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339명의 ‘경주부윤’ 탐관 보다 목민관 귀감 많아
2015년 01월 23일 [코리아뉴스넷]
↑목민관의 귀감으로, 부민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세워진 경주부윤 선정비가 황성공원 안에
남아 있다.ⓒ (주)경주신문사
천년동안 경주의 중심부요 관아의 심장부였던 경주동헌(慶州東軒).
경주의 수장이었던 부윤이 머물렀던 경주읍성의 중심부로 부민들이 빈번하게 드나들었을 그 곳!.
동부동에 무심히 세워져있는 담배인삼공사 경주지점과 경주상공회의소를 바라본다.
이곳에 경주동헌 ‘일승정(一勝亭)’이 있었다.
“유서 깊은 역사를 회고해보면 어찌 깊은 시름과 감흥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는 소당 조철제 선생의 표현이다.
조선시대 경주의 행정, 조세, 세무 병무, 사법의 권한뿐만 아니라 문예를 진흥하고 인재를 육성하는 임무까지 맡았으며 막강한 권력을 지녔던 339명의 경주부윤과 동헌은 재조명 돼야 한다.
경주부윤에 대한 짧은 이글은, 유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경주지역 곳곳을 직접 발로 누비며 경주에서의 조선을 찾아 연구·집필해온 전 경주고 교사이자 현재 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경주문화원)인 소당 조철제 선생의 자문과‘경주문화논총 제17집 중 (’경주동헌‘, 경주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 논문에서 발췌했음을 밝힌다.
-조선시대 경주부윤은 막강한 권력의 소유자
경주부윤은 행정, 조세, 세무, 병무, 사법의 권한뿐만 아니라 문예를 진흥하고 인재를 육성하는 임무까지 맡았으며 막강한 권력을 지녔다. 부윤은 지나가는 관원과 지역 문사들을 맞이했고 끊임없이 요구하는 부민들의 민원을 처리해야 했으며 아전 등 이속을 다스려야 했다.
관아에는 각종 문서가 산적했고 수백년 간 내려 온 귀중한 자료도 있었다.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를 지나면서 공사의 각종 문서는 모두 없어졌다.
‘경주부선생안(慶州府先生案)을 보면, 조선시대 경주부윤은 339명이었다.
부윤은 1392년 태조 이성계가 건국한 이후부터 1894년(고종31)까지 502년간 경주부윤으로 부임한 관원이었다.
부윤의 임기는 1800일(4년)이지만 품계가 당상(통정대부)이거나 가족을 데려가지 않을 경우에는 900일이었다.
조선 전기에는 비교적 임기가 지켜졌지만 후기에는 1년을 못 넘긴 부윤이 허다했다.
경주 부윤의 평균 재임 기간은 17개월이었다.
이들 중 최장수를 누린 부윤은 임란을 전후해서 7년간 재임한 ‘박의장’이었다.
이들 부윤의 품계를 살펴보면, 정3품 통종대부가 65%, 종2품 가선대부가 28%였다.
1894년(고종 31) 직제가 바뀌어 초대 경주군수 이현주가 부임한 이래 1910년 한일합방까지 모두 12명의 군수가 배출됐다.
부윤들이 민원 이외에 향교를 중건한다든지 교량을 놓는다든지 책을 발간한다든지 해서 부민을 위해 치적을 쌓은 훌륭한 부윤이 있는가하면, 쫓겨 도망간 부윤도 있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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