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대한제국. 근대사 40

한일합병(韓日合倂)

■ 한일합병(韓日合倂) 1910년(대한제국 융희 4) 일제의 침략으로 한일합병조약에 따라 국권을 상실한 사건이다. [시대] 근대 [분야] 역사/근대사 [사건발생]1910년 8월 29일(월요일) [성격] 국권침탈 사건 [사건 종결] 1945년 8월 15일(수요일) [사건 관련인물 ◇일본의 데라우치, 조선 총독,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역사적 배경 경술국치·국권 피탈·일제강점기·일제병탄 등으로도 불린다. 대원군 집정 이후 쇄국정책을 고수하던 조선은 1876년(고종 13) 일제의 강압적인 외교에 눌려 강화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개항을 맞이하였고, 제국주의 열강에 의한 군사·경제·정치적 압력에 직면하게 되었다. 개항초기 조선을 둘러싸..

일제의 잔학상-간도 참변(1920년)

■ 간도참변(1920년) 1920년 10월 하순 우리는 안도현으로 향하였다. 불령선인이 조직한 광복단이 봉천성 안도현 유두 산에 있었다. 한인 40여호와 중국인 3호로 된 부락으로 일본인은 한 발자국도 들여놓을 수 없는 항일 부락이었다. 이 부락은 모두가 광복단원으로 여러 가지 계획이 모두 여기서 모의되었다. 먼저 우리부대는 이 부락을 습격하여 가옥 40여 호를 불 지르고 광복단 연병 교관 및 제2대장, 외교부장, 외교부원 3명, 구장, 부구장, 광복단 병졸(총기 휴대 중) 등 10여 명을 독가스로 죽였다. 우리부대는 직동을 공격하였다. 직동에 있는 조선인 부락은 12호 가운데 중국인은 1호도 없이 모두 불령선인뿐이다. 총독부가 손을 댈 수가 없는 곳으로 자못 중대시 하는 곳이다. 여기서 우리 부대는 일..

러시아 연해주, 그 땅과 그 역사

김석동의 한민족 성장 DNA 추적(22) 1. 러시아 연해주, 그 땅과 그 역사 김석동전금융위원장 연해주(沿海州)는 흑룡강·우수리강 그리고 동해로 둘러싸인 땅으로 러시아 83개 연방지역의 하나인「프리모르스키(Primorskiy)지방」을 말한다. 면적은 약 16만 4700㎢로 러시아의 0.92%에 불과하나 우리나라의 1.6배 크기다. 80%가「시호테-알린산맥」등 산림지대이며, 평균기온은 1월 -20℃, 7월 +20℃이다. 인구는 약 200만 명으로 러시아 전체의 1.4%가 살고 있다. 주도(州都)는「블라디보스토크」로 약 62만 명이 살고 있고, 모스크바까지 9288㎞에 달하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종착지다. 두 번째로 큰 도시는 블라디보스톡 북쪽 약 112㎞에 위치한「우수리스크」로, 발해 유적지가 다수 분..

연해주의 한인들....

■ 연해주(沿海州) 한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와 연해주 재이주 1. 동방을 정복 한다는 의미 “울라디보스토크” “울라디보스톡”은 연해주란 주정부의 수도이다, 연해주라는 말은 러시아어로 “프리 모르스키 크라이”를 번역 한 것인데, ◇프리 - 근해, ◇모르스키 : 바다의, ◇크라이 : 주 라는 뜻이며 연해주란 바다에 연접한 주라는 의미의 연해주 이다. 「울라디보스토크」의 ◇울라디 : 정복하다. ◇보스톡 : 동쪽, 동방을 의미 한다고 한다. 2. 한일합방과 한민족의 이주 한반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러시아연해주에는 한민족인 고려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한민족의 연해주 대이동 시기는 1차로 1860년대 함경도 부근에 기근이 들어 식량을 구하고자 함경도 지방주민들이 월경을 하게 된 시기이고, 제2차 대이동은..

신한촌 기념비 서문

[신한촌 기념비(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톡 소재] 신한촌 기념비 서문 민족의 최고 가치는 자유와 독립이다. 이를 수호하기 위한 투쟁은 민족적 정신이며, 정사에 빛난다. 신한촌은 그 정신이 요람으로 선인들의 얼과 넋이 깃들고. 한민족의 피와 땀이 어려 있는 곳이다. 1910년 일본에 의하여 국권이 침탈당하자. 국내의 지사들을 신한촌에 결집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필사의 결의를 다졌다. 성명회와 권업희 결성, 한민학교 설립 신문 발간, 13도의 군 창설 등으로 민족역량을 수립하여 대일 항쟁 의지를 불태웠다. 그러나 한민족은 1937년 불행하게도 중앙아시아에 흩어지게 되고, 신한촌은 폐허가 되었다. 이에 대외 한민족 연구소는 3.1 독립선언 80주년을 맞아 선열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고 재러.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일본 천리대서 잠자는 선조들의 영정

(174)선조영정 | 일본 천리대서 잠자는 옛 숨결 중앙일보] 입력 1968.11.30 00:00 | 종합 3면 지면보기 우리나라 역대 명인의 초상화2백여 점이 일본의 천리대박물관에 소장돼 있다는 최근의 소식은 학계뿐만 아니라 온 국민에게 충격적으로 전해지고 있다. 덕수궁미술관·서울대박물관등 국내의 여러 박물관에 간수되고 있는 초상화가 고작 1백여점에 불과한데비하여 천리대소장의 그것은 굉장 한 게 아닐 수없다. 그중 1백여명에 달하는 선조의 모습은 이제 새롭게 대하게된 것이다. 그러나 아쉽고 분하게도 그것은 이미 남의 것. 우리에게 피와 숨결을 물려준 우리의 조상임에도 그 영정을 우리가 모실 수 없게 됐다. ● 5년 전 천리대에 후손의 청으로 공개 근엄 속에 구수한 인품 | 어버이모습 그대로…지금은 남의..

일본 천리대 도서관소장 ‘해외전적 문화재 조사목록’

■ 일본 천리대 도서관소장 ‘해외전적 문화재 조사목록’ 국립문화재연구소/2005(초판)/517쪽/비매품/하드커버/쟈켓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는 해외 소장 우리 전적(典籍)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해외 소장 전적문화재 조사 성과물로 일본 천리대학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해외전적문화재조사목록을 발간했다. 천리도서관에는 일제 강점기 때 조선사학의 기초를 다진 인물로 유명한 이마니시류(今西龍)가 경성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수집해 가져간 한국 관련 필사본과 목판본, 활자본 등 1천8백67종이 소장되어 있어 자료 가치가 높다. 이처럼 ‘한국학의 보고’로 알려진 천리대 도서관에는 고려시대~임란 이전 목판본을 비롯, 조선 초기 을해자판, 초주갑인자판, 병자자판, 갑진자판, 재주갑인자판 및 조선 후기 한구자판, 현..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의 재임기간 및 추진정책

조선총독부 청사 조선 총독부 휘장 ■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의 재임기간 및 추진정책 1905년 11월 18일 을사늑약 5개 조항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조선의 을사5적(敵) 사이에 이루어지고 초대통감으로 부임, 지배 와 간섭이 시작 되다. *을사 오적 :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 대신 권중현 순위 이름 재임기간 추진정책 비고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1906.03.02~ 1909.6 을사늑약과 고종황제의 양위, 한일합방 등 악명 높은 지배와 간섭이 강화되던 중 1909. 10월 만주를 방문하다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의사에 의해 10월 26일 사살됨. 이토히로부미는 일본에서 네 번 수상을 재임 후 부임함 2대 통감 소네 아라스케 (曾禰荒..

이토를 쏜 인중근의사의 권총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쏜 권총의 출처가 중요한 까닭은” [짬]의병연구소 소장 이태룡 박사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총의 출처를 밝히는 일이 뭐 그리 중요하냐는 반응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안 의사가 의병장 이진룡(이석대)과 바꾼 권총을 사용했다는 (毅菴柳先生略史)의 기록은, 하얼빈 의거가 한 영웅의 돌출행동이 아니라 구 한말 이래 의병운동의 정점에서 이뤄진 민족적 거사라는 사실을 반증합니다.” ‘의병 연구가’로 이름난 이태룡(의병연구소 소장) 박사는 최근 월간지 (2016년 신년호)을 통해 ‘안 의사 의거 권총 출처 비사’를 공개했다. 1909년 당시 연해주(블라디보스토크)의 의병 연합체인 13도의군도총재 ‘의암’ 류인석(1842~1915) 선생의 일대기를 기록한 ‘의암류선생약사’에서 확인..

안성(원곡, 양성) 3.1운동 관련 공판자료

■ 안성(원곡, 양성) 3.1운동 관련 공판자료 자료>미양면사무소 ㅣ 2006. 02. 28. 06 : 03 ◈ 머리말 올해로 안성3.1운동이 87주년을 맞이한다. 1919년 3월 말에서 4월 초까지 전개된 원곡과 양성의 만세독립운동은 대내외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꺼져가는 3․1운동의 열기를 다시 지피고 대한국민의 독립의지를 만방에 떨친 의미 깊은 항쟁이었다. 글쓴이는 시위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체포된 127열사들의 공판을 보도한 1920년 3월 23일자 『동아일보』 기사()와 이들이 재판받는 장면의 사진()을 새로이 입수한 바, 그 내용을 소개하고 안성시위운동의 의미를 새기고자 한다. 말만 무성할 뿐 실물 사료(史料)를 접할 기회가 없었던 시민들에게 이 자료들은 매우 유익한 자료가 될 것으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