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변
▲명성황후영정(명성황후 생가소장품)
▲명성황후 시해 사건 가담자들>>>이들 중 신문사사장, 장관이 된 일본 지성인도 가담 했다.
▲경운궁 대안문을 나서는 명성황후 장례 행렬. 사진 뒤에 ‘황후의 운구 장면’이라고 적혀 있다.
명성황후(1851~1895) 국장(國葬) 사진 3장이 나왔다. 양상현 순천향대 교수(건축학)는 미국 럿거스대가 소장한 그리피스 컬렉션에서 명성황후 국장 사진을 발견해 7일 경향신문에 공개했다.
새로 발견된 사진은 경운궁 대안문(大安門)을 나서고 있는 장례 행렬, 명성황후의 신백(神魄)을 모신 신련(神輦 : 신주를 모시고 가는 신주가마), 행렬을 따르고 있는 곡궁인(哭宮人)들의 모습이다.
대한제국 선포(1897년 10월12일) 한 달 뒤 치러진 명성황후 국장 사진은 러시아 기자 세르게이 시로먀트니코프가 촬영해 표트르대제 박물관에 보관됐던 것이 2008년 처음 공개됐다.
그러나 이 사진은 소복 차림의 인파가 운집한 장면으로 장례 상황을 정확히 알기 어렵다. 반면 이번에 나온 사진들은 국장 당시 현장을 연결된 장면으로 보여준다. 이와 함께 시해 후 1년간 동구릉에 있던 명성황후의 묘소 등의 사진도 처음 나왔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전말을 작성 보고한 장본인 에조(英臟)이다(이 보고서를 일명 에조보고서라 한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함께 참여했던 20인의 사진이다.
에조를 비롯한 시해사건에 참여한 20인 모두가 일본인은 아니었다.
친일파조선인들 역시 가담했는데, 이 시해사건이 대내외적으로 알려지자 일본은
가담했던 조선인들과 함께 대원군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다.
▲에조 보고서
■ 에조보고서 전문”ㅣ 명성황후 시해 에조 보고서
에조(英臟) 보고서는 명성황후 살해사건발생 71년만인 1966년 한 일본인의 역사학자에 의거 최초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서 시해(弑害)란 말은 부모나 임금, 국가 원수의 생명을 해침을 말하는 것임으로 맞지 않는 말이다.
“에조 보고서란” 명성황후 살해사건에 가담한 에조(英臟)라는 한 일본인의 보고서로서 1895년 10월 08일(음력 8월 20일) 일본이 명성황후를 살해에 가담한 전말을 사건 직후 바로 작성되어 스에마쓰 법제국장에게 전달된 문서를 말한다. 당시 일본은 살해사건에 가담한 일본의 관련자 처벌 수위를 낮추기 위해 작성된 것이라 한다.
이 “에조보고서 전문”은 명성황후 살해사건발생 71년만인 1966년 한 일본인의 역사학자에 의거 최초 모습을 드러냈다.
※혹 시해(弑害)란 말을 쓴 경우도 있지만 시해란 부모나 임금, 국가 원수의 생명을 해침을 말하는 것임으로 맞지
않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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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조 보고서
일본 총독부에서 편지형식으로 본국에 정식으로 보고한 "에조보고서"라는 것이 있는데, 이 자료에의하면 에조라는 사
람이 명성황후의 시해장면을 아주 정밀하게 묘사해 놓았다.
먼저 낭인들이 20명 정도 궁에 쳐들어와서 고종을 무릅꿇게 하고 이를 말리는 世子의 상투를 잡아 올려서 벽에다 던져버리고 발로 짓밟았다. 그리고 명성황후를 발견하자 옆구리 두쪽과 배에 칼을 꽂은 후, 시녀들의 가슴을 다 도려내고 명성황후의 아랫도리를 벗겼다.
그리고 20명이 황후에게 강간을 했는데,...살아있을때도 하고 여섯명째에는 황후가 죽어 있었는데도 계속했다.
시체에 강간하면 시간이고 살아있는 사람에게 하면 윤간인데 명성황후는 시간과 윤간을 다 당했다. 그리고 이것을 말리는 충신의 사지를 다 잘라버렸다.(에조는 하지않았다)
어떤 놈들이 일국의 황후를 그렇게 대하는가!? 이런 경우는 인류 역사상 찾아 볼수 없는 인명수심의 행동이다.
그리고 칼에 난자 당한 너덜 너덜한 황후의 시신에 다시 얼굴부터 발끝까지 차례대로 한명씩 칼로 난자했다.(이 짓은 에도도 함)
그리고 황후의 가슴을 도려내는 행위를 거리 백성들이 쳐다보는 데서 자행했다. 그리고선 황후의 시신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다. 일본의 사학자가 이 문서를 발견하고 수치서러워서 공개를 안했다고 했다. 그 후 공개를 2002년 FIFA 한일월드컵 폴란드전때 했는데 당시 국내 언론에서 기사화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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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제군인이 궁궐로 침입하자, 황후는 궁녀들이 입는 옷으로 갈아입고 궁녀처럼 분장을 했다. 이에 일제군인들은 애를 낳은 여자임을 확인하기 위해 궁녀들의 옷을 모두 벗겨 가슴을 칼로 도려내고 그렇게 황후가 누군지 가려내는 일을 저질렀다.
그 와중에 아들 순종의 부인이었던 민씨비 역시 한 쪽 가슴이 도려지는 일을 당했고, 곧 명성황후를 찾아내자 고종과 아들 순종 그리고 민씨비가 보는 앞에서 국모의 배와 옆구리를 세번 칼로 찔렀다.
그리고선 황후를 조용한 뒷 뜰 로 끌고가, 아랫도리를 벗겨 이십 명이 돌아가며 강간을 했다. 에조가 경악을 금치 못하여 차마 자신은 하지 않았을 정도로 끔찍한 장면이었다고 한다. 그 뒤에 황후 시해에 공동책임을 지기 위하여 한명씩 돌아가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칼로 난도질을 하였고 마지막으로 이마에 칼로 십자를 그었다고 한다. 그 후에 이 모든 일을 덮기 위하여 시신을 불로 태워버렸다고 전한다.
출처_ 네이트판, 위키백과, 지식인
■사족(蛇足)
일국의 왕비를 찌르고 불태워 죽인, 그 시해사건 이후의 역사 또한 궁금하다. 더 비참한 지경으로 이야기는 굴러간다. 역사의 한 기록(한국학중앙연구원)을 인용한다.
“영·미·러 각국 정부는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자국 외교관들의 행동을 자제토록 지시하였다. 이등박문(伊藤博文) 이하 일본 정부 및 각국 주재 외교관의 다양한 사태 무마책이 적지 않게 작용하였다. 조선의 서양 외교관들은 이 사건에 미우라가 직접 관계되어 있다는 것까지는 밝혔으나 더 이상의 배후는 추구하지 못하였다.
상해에서 발간된 ‘북화첩보’(北華捷報)는 조선과 일본주재 통신원의 다양한 보고를 토대로 ‘사건의 주모자는 미우라의 전임자인 이노우에’라고 보도하였다. 사건의 지휘 계통은 ‘이등박문 내각(배후) 〉 이노우에(중개역) 〉 미우라(하수역)’였다는 뜻이다.
얼마 뒤 일본 정부는 감옥에 수감된 범죄자들을 ‘증거 불충분’이라 하여 전원 무죄 방면하였다. 그들은 감옥에서조차 영웅 대우를 받았고, 미우라가 석방되어 동경에 도착하자 일본 국왕은 그의 ‘노고’를 치하하기까지 하였다.”
을미사변은 항일(抗日) 의병의 봉기를 불렀다. 일본군 밀정을 살해한 백범 김구 선생이 독립운동에 뛰어들고, 안중근 장군이 이등박문을 사살(1909년)한 이유가 됐다. 그러나 우리 역사는 끝내 나라를 잃고 만다.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일본 낭인 구니토모 히게아키의 후손이 을미사변 110주기였던,
2005년 경기 여주 명성황후 생가를 찾아 황후의 초상화 앞에서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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