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역사이야기 172

"안중근 의사의 둘째 아들은 '영웅'이 아닌 '친일파'의 길을 택했다“

"안중근 의사의 둘째 아들은 '영웅'이 아닌 '친일파'의 길을 택했다“ ↑왼쪽에 앉은 사람이 안준생(安俊生, 1907년 ~ 1951년) / 온라인 커뮤니티 [인사이트] 황기현 기자 = "그럼 나더러 어쩌란 말입니까?" 가슴이 답답해지는 외침이었다.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안중근 의사의 아들은 '친일파'의 길을 선택했다. 지금으로부터 110년 전인 지난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 역에서는 날카로운 총성이 울려 퍼졌다. '조선의 원수'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 의해 처단되는 순간이었다. 1910년 2월 14일, 불법 재판을 이어오던 일본 법정은 결국 안 의사를 '테러리스트'로 규정해 사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한 달여 후인 3월 26일 졸속으로 사형을 집행했다. 당시 일본은 안 의사의 유해도..

인천부사 이성곤에 대한 추고(推考)

인천부사 이성곤에 대한 추고(推考) 국역비변사등록 74책 > 경종 3년 5월 11일(음력)> 勅使가 지나는 驛站에 나오지 않은 仁川府使 李成坤 등을 從重推考할 것을 청하는 備邊司의 啓 [1723-05-11(음)] [제목] 칙사(勅使)가 지나는 驛站에 나오지 않은 仁川府使 李成坤 등을 從重推考할 것을 청하는 備邊司의 啓 [연월일] : 1729년(경종 3) 05월 11일(음) [내용]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반송사(伴送使) 조태억(趙泰億)이 인천부사 이성곤(李成坤)과 과천현감 김홍권(金弘權)이 역참에 나오지 않았다고 하여 유사로 하여금 여쭙고 처리할 것을 치계(馳啓)하였습니다. 홍제원(弘濟院)은 칙사가 지나가는 역참이니 수령이 대령하지 않은 것은 참으로 실수한 것입니다. 그러나 당초 칙사는 고양(高陽)을 숙소..

당나라 깬 양만춘은 가공인물..연개소문 '밀사 외교' 먹혔다

■ 연개소문과 양만춘은 철천지원수였을까? 유성운의 역사정치 ㉘ 안시성을 지킨 건 누구였을까 영화 ‘안시성’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안시성 출신으로 주필산 전투에 참가했다가 패잔병이 된 사물은 고구려 최고 권력자 연개소문으로부터 반역자 양만춘을 암살하라는 밀명을 받고 안시성에 잠입합니다. 안시성은 당 태종이 이끄는 대군의 침입을 앞둔 상황, ‘안시성은 어떻게 되느냐’는 사물의 질문에 ‘안시성은 포기하고 모든 병력은 평양성을 지킬 것’이라는 연개소문의 차가운 답변이 돌아옵니다. 중앙권력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들-고립무원의 처지-연개소문의 양만춘 암살 지령 등은 영화 ‘안시성’의 줄거리를 구성하는 주요 얼개입니다. ↑영화 '안시성' 촬영현장 모습. [사진=NEW] 그렇다면 연개소문과 양만춘은 실제로 어떤 관계였을까..

수로군 진린(陳璘)의 ‘갑질’과 반성

[김동철칼럼] ■ 수로군 진린(陳璘)의 ‘갑질’과 반성 2018/02/14 10:57 등록 (2018/02/14 10:57 수정)245 김동철 기자 (youth@babytimes.co.kr) 명나라는 1596년 말, 명과 왜의 오랜 강화협상이 깨지고 1597년 2월 왜군이 재침(정유재란)하자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1597년 12월 22일부터 이듬해 1월 4일까지 양호와 권율의 연합군은 울산성을 공격했는데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위기의식을 느낀 명군은 사로병진책(四路竝進策)이란 최후의 일격을 가할 비책을 마련했다. 조선과 명나라는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였기 때문이었다. 1598년 8월 명나라 병부상서(국방장관) 겸 총독군무 형개(邢玠)는 조명연합군을 결성하여 ..

통일혁명당사건

통일혁명당사건(統一革命黨事件) [요약] 통일혁명당 창당준비위원회인 서울시위원회와 전남위원회 검거사건을 말한다. 통혁당 사건이라고도 한다. 1964년 통혁당은 김종태·최영도가 창당 준비 위원회를 결성했다. 서울시위원회는 위원장 김종태를 중심으로 청년지식인으로 구성되었고, 그 산하조직으로 청년문학가협회·민족주의연구회·기독청년경제복지회 등을 조직했다. 위원회 기관지로는 합법적 월간지였던 〈청맥〉이 있었다. 통혁당은 1968년 서울시위원회 158명과 전남위원회의 27명이 체포됨으로써 와해되었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김종태가 북괴 대남사업총국장의 지령을 받고 '통일혁명당'을 결성, 혁신계정당으로 위장, 합법화하여 반정부·반미 데모를 전개하는 등 대정부공격과 반정부적 소요를 유발시키려는 데 주력했다"고 발표하였다...

연좌 3족 멸문지화(緣坐 三族 滅門之禍)

■ 연좌 3족 멸문지화(緣坐三族滅門之禍) ​ ​1411년 11월 16일 의정부(議政府)에서 태종에게 아뢰기를 "대명률(大明律) 모반대역조(謀反大逆條)에 이르기를 ‘무릇 모반대역(謀反大逆)과 다만 공모(共謀)한 자는 수범(首犯)·종범(從犯)을 나누지 않고 모두 능지처사(凌遲處死)하고, 부자(父子) 16세 이상은 모두 교형(絞刑)하고, 15세 이하의 모녀(母女), 처첩(妻妾)·조손(祖孫)·형제(兄弟)·자매(姉妹), 자식의 처첩은 공신의 집에 주어서 종을 삼는다. 아울러 그들의 재산은 관가에 몰수하고, 남자 나이 80과 독질(篤疾) 부인(婦人) 나이 60과 폐질(廢疾)은 아울러 연좌(緣坐)의 죄를 면하고, 백숙부와 형제의 자식은 호적의 같고 다른 것에 관계없이 3천리에 유배를 시켜 안치(安置)하고, 연좌된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