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대한제국. 근대사 40

대한제국에 온 미국 공주~~서글픈 역사의 흔적

작성일 : 2016. 01. 05 1905년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딸이 대한제국을 방문했을 당시의 사진이 공개됐습니다. 구한말 서글픈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사진들을 장세만 기자가 소개합니다. 일본에게 외교권을 빼앗기게 되는 을사늑약 두 달 전인 1905년 9월 당시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21살 딸로 '워싱턴 사교계의 공주'로 불리던 앨리스 루스벨트가 인천항에 도착합니다. 그동안 밀사를 보내는 등 미국 대통령에게 대한제국의 독립 유지를 애타게 호소해 온 고종 황제는 구원의 천사가 왔다며 앨리스를 극진히 대접합니다. 앨리스가 지나갈 도로는 미리 보수했고, 황제 전용열차를 내줬으며 황실 가마에 태워 왕릉을 관람까지 시켰습니다. [이진현 학예연구사/서울역사박물관 : (앨리스 방한 시) 황실악단이 미..

[김갑수 근·현대사]35 한국 역사 1백년대 제1대사건

[김갑수 근·현대사]35 한국 역사 1백년대 제1대사건 이승만이 왕조시대 사람이어서 권위적이었다? 김갑수 | 2014-10-31 14:36:17 이승만이 왕조시대 사람이어서 권위적이었다? 강준만 교수의 『한국현대사산책』 시리즈는 매우 의미 있는 저작물이다. 이 책들은 1940년대부터 2000년대에 이르는 우리 현대사를 23권의 방대한 분량에 담아 놓았다. 이전의 근대사 산책 시리즈 10권을 포함, 무려 33권에 달하는 강 교수의 저작물은 우리 근·현대 역사의 정치, 경제는 물론 사회, 문화 부문까지 세심히 기술하고 있다. 저널리즘 전공자로서 이만 한 역사물을 집필했다는 것은 강준만 교수의 저력과 성실성을 충분히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게다가 강 교수가 보이는 정치와 역사에 대한 관점과 견해는 대단히 합..

상동교회(스크랜톤 선교사, 전덕기 목사, 이준열사)

■ 상동교회(스크랜톤 선교사, 전덕기 목사, 이준열사) ↑상동교회 연혁, 2015년 현재 127주년이 되었다.(1888-2015) ●상동교회 연혁, 1885. 05. 03 스크랜톤(william B. Scranton)선교사 서울에 도착하여 선교사역 시작. 1886 스크랜톤 선교사 정동병원 설립, 병원선교시작. 고종황제 시(施)병원명 하사. 1887 남대문 근처 상동으로 병원을 옮겨서 선교하다. 1888. 10. 09 상동교회를 창립하고 대지를 구입하다. 1893 스크랜톤 목사 초대 상동교회 담임목사 취임. 1895 - 1907 달성궁(현 한국은행터)내에 건물을 구입하여 한? 달성교회로 호칭하다. 1898 전덕기 입교, 엡윗 청년회 조직, 민족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1899 전덕기 공옥(攻玉)학교 설립, ..

이회영과 상동교회(李會榮과 尙洞敎會)

■이회영과 상동교회(李會榮과 尙洞敎會) 오늘날 한국교회는 왜 사회적 비난을 받는가? 그것은 상동교회와 같은 현실에 적극 참여하는 민족 교회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항일광복운동과 민주화 통일운동을 했던 문익환. 장준하 같은 한신 계열의 민족적 기독교인들이 배출하게 된 배경에는 상동교회와 같은 민족정신을 가진 기독교 때문 이였다. 오늘날 한국기독교는 자본주의 바알종교가 다 되어 빛과 소금을 역할을 못하고 있다. 종교라는 것은 민족과 민중이 처한 현실을 변혁시키지 못하고, 현실에 순응할 때 더 이상 존재의미가 없게 된다. 민족과 민중이 처한 현실에 고통을 느끼며 동참하는 종교들이 교리들은 다를지라도 참 종교이며 참 종교인들이다. 이회영,상동교회에서 신흥무관학교설립을 결의하다 당시 우당 선생을 이해하려면 '상..

대 조선 독립단(大朝鮮獨立團)

■ 대 조선 독립단(大朝鮮獨立團) ◈설립자 박용만(朴容萬) ◈설립일시 1919년 3월 ◈해체일시 1933년 박용만(朴容萬)이 1919년 미국 하와이에서 조직되었던 항일운동단체로, 호놀룰루에서 단원 350명을 규합하여 1919년 3월에 조직하였다. 이 단체의 목적은 독립운동에 한국민족의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원동(遠東)의 각 단체와 더불어 대동단결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운동자금을 모금, 각지와 연락하여 군사운동을 후원하며, 출판과 외교사업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또, 1919년 갈리히연합회에서 창간한 ≪태평양시사 太平洋時事≫를 인수하여 기관지로 삼았다. 1919년박용만은 하와이를 떠나 중국 북경(北京)에 가서 군사운동단체들과 연락하며 군사통일회를 조직, 군사운동에 노력..

제1차 세계대전시기(1914-1918)의 극동지역 정세

■ 제1차 세계대전시기(1914-1918)의 극동지역 정세 중국-전쟁 중립선언 제1차 세계대전은 열강들 사이의 식민지재분할을 위한 투쟁을 무력적 수단에 호소하게 된 것으로 자본주의 국가들 간의 국제적인 대립에서 비롯되었다. 즉 19세기 말부터 후발 제국주의 국가인 독일이 급격하게 팽창하면서 세력관계와 영토관계에 심한 불균형이 일어나자 세계적인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제국주의의 반식민지로 전락한 중국은 유럽대전의 발발과 동시에 전화(戰禍)가 자국에게 파급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1914년 8월 3일 대총통 원세개의 이름으로 중국의 영토, 수역 또는 조차지 등에서의 전투행위 억제를 교전국에 요청했다. 이어 8월 6일 중립규칙 24개조를 발표하고 1차 세계대전에서의 중립입장을 선언했다. 일본-독일의 조차지 산동..

조선총독부 청사(朝鮮總督府廳舍)

제목 조선총독부 청사(朝鮮總督府廳舍) 시기 1929년 장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세종로 1-91) 경복궁 대상 조선총독부 청사 설명 조선총독부청사는 당시 일본과 식민지 통틀어 가장 큰 건축물이며, 동양 최대의 근대식 건축물이었다. 역사의 흐름에 따라 미 군정청청사 인민군청사 정부청사 국립중앙박물관 등을 거쳐 민족정기회복 위해 해체되었다. 경과 1912 설계 1916.06.25 땅의 신에게 공사의 안전과 건물의 번영을 기원하는 제사의식 지진제 거행 1916.07.10 착공 1920.07.10 정초식 거행 1923.05.17 상량식 거행 1926.01.04 완공(일본과 식민지 통틀어 가장 큰 건축물, 동양 최대의 근대식 건축물) 1926.01 남산 왜성대의 구청사에서 경복궁의 신청사로 이전 192..

만주,연해주의 항일독립운동 단체들

SOY한국사/일제시대 http//desert>tistory.com l 2012. 06. 06 [일제] 8. 항일 독립 전쟁 (신민회, 남만주, 삼원보, 경학사, 밀산부 한흥동, 신한촌, 중광단, 대한독립단, 동제사, 신규식, 신한 혁명당, 대동 단결 선언, 신한 청년단, 부민단, 서로 군정서, 한족회, 대한 독립군, 대한 광복군 정부, 대한 국민의회, 이상설, 성명회, 권업회, 구미 위원부,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홍범도, 대한 통의부, 3부,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미쓰야 협정, 보천보 전투, 민족 혁명당, 한국광복군) ●항일독립전쟁 [1]독립운동 기지의 건설 1. 신민회의 활동 2. 독립운동 기지의 설치 목적 (1) 항일 독립운동 거점 마련 (2) 무장 독립 전쟁 수행 (간도, 연해주) a)..

안중근 유해, 이토 히로부미 무덤아래 있다?

■ 안중근 유해, 이토히로부미 무덤아래 있다? Phogrho | 2015. 09. 15. 00:01 [서평] 김월배 교수의 서울 효창운동장에 있는 안중근의사의 가묘(假墓) 사진을 본다. 정면 오른쪽에 흑대리석으로 된 안내석이 서 있다. "이곳은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봉환되면 모셔질 자리로 1946년에 조성된 가묘입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유해가 없는 '가짜 무덤'이 가묘다. 안 의사의 유해는 어디에 있을까. 가묘는 '주인'을 맞을 수 있을까. 안 의사의 사형은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4분에 집행되었다. 105년이 지났다. 1세기를 넘는 긴 시간 동안, 안 의사는 이국 땅 차디찬 곳에 묻혀 있다. 국민들로부터 독립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지만 유해봉환을 위한 정부의노력은 눈에 띄는 게 ..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신한혁명당

■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신한혁명당 1. 제1차 세계대전 전후 국내외 독립운동의 양상 제1차 세계대전으로 전쟁에 휩싸이게 된 러시아와 그 영향권에 있는 중국은 유화적인 대한인(對韓人) 정책을 철회하고 당시까지 합법적 한국독립운동단체조차도 해산시키는 방향으로 선회하였다. 그 결과 제1차 세계대전이전까지 러시아령·서북간도 등 각지의 독립운동기지에서 독자적으로 한인자치 및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단체인 권업회(勸業會),·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 북간도의간민회(墾民會) 등이 이 시기를 전후해 해산 당했다. 또한 서간도의 부민단(扶民團)과 신흥학교(新興學校)도 백두산서편으로 이동해 백서농장(白西農場)으로 위장한 채 유지될 정도로 운영이 어려워졌다. 1910년을 전후해 애국지사들이 이들 지역에 망명해서 심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