습니다.

 

김영달(金永達)은 병사를 인솔하고 난에 달려 나가 민영의 군대에 소속되었는데, 군대가 궤산되자 전사하였습니다. 금한룡(琴漢龍)ㆍ해룡(海龍)ㆍ막룡(莫龍)은 삼형제가 함께 난에 달려 나갔는데, 막룡이 한룡의 소매를 잡아끌며 떠나자고 하자 한룡이 칼을 뽑아 소매를 자르고는 해룡과 함께 오랑캐에게로 달려가 죽었습니다. 금해룡과 한룡에게 군기시첨정을 추증하였습니다.

 

김엽(金燁)은 욱(煜)ㆍ찬(燦)과 함께 난에 달려 나가 죽었는데, 김엽에게는 훈련원첨정을 추증하고 두 동생에게는 주부를 추증하였습니다. 최영극(崔榮極)과 장우(張雩)도 쌍령에서 전사하였습니다. 

 

출신 이천배(李天培)는 이의배를 따라 들어가 응원하였는데, 이의배가 죽자 흩어진 병사들을 거두어 오랑캐와 싸웠습니다. 오랑캐의 화살이 날아올 때마다 주워서 도로 쏘아 좌우의 엄지손가락이 다 해졌으며, 몸에 수십 군데 상처를 입고 죽었습니다.

 

이억(李億)은 이의배의 군사를 따라 나갔다가 조축생(曺丑生)과 함께 죽었는데, 병조참의를 추증하고 정려하였으며, 조축생은 정려하고 후손을 녹용하기만 하였습니다.

 

해미(海美)의 영장 이근영(李根永)은 용감하게 혈전을 벌이는 때에 마침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쳤습니다. 칼을 뽑자 칼자루가 부러졌으므로 깃대로 오랑캐를 공격하였는데, 급기야는 깃대마저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오랑캐가 사방에다 땔나무를 쌓아 놓고는 불을 질렀으므로 마침내 죽고 말았는데, 병조판서를 추증하였습니다. 그의 노복 수남(水男)도 그를 따라서 죽었고, 이차형(李次衡)도 죽었습니다.

 

박우(朴瑀)는 이의배의 군대를 따라 칼을 빼들고 박격 전을 벌여 매우 많은 적을 살상하였으나 화살에 맞아 말에서 떨어져죽었는데, 호조참의를 추증하였습니다. 윤신득(尹信得)은 최기(崔祈)와 함께 향리의 장정 100여 명을 모아 적을 만나 크게 싸우다가 전군(全軍)이 몰살당했는데, 집의를 추증하였습니다.

 

영가군(永嘉君) 이효길(李孝吉), 광성도정(廣城都正) 이제길(李悌吉), 찰방 원성모(元成模), 현령 장운상(張雲翔), 주부 홍요경(洪堯儆), 장사 기득윤(奇得胤) 등은 봉기하여 의병들을 모았습니다.

 

송파(松坡)에 이르러 오랑캐의 습격을 받아 힘껏 싸우다가 모두 죽고 말았는데, 이들 모두를 정려하였습니다.

증 호조좌랑 허치(許穉)는 동로(東路)의 군향(軍餉)을 독운 하던 중에 오랑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오랑캐가 칼로 위협하자 허치가 끊임없이 욕을 퍼붓다가 끝내 죽고 말았는데, 집의를 추증하였습니다.

정랑 심척(沈惕)과 판관 이신립(李身立)은 오랑캐에게 잡혀 굴복하지 않고 죽었는데, 심척에게 참의를 추증하였습니다. 

세마 김약천(金若天)은 오랑캐를 만나 칼을 맞고 죽었습니다.

 

의영고 직장 최문한(崔文漢)은 호조좌랑 김극항(金克恒)과 함께 사수하며 떠나지 않다가 오랑캐의 손에 죽었는데, 최문한에게 집의를 추증하였습니다. 목사 박동명(朴東命)은 의병들을 모았는데, 견무계(見茂溪)에 이르러 적을 만나 크게 패하자 ‘이곳은 내가 죽을 장소이다.’ 하고는 발걸음을 옮기지 않고 죽었습니다. 병조판서를 추증하고 정려하였습니다.

 

김중국(金重國)은 사로잡혀 굴복하지 않고 죽었고, 그의 아내와 두 딸은 물에 몸을 던져 죽었습니다. 전사한 사람의 성명과 사연을 일일이 조사하여 들입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임술년의 예대로 거행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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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弘文館啓曰, 丙丁戰亡人, 令弘文館考出以入事, 命下矣。謹依聖敎, 取考丙子錄及尊周彙編陪臣傳等書, 則儉川之戰, 公州營將崔震立, 身被數十創, 不離寸地而死, 贈謚貞武。連山縣監金弘翼, 手擊殺數十人, 劍折中矢死, 贈吏曹判書, 謚忠愍。連山官僮張士貞, 亦爲虜所殺, 金井察訪李尙載, 虜矢中胸及肩, 自拔鏃射之, 虜又射中頂, 始仆而死, 贈副提學, 旌閭。藍浦縣監李慶善, 師潰墜馬而死, 贈禮曹參議, 旌閭。藍浦吏李貴男, 同時戰死, 府尹黃珀, 以殉難顯名, 旌閭。李永華, 以出身, 赴難而死, 同時死者, 趙瑗·趙瑛, 皆贈官。金文孚, 從鄭世規戰死, 贈官, 旌閭。縣監李楗, 及軍敗, 僕策馬請避, 楗曰, 欲我背國偸生乎? 遂死。事聞, 贈兵曹參議, 旌閭。鄭世望, 中流矢墜巖而死。出身朴愼吉, 及師潰, 斫一指托奴曰, 歸埋父母墓側, 遂力戰死之。禮賓僉正盧奉天, 力戰死之。贈工曹參議。申澳, 以千摠, 及師潰, 植立老樹下, 射殺虜甚多, 矢竭遂死之, 贈主簿。盧道凝, 與奴忠福, 俱戰死, 贈軍資主簿。都摠都事邊希一, 方戰嚙指, 血書諸帶, 付奴歸報其母, 力鬪死之, 贈兵曹參判, 旌閭。忠義金自鑌, 應募戰死, 贈訓鍊判官。朴東龍登科, 未及唱榜曰, 我旣出身, 何敢在家乎? 遂從軍死, 贈主簿, 旌閭。出身尹承元, 杖劍從軍戰死。出身南武星, 射殺數十人而死, 贈訓鍊判官朴大恒, 屬前鋒遇虜, 面中七矢而死, 贈參判, 旌閭。軍資主簿朴義謙, 與其兄元謙·仁謙·禮謙, 同時戰死, 旌義謙閭。出身李成吉, 以前鋒, 中矢死, 贈軍資主簿。玉浦萬戶權臨吉, 從軍力戰死, 復其戶, 主簿尹翊中, 矢盡死之, 旌閭。李弤少·柳泗·成大裕, 皆鄭世規幕裨也, 戰死, 俱贈參議, 旌閭。李天民, 以斥堠, 殺賊甚多而死之。鄭義伯·楊洙, 同時戰死, 義伯贈主簿。哨官金宗立戰死, 旌閭。千摠慶之衍, 戰死贈官, 北門之戰。體府別將申誠立, 力戰矢盡, 遂與所部二百餘人, 俱死。上聞之, 臨城擧哀, 贈漢城判尹, 錄其後。體府從事官池汝海, 率御營砲手, 縋城而出, 虜以鐵騎蹴之, 汝海, 搏戰死之, 贈兵曹參判, 宣傳官李纘祖, 傳命于李義培, 冒刃馳到南城下, 賊追甚急, 丸及於馬, 蹶不能前, 遂張拳力戰, 連殺數賊, 力盡爲賊所執, 憤罵不屈, 賊怒縛置炭火上竟至燒死, 贈兵曹參判, 旌閭。都摠都事鄭倬。請得一隊出戰, 突虜陣, 中數十矢而死, 贈戶曹參議, 旌閭。宣傳官李柟, 萬戶趙得男, 義兵將朴東榮, 出身李元吉, 吳東亮, 皆戰死, 得男·元吉, 贈官, 旌閭。東亮復其戶。雙嶺之戰, 慶尙兵使許完, 右兵使閔栐, 忠淸兵使李義培, 入援至雙嶺戰死, 許完贈兵曹判書, 謚忠莊, 閔栐贈兵曹判書, 謚忠壯, 李義培贈領議政, 謚忠壯, 竝旌閭。安東營將宣世綱, 入援力戰死, 贈兵曹參議。尙州營將尹汝任, 領兵勤王, 挺身射虜, 三指皆墜, 因格虜而死, 矢鏃之實腹者, 不記其數。贈兵曹判書, 封鈴原君。昌原府使白善男, 及三營軍盡潰, 赴虜陣力戰死之, 從而死者百餘人。昌原吏黃是憲, 招散卒力戰而死於善男之側, 贈兵曹佐郞。縣監孫宗老, 從許完軍, 及軍潰, 因植立死之, 贈訓鍊正, 旌閭。其奴億夫, 亦從而死之。姜雲瑞, 聞南漢圍曰, 君父蒙難, 敢在家耶? 與從子起業·起軍, 力戰死之。慶尙中軍禹成績, 戰死雙嶺, 其奴貴同, 從而死之, 贈司僕正, 竝奴, 旌閭。河繼仁·鄭復初·姜弘信, 皆戰死, 繼仁贈監察, 復初贈僉正。鄭大業, 以義旅勤王, 突虜陣, 格殺三虜而死, 贈戶曹佐郞。出身權克常, 從宣世綱勤王, 射賊甚衆, 指脫氣不衰, 已而中矢死之, 贈訓鍊僉正。權用休及師潰, 同隊欲與俱亡, 用休曰, 見危圖生, 非義也。遂射數虜而死, 贈軍資主簿, 旌閭。金夢麟, 安東營校也。屬前隊, 殺虜數人而死, 贈司䆃主簿。李瑞雨, 觀察使幕裨也。同里卒, 牽瑞雨請逃, 瑞雨叱曰, 今日固決死耳, 植立射虜, 矢盡而死之, 贈軍器副正。金永達, 領兵赴難, 屬閔栐軍, 師潰死之。琴漢龍·海龍·莫龍兄弟三人, 同赴難, 莫龍牽漢龍袖欲去, 漢龍拔刀斷其袖, 與海龍赴虜死, 海龍·漢龍贈軍器僉正。金燁, 與煜·燦同赴難, 死之, 燁贈訓鍊僉正, 二弟贈主簿。崔榮極·張雩, 亦戰死雙嶺。出身李天培, 從義培入援, 及義培死, 收散兵與虜戰, 虜箭至, 輒取而反射, 左右拇指盡落, 身被數十創而死之。李億, 從李義培軍, 與曺丑生俱死, 贈兵曹參議, 旌閭。丑生, 只旌閭, 錄後。海美營將李根永, 奮勇血戰時, 風雪甚, 拔劍柄折, 以旗捍擊虜, 旗捍亦折, 虜環以柴焚之, 遂死, 贈兵曹判書。其奴水男, 從而死, 李次衡, 亦死之。朴瑀從義培軍, 挺劍搏擊, 殺傷甚多, 中矢墜馬而死, 贈戶曹參議。尹信得與崔祈, 募鄕里壯丁百餘人, 遇虜大戰, 全軍覆設, 贈執義。永嘉君孝吉, 廣城都正悌吉, 察訪元成模, 縣令張雲翔, 主簿洪堯儆, 壯士奇得胤等, 起集義旅, 至松坡, 爲虜所襲, 力戰俱死之, 皆旌閭, 贈戶曹佐郞。許穉, 督東路餉, 中路遇虜, 虜以刃脅之穉, 罵不絶口, 竟死之, 贈執義, 正郞沈惕, 判官李身立, 被擄不屈, 死之, 惕贈參議。洗馬金若天, 遇虜被刃死之, 義盈直長崔文漢, 與戶曹佐郞金克恒, 守死不去, 竝死於虜, 文漢贈執義, 牧使朴東命, 倡義旅, 至見茂溪, 遇虜大敗曰, 此吾死所也, 不移步而死, 贈兵曹判書, 旌閭。金重國, 被擄不屈死, 其婦與兩女, 投水死。戰亡人姓名事, 一一考出, 以入之意, 敢啓。傳曰, 知道。依壬戌年例擧行。

 

자료 : 승정원 일기 : 고종 4년 9월 15일 (을축) 원본2718책/탈초본128책 (11/21) / 1867년 同治(淸/穆宗) 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