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대한제국. 근대사 40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

▲한성사범학교 전경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 시대 : 근대 성격 : 교육기관, 교원양성기관 설립 : 1895년 분야 : 초등학교 교사 양성교육기관 당시 정부에서는 초등교육기관인 소학교(小學校)를 널리 보급시킬 계획이었으므로 교원 양성을 위한 사범학교가 필요하였다. 이에 <한성사범학교관제>를 공포하고 1895년 4월 학교를 설립하였으며, 곧이어 같은 해 7월 <한성사범학교규칙>을 공포하였다. 이 관제에 의하면 설립 목적은 ‘교관(敎官)을 양성하는 처(處)로 함.’이라 되어 있다. 학교의 편제는 본과와 속성과를 두었고, 수업연한은 각각 2년과 6개월로 하였다. 부속학교로는 심상과와 고등과가 설치된 수업연한 3년의 부속 소학교가 있었다. 입학 자격은 본과를 20∼25세, 속성과를 22∼35세로 규정하였고 정..

중국인이 쓴 통한의 조선 망국 보고서/량치차오

중국인이 쓴 통한의 조선 망국 보고서 한겨레신문 2014.08.10 이토히로부미와 함께 있는 황태자 영친왕. 이토는 헤이그 밀사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순종을 세운 뒤, 초대통감 자리를 내놓고, 영친왕의 태사가 되어 마치 보모처럼 데리고 다녔다.(글 항아리 제공) 량치차오, 조선의 망국을 기록하다. 최형욱 엮고 옮김 ㅣ 글 : 항아리·1만5000원 “나는 눈물이 눈썹에 넘쳐흐름을 금치 못하겠다. 이제 조선은 끝났다. 지금부터 세상에 조선의 역사가 다시 있을 수 없고, 오직 일본 번속 일부분으로서의 역사만 있을 뿐이다.” 눈물의 주인공은 조선 백성이 아니다. 눈물은 청나라 말기 변법유신파의 지도자였던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의 뺨에 흘렀다. 량치차오는 캉유웨이(康有爲)의 제자로서 무술..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사건)

■을미사변 ▲명성황후영정(명성황후 생가소장품) ▲명성황후 시해 사건 가담자들>>>이들 중 신문사사장, 장관이 된 일본 지성인도 가담 했다. ▲경운궁 대안문을 나서는 명성황후 장례 행렬. 사진 뒤에 ‘황후의 운구 장면’이라고 적혀 있다. 명성황후(1851~1895) 국장(國葬) 사진 3장이 나왔다. 양상현 순천향대 교수(건축학)는 미국 럿거스대가 소장한 그리피스 컬렉션에서 명성황후 국장 사진을 발견해 7일 경향신문에 공개했다. 새로 발견된 사진은 경운궁 대안문(大安門)을 나서고 있는 장례 행렬, 명성황후의 신백(神魄)을 모신 신련(神輦 : 신주를 모시고 가는 신주가마), 행렬을 따르고 있는 곡궁인(哭宮人)들의 모습이다. 대한제국 선포(1897년 10월12일) 한 달 뒤 치러진 명성황후 국장 사진은 러시아 ..

[김갑수 근·현대사]③ 도대체 미국은 무슨 짓을 했나

[김갑수 근·현대사] ③도대체 미국은 무슨 짓을 했나 진실의 길 도대체 미국은 무슨 짓을 했나 조선은 ‘망한 것’이 아니라 ‘당한 것’이다 일본이 조선을 강탈하는 데 미국의 역할은 어느 정도였을까? 이제까지는 묵인, 방조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우리는 카스라-태프트 밀약을 알고 있다. 여기서 카스라는 1905년 당시 일본의 수상이고 태프트는 미국 육군 장관이었으며 3년 후 미국 27대 대통령이 되는 인물이다. 최근 들어 일본이 조선을 강탈하는 데 묵인, 방조한 정도가 아니라 적극 주선, 추동했다는 주장들이 여기저기서 제기되고 있다. 일본의 조선 독식이 결정된 것은 러일전쟁이었는데, 바로 이 러일전쟁에 천문학적인 전비를 지원한 것이 미국이었다. 두 권의 책을 권한다. 하나는 『임페리얼 크루즈』이고 다른 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건이다. 1.사건배경(事件背景) 4차례나 일본 제국의 총리를 지낸 정치가 이토 히로부미는 1905년 대한제국과 을사늑약을 체결하는 대에도 크게 역할 을 한 장본인이다. 1909년 이에 분노한 만주의 독립 운동가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유승렬, 김성화, 탁공규는 7인동맹을 맺고 처단을 계획했다. 2.사건개요(事件槪要)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15분 일본 제국의 전 총리이자 초대 조선통감이었던 추밀원 의장 이토는 러시아 재 무상 블라디미르 코콥초프(Vladimir Kokovtsov)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 역에 도착한 후, 약 20분 정도 차내에 서 코콥초프와..

대한제국 13년

대한제국(大韓帝國)은 1897년(광무 원년) 10월 12일부터 1910년(융희 4년) 8월 29일까지 한반도(韓半島)를 비롯, 제주도 및 울릉도 등 한반도 인근의 도서와 해역을 통치하였던 제국이다. 대한제국의 공식적인 약칭은 대한(大韓), 한국(韓國)이다. 때때로 대한민국과 구별하기 위해 구한국(舊韓國)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고 1910년 일제 강점기 이전이라고 하여 구한말(舊韓末)이라고도 한다. 대한제국은 자주성과 독립성을 한층 강하게 표방하기 위해 사용된 의례상·의전상 국호로, 대한제국의 나라 이름은 ‘대한’(大韓)이다. 이는 ‘삼한’(三韓)으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삼한인 고구려, 백제, 신라를 하나로 아울렀으므로 대한이라 한다. 여기에 국호를 변경하면서 제국임을 선포하였기에 ‘제’(帝)가 더해져 ‘대..

을사늑약서서

1904년 덕수궁의 큰 화재로 고종은 거처를 중명전(重明殿)으로 옮기고 편전으로 사용되었는데, 중명전(重明殿) 이 곳에서 나라의 비극이 일어나게 된다. 1905년 11월 일제는 무장군인을 앞마당에 배치한 후 을사늑약을 쓸 것을 독촉하고. 살벌한 분위기를 매일 같이 연출했지만 고종은 끝끝내 그 독촉을 거부했었다. 그러나 이미 대한제국은 망국으로 치닫고 그 역사의 흐름을 고종 혼자 막아낼수 없었다.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 독립운동의 발원지 러시아 연해주 연해주는 독립운동의 발원지라 할 수 있다. 고종의 밀사로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정사로 파견되어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호소했던 이상설을 비롯하여 최재형과 안중근의 활동무대 이기도 했다. 이상설은 헤이그에서 바로 연해주로 와서 독립운동을 했는데 1911년 권업회 창설과 1914년 대한광복군정부 수립을 주관하여 정통령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최재형은 연해주에서 사업으로 벌은 많은 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지원하다가 일제에 발각되어 사살되었다. 안중근은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등박문을 저격하기 전에 연해주에서 무장항일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또한 홍범도를 비롯하여 많은 무장투쟁 세력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연해주 우수리스크 수이푼 강가에 외롭게 모셔져 있..

"조선민족운동 연감”/도서

일본 경찰이 작성한 상해임정 모든 것 "조선민족운동 연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탄생부터 13년간 아주 상세한 기록과 인명이 수록되어있다. 임시정부 원년의 도입부분은 다음과 같다. 1919년 대정 6년 4월 (4)주요결의사항 국호 급 관제(官制)등 결의 (5)국무원선거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경성임시정부내무총장) ◇외무총장 김규식 ◇재무총장 최재형 ◇교통총장 신석우(경성임시정부교통총장) ◇군무총장 이동휘 ◇법무총장 이시영 ◇국무원 비서장 조소앙 ◇내무차장 신익희 ◇외무차장 현 순 ◇재무차장 이춘숙 ◇교통차장 선우혁 ◇군무차장 조성환 ◇법무차장 남형우 (6)임시 헌장을 의결 이외에도 바뀐 임시정부 요인들의 명단이 연도별로 모두 나와 있다. 김구, 이동녕, 이광수, 신익희, 여운형의 이름기록이 많이..

근대 태동(조선후기)

1. 근대 사회로의 지향 ■ 자본주의 맹아론 자본주의 맹아를 찾고자 하는 연구는 기본적으로는 민족사를 체계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새대 구분 논쟁에서 비롯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일제의 시민 사학에서 의도하였던 정체성론(停滯性論)에 대한 비판에서 제기되었다. 정체성론에서는 한국 민족사의 내적 발전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무기력하고 퇴영적인 민족성으로 인하여 결국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고 하여 일제의 침략 과정을 은폐하고자 하였다. 이에 선각자들은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한국사의 사회․경제적 측면에서의 체계적 발전 과정을 치밀하게 고증하였다. 특히 일제가, 정체되었다고 본 조선 후기 사회의 새로운 움직임을 주목, 실학으로 나타난 근대 지향적 사상과 사회․경제면에서 보인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싹을 찾아냈다. 자본주의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