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대한제국. 근대사

중국인이 쓴 통한의 조선 망국 보고서/량치차오

야촌(1) 2015. 3. 13. 00:18

중국인이 쓴 통한의 조선 망국 보고서

한겨레신문 2014.08.10

 

 

이토히로부미와 함께 있는 황태자 영친왕. 이토는 헤이그 밀사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순종을 세운 뒤,

초대통감 자리를 내놓고, 영친왕의 태사가 되어 마치 보모처럼 데리고 다녔다.(글 항아리 제공)

 

량치차오, 조선의 망국을 기록하다.

최형욱 엮고 옮김 ㅣ 글 : 항아리·1만5000원

 

“나는 눈물이 눈썹에 넘쳐흐름을 금치 못하겠다. 이제 조선은 끝났다. 지금부터 세상에 조선의 역사가 다시 있을 수 없고, 오직 일본 번속 일부분으로서의 역사만 있을 뿐이다.”

 

눈물의 주인공은 조선 백성이 아니다. 눈물은 청나라 말기 변법유신파의 지도자였던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의 뺨에 흘렀다. 량치차오는 캉유웨이(康有爲)의 제자로서 무술변법운동(1898)을 주도했으며, 신해혁명과 5·4운동 등 중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장면에서 중요한 구실을 한 실천적 지식인이다.

 

신채호·박은식 등 조선의 애국계몽주의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왜 남의 나라 일에 눈물까지 흘리며 애통해했을까. 이 눈물은 언뜻 순수한 의미의 동정으로 보이지만, 실은 청나라의 속국이었던 조선을 일본에 빼앗긴 데 대한 상실감이 더 짙게 배어 있다. 량치차오는 톈진조약에 따라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이 아니라고 청나라 스스로 인정한 점을 가장 애통해했다.

 

또한 조선을 ‘기자의 후손들’이라고 일컬으면서 조선 사람 전체를 싸잡아 매도했다. 남에게 기대기 좋아하는 천성을 갖고 있고, 당장 배부르면 미래에 대한 고민을 전혀 하지 않으며, 모욕을 당하면 분노하지만 금방 식어버린다고 조롱했다.

 

<량치차오, 조선의 망국을 기록하다>를 읽는 것은 괴롭다. 조선에 대한 청나라 최고 지식인의 삐뚤어진 인식을 대하는 것은 분통스럽고, 일본 제국주의 아가리에 제 발로 걸어들어간 우리 선조들의 어리석은 작태를 되짚는 것은 쓰라리다.

 

그럼에도 지금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세계 정세와 우리의 대응이 그때와 별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최형욱 한양대 중문과 교수가 이 책을 편역한 이유도 이것일 터다.

 

량치차오는 청나라 역시 곧 조선처럼 제국주의의 먹잇감이 될 위험에 처해 있다는 강한 위기감을 갖고 있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을 자신이 창간한 <신민총보> 등을 통해 잇달아 발표한 이유도 타산지석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그래서인지, 조선의 망국 과정에 대한 그의 취재와 분석 자체는 상당히 정확하다.

 

 

↑량치차오(양계초). 글 항아리 제공

 

한일병합 결정뒤 군신들 대연회

지도층과 양반의 사리사욕 개탄.

 

그는 “조선 멸망의 최대 원인”이 궁정과 양반에 있다고 강조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대규모 토목공사, 명성황후를 비롯한 민씨 일가의 전횡, 일본당과 중국당으로 나뉘어 외국 군대를 불러들여 서로 죽고 죽인 싸움 등은 우리가 익히 아는 바다.

 

눈여겨볼 만한 대목은 양반에 대한 서술이다. “사실상 조선국 내에서 자유의지를 가진 자, 독립 인격을 가진 자는 오직 양반뿐이다. 저 양반이라는 자들은 모두 높이 받들어지고 넉넉한 곳에 처하며, 교만하고 방탕하여 일하지 않고, 오직 벼슬하는 것을 유일한 직업으로 삼았다. 

 

다른 나라에서 관리를 두는 것은 국사를 다스리기 위함인데, 조선에서 관리를 두는 것은 오직 직업 없는 사람들을 봉양하기 위함이었다.” 량치차오는 이른바 지도층이라는 자들이 사리사욕만을 챙길 뿐 국가에 대한 공적 관념이 희박한 점을 개탄했다. 

 

가장 황당한 일화 중 하나는 일본 정부가 한일병합조약을 공포하기로 이미 결정했는데, 대한제국 정부가 순종 황제 즉위 기념일을 맞아 축하연을 연 뒤 발표하기를 청해 발표를 며칠 미룬 일이다.

 

“이날 대연회에 신하들이 몰려들어 평상시처럼 즐겼으며, 일본 통감 역시 외국 사신의 예에 따라 그 사이에서 축하하고 기뻐했다. 세계 각국의 무릇 혈기 있는 자들은 한국 군신들의 달관한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보기에 조선은 안으로부터 무너져 내렸다. “조선을 망하게 한 자는 처음에는 중국인이었고, 이어서 러시아인이었으며, 끝은 일본인이었다. 그렇지만 중·러·일인이 조선을 망하게 한 것이 아니라 조선이 스스로 망한 것이다.”

 

량치차오는 송병준이 이끄는 일진회가 한일강제병합에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송병준과 이완용이 경쟁적으로 일본에 아부한 점, 일본이 이들 친일파에게 대대손손 유복하게 먹고살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준 점 등을 여실히 적었다. 

 

또한 일본이 이토 히로부미라는 영악한 인물을 앞세워 조선 황실과 고위 관리들의 마음을 놓게 한 뒤 조선을 실질적으로 장악해나가는 과정을 상세히 묘사한다.

 

조선인을 비웃던 량치차오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과, 국치의 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한 충청도 금산군수 홍범식에 앞에서는 옷깃을 여미고 찬양한다. “무릇 조선 사람 1000만명 중에서 안중근 같은 이가 또한 한둘쯤 없지는 않았다.

 

내가 어찌 일률적으로 멸시하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유의 사람은 본래 1억명 중에서 한둘에 지나지 않으며, 설령 한두 사람이 있더라도 또한 사회에서 중시되지 않는다. 대체로 조선 사회에서는 음험하고 부끄러움이 없는 자가 번성하는 처지에 놓였고, 정결하고 자애하는 자는 쇠멸하는 처지에 놓였다.” 자, 그때와 지금은 얼마나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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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나는 조선의 멸망을 보며 춥지도 않은데 전율을 느낀다”

그 옛날 무성했던 장대 궁전의 버들!

겨울에 웅크리고 벌레처럼 엎드려 있다가

굴욕과 치욕을 참고 끈질긴 힘을 떨쳐 일어난

일본의 손에 조선의 역사는 끝이 났다

이에 중국의 지식인 량치차오는

조선의 종말에 대해 비탄을 금치 못하며 붓을 들었다.

 

조선을 먹잇감 삼아 열강들이 각축을 벌인 세기말 세기 초의 상황에서 철저하게 유린당하는 조선을 바라보며 중국의 지식인이 격정적 감정을 감추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제국주의 세력의 패권싸움에 직면해 수난을 당하고 있던 중국의 동병상련 감정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대외의존적인 안일과 무능에 머물렀던 조선 사람들에 대한 한탄, 과거 중화주의의 세례를 받았던 조선을 일본의 손아귀에 빼앗긴 것에 대한 제국주의적 시각에서의 안타까움, 나아가 조선을 사례로 삼아 중국 인민에게 교훈을 심어주려는 의도가 복합적으로 얽힌 것이었다.

 

“장대 궁전의 버들이여! 옛날에는 무성하더니 지금도 그러한지? 설사 긴 가지 옛날과 같았더라도, 필경 남의 손에 당겨져 꺾였으리라!” 청일전쟁 전의 조선과 청일전쟁 후의 조선을 비교해볼 때, 더구나 청일전쟁 후의 조선과 러일전쟁 후의 조선을 비교해볼 때, 나는 눈물이 눈썹에 넘쳐흐름을 금치 못하겠다.

 

이제 조선은 끝났다. 지금부터 세상에 조선의 역사가 다시 있을 수 없고 오직 일본 번속 일부분으로서의 역사만 있을 뿐이다. 전적에 이르기를, 상례의 지극한 애도는 군자가 그 근본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했다.

 

지금 3000년 된 이 오래된 나라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멸망하는데 그와 친속의 관계를 가진 이로서 어찌 그 종말을 장식하게 된 사실에 대해 기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이로써 비애를 생각하니 가히 그 비애를 알겠다.”_「조선망국사략」

 

“40년 동안 일본이 했던 바를 하고자 했던 나라는 한 나라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 열매를 획득한 나라가 어째서 오직 일본이었는가? 우리 중국이 조선에서 쌓았던 2000년의 위엄 위에 다시 대의명분으로 임했다면, 일의 추세가 순조로워 일본은 우리 만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러시아가 그 광활한 영토와 많은 인민을 가지고 조선을 빼앗아 선성先聲을 울렸고, 조선에 대해 중시한 것 또한 일본의 몇 배가 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지극히 순조롭지 못한 지경에 처해서도 지극히 끈질긴 힘을 떨쳐 이 두 강자와 패권을 다투었고, 그 득실의 정세는 믿었던 바에 반대가 되었다. (…) 일본은 조선을 도모함에 수십 년간 정책이 일관되었다. 

 

처음에 일정한 계획을 세우고 나서부터 그에 따라 행하고, 일사불란했다. (…) 일본은 치욕을 참아내며 조선의 바쳐짐을 구했다.”_「일본병탄조선기」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조약에 의해 한국은 일본에게 통치권을 빼앗겼고, 한국이 멸하는 과정에 동정심을 가지고 애석해하던 중국의 계몽주의 사상가 량치차오는 같은 해 9월 14일 발표된「조선 멸망의 원인」에서 비판적이고 냉소적인 논조를 표출하기에 이른다. 량치차오는 중국의 유신파 계몽주의 지식인의 대표적 이론가이자 실천가였다.

 

그가 태어난 1873년은 아편전쟁이 일어난 지 33년, 태평천국의 난이 진압된 지 10년 된 해로 서구의 충격이 한창 중국으로 물밀듯 거세게 쳐들어오던 격동의 전환기였다. 량치차오는 1880~1890년대에 캉유웨이와 함께 중국의 가장 중요한 진보 정치 사상가이자 지식인으로서 사회변혁·경세치용의 경향에서 근본적으로 제도를 개혁할 것을 강조했다.

 

특히 청일전쟁의 실패를 계기로 개량주의적·계몽주의적 사회 사조를 형성해나갔다. 계몽사상과 학술·문학계를 혁신하기 위해 근대 서구 사상 및 과학기술, 정치·경제·사회·문화 각 분야의 총체적 개혁을 추진해 부강한 민족국가를 건립하기 위해 노력해 중국 내에서 절대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조선의 망국에 대한 슬픔과 동정에서 조소까지

 

1897년 초 조선 언론에 량치차오가 처음 소개되었고 신채호, 박은식, 주시경 등 조선의 지식인들은 그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량치차오는 주로 탁월한 식견과 글로 찬양되었고, 특히 조선에 대한 동병상련의 감정으로 친근하고도 우호적으로 다가왔다.

 

1904~1911년, 일제가 끈질기고도 벼락같은 수단으로 자신들의 침탈의 야욕을 채우던 시기, 량치차오는 조선에 대한 글과 시문을 집중적으로 발표했다. 이 책은 바로 량치차오 전집에서 조선에 관한 모든 글을 빠짐없이 추려내 수록한 것으로, 「조선망국사략」 「일본의 조선」 「지난 1년 동안의 세계 대사건 기록: 조선의 멸망」 「아! 한국, 아! 한국 황제, 아! 한국 국민」「한일합병 문제」「조선 멸망의 원인」「일본병탄조선기」「조선 귀족의 장래」「가을바람이 등나무를 꺾다」「조선애사」「여한십가문초서」를 다루고 있다.

 

이들 글을 통해 조선 망국의 역사를 시기적으로 구분하여 조선과 청일 양국의 관계, 강화도 조약, 임오군란, 갑신정변, 톈진 조약, 청일전쟁, 시모노세키 조약, 명성황후 시해, 러일전쟁, 헤이그 밀사 파견 사건과 한국 황제 양위, 한일병합조약 등 조선의 내부 상황과 조선을 둘러싼 열강의 각축전에 관한 사건들을 분석하고 있다.

 

물론 그의 입지는 조선 망국에 대해 격앙된 슬픔을 드러낸 것뿐만 아니라 제국주의적 속내를 감추지 못하는 복합적인 것이며, 따라서 당시 국제정치의 현실을 받아들이던 진보 지식인의 이중성(?)과 한계도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

 

한편 그의 글들은 문학혁명을 주도했던 이로서 신新문체 문장의 중요한 특징을 드러내고 있는데, 그러한 점이 이 책에 실린 글들을 단순히 역사 산문이 아닌, 하나의 문학작품으로 읽게끔 한다. 량치차오는 특히 시문에서 정감의 적극적인 표출을 강조했고, 운문에서도 ‘곧장 내뿜는 정감 표출법’을 중시했다. 

 

그리하여 그의 글들은 조선의 멸망을 바라보며 느끼는 감정을 눈물을 주체할 수 없을 만큼의 비애로 극대화하여 표출하고 있다.

 

“일본은 조선이라는 열매를 어떻게 획득했나”

 

량치차오는 「일본병탄조선기」 등에서 일본이 중국과 러시아 등 다른 열강들을 제치고 어떻게 조선이라는 열매를 획득했는지를 묘사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일본이 식민화에 성공한 것은 단지 천행이라고만 할 수 없는데, 러시아가 먼저 조선을 빼앗았음에도 일본은 그 순조롭지 못한 지경에 처해서도 지극히 끈질긴 힘을 떨쳐 강자와 패권을 다투었고, 전쟁을 벌여 이겼을 뿐 아니라 그들만의 ‘도道’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즉 일본은 량치차오에 따르면 “8단(端)을 알았다”. 

 

첫째, 일본은 조선을 도모함에 있어 수십 년간 정책이 일관되었고 일사불란하게 행동했다. 

         그들은 중국처럼 우왕좌왕하지 않고 치욕을 참아내며 조선의 바쳐짐을 구했다.

 

둘째, 일본 역시 조선에서 여러 차례 실패했지만, 저들은 그 때문에 처음에 세운 뜻을 저버리는 일이 결코 없었고,

          마치강물과도 같이 어떤 때는 고개를 휘감아 돌고, 어떤 때는 땅으로 흘러가고, 어떤 때는 모래와 자갈에

         스며들고 내려가 반드시 바다에 이르고서야 그쳤던바, 큰일을 위해 굴욕을 참았으며 그 정성은 귀신도 피할

         만한 것이었다.

 

셋째, 일본은 기회를 살피는 데 지극히 민첩해 추호라도 이용할 수 있는 것이라면 절대로 놓쳐서 달아나지 않게 했

          다.

 

넷째,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매진하여 다른 나라가 하지 않는 일을 했는데, 가령 우정총국 사건이나 명성황후 시

           해와 은 것이었다. 늘 벼락같은 수단으로 당하는 자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솜씨를 발휘했던 것이다.

 

다섯째, 다른 열강들은 오직 궁정만을 조종하거나 세력을 떨치는 자들만 목표로 삼았던 반면, 일본은 마치 수은이

              땅에 를 때 들어가지 않는 구멍이 없듯이 어느 방면을 막론하고 모조리 힘을 썼으며, 또 당파의 이동(異

              同)과 이(離合)을 꿰뚫고 있었다. 

 

              그리하여 조선인들끼리 싸움을 붙이기도 하고, 이들을 올렸다 내렸다 들었다 놓았다 해서 한결같이 자기

              나라리하도록 만들었다.

 

여섯째, 조선 인민 여론의 세력을 경영하는 데 일본은 40년 동안 한시도 게을리한 적이 없었다. 

            즉 일진회를 만들어 무형 유형의 교묘한 책략들을 주입시킨 것이다.

 

일곱째, 다른 나라들은 오로지 정치 세력을 키우는 데 몰두한 반면 일본은 경제상의 세력과 정치상의 세력을 겸해

              맹렬나아가며 쉬지 않았다.

 

여덟째, 다른 나라의 주동자들은 중국의 위안스카이나 러시아의 베베르 같은 이가 오직 한두 명에 불과했던 반

              면, 일본여러 방면에 걸쳐 활동하는 이들이 마치 하나의 군대에 빗댈 만하며, 마치 유격편대가 기발

              하게 의표를 찔러 승리하는 것과 같았다.

 

이처럼 일본은 우승열패가 거짓이 아님을 믿으면 자연히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 보고, 마음으로 도모하며 눈으로 집중했던 것이다. 이에 량치차오는 “조선의 멸망을 보며 춥지도 않은데 전율을 느낄”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망하지 않는다면 망하게 할 수 있는 자는 없다”

 

량치차오는 일본을 비난하는 한편, 그의 여러 글을 통해 조선이 망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조선과 조선 사람에게 있다고 지적했다. 나라가 총체적으로 부실한 가운데 특히 정치가 부재해 그 최대 원인은 궁정이라 인식했으며, 조선 황제 고종의 개인적 자질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또한 비판의 칼날을 조선의 양반들에게 들이댔는데, “저들은 개인만 알고 국가의식이 전혀 없다”고 보았다.

한일병합 발표를 앞두고도 황제 즉위 4주년 기념 연회를 자연스럽게 치른 조선 군신들의 어이없는 행태를 볼 때 그들에게서 국가의식과 주권의식은 찾아보기 어려웠던 것이다. 

 

량치차오는 지도층의 이러한 성향이 결국 친일파를 만들어내 망국의 직접적인 주역이 되게 했다고 여겼다.

또한 중국에 대한 계몽 효과를 높이기 위해 비판적이고 냉소적인 논조를 띠었는데, 그중 안중근 의사에 대해서만큼은 예외적으로 긍정적이었고 찬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의 조선에 대한 인식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긍정적인 대목이다.

 

「가을바람이 등나무를 꺾다」는 바로 안중근 의사를 제재로 한 장시長詩로, 량치차오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는 장면을 비장하게 묘사함으로써 씻을 수 없는 조선의 국치를 안타까워하며 많은 감정을 표현해냈다. “가을 밤 불어오는 피리소리는 관산의 달빛에 흩어지고, 역로의 푸른 등불은 흰 눈을 붉게 물들여 비춘다”

 

“대국은 선진의 수급을 슬퍼하고, 망국의 유민은 위공의 피에 눈물 흩뿌린다” “기대의 책무를 모를소냐 뉘 집 자식인데” “피가 다섯 걸음이나 흘러넘치며 대사는 끝이 나고, 미친 듯 호통한 웃음소리에 산 위 달도 높구나”와 같은 시구를 통해 나라를 위해 결연히 목숨을 바친 안중근 의사의 의거 상황을 비장하게 그려내면서 그의 기절을 호방하게 묘사해냈다.

 

당시에 역시 침략당해가던 중국에 등장한 적인 동시에 유신의 롤모델이기도 했던 이토 히로부미를 안중근 의사가 꺾어버린 데 대한 감정은 중국 최고의 지식인에게 복잡한 입장 속에 격정적 시정을 자아내게 했다. ‘가을바람이 등나무를 꺾다’라는 제목 역시 그러한 감정을 잘 상징하고 있다.

 

근세사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작품이라고 평가되는 이 시는 량치차오가 조선과 일본 사이의 제3자, 조선의 보호자, 일본의 경쟁자 등 복잡한 입장에서 써내려간 것이다.

 

조선이 인식한 량치차오,

량치차오가 인식한 조선

 

조선 지식인들에게 량치차오는 탁월한 식견을 지닌 선각자였고, 그의 글 속에 보이는 조선 멸망에 대한 동정과 애통함의 표현이 그를 친근하고 우호적인 외국 인사이자 동지로 느껴지게 했다. 량치차오는 비슷한 처지로 내몰리는 중국의 지식인으로서 제국주의에 침략당하는 조선뿐만 아니라 베트남, 인도, 세르비아 등 세계의 여러 다른 국가와 민족의 불행에 대해서도 동정과 관심을 표현했다.

 

특히 조선에 대해서는 그 정도가 깊었다. 왜일까? 조선과 중국이 ‘친속의 관계’에 있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량치차오의 글들에서 보이는 동정은 소국, 즉 자신의 일부가 이탈되는 데 대한 상실감과 애통함으로 여겨진다. 은연중 중화주의가 내재된 인식이고 정치가이자 사학자로서 중화제국의 지배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이해타산이 표출된 결과였다. 

 

즉 량치차오에게 조선은 그저 동지가 아니라 중국을 비춰볼 수 있는 아쉽게 잃어가는 속국인 동시에 또 다른 특수한 타자였고 이는 곧 경쟁자인 일본의 강권에 대한 견책과도 연결된다. 량치차오의 이런 인식들은 결국 중국의 계몽을 위한 교훈으로 활용되었다. 

 

중국인 량치차오에게는 이 부분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에 조선의 지배층 및 국민성에 대한 비판이 구체화되었던 것이다.

량치차오는 조선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지녔고, 조선의 망국 과정에 있어 적극적인 관심을 표출하면서 동정과 애통함을 보였다. 량치차오에게 조선은 서구와의 대비 속에서 중국을 비춰볼 수 있는 특별한 타자로서 미래 중국의 모습일 수도 있는 존재였다. 

 

당시 중국이 위기를 겪으면서 조선과 같은 운명에 처할 수 있다는 인식하에 조선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나타냈다. 중국을 계몽시키는 교훈으로 삼기 위해 10여 편의 글을 통해 조선에 대해 논의하면서 조선 황제의 실정을 비판하고 양반 통치 계층의 국가의식 부재와 열악한 국민성을 조선 망국의 원인으로 꼽았다. 

 

량치차오의 시각이 이중적이고 제한된 면이 있긴 하나, 이를 단순히 외국인의 시각으로 치부하기보다는 당시 깨어나지 못했던 조선의 상황을 냉철히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100여 년 전 량치차오가 조선의 망국 근원으로 꼽은 황실 및 지도층의 자질과 국가의식 부재를 오늘날의 한국은 과연 지니고 있는지 되돌아봄 직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