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대한제국. 근대사

근대 태동(조선후기)

야촌(1) 2008. 10. 16. 22:18

1. 근대 사회로의 지향

 

■ 자본주의 맹아론

 

자본주의 맹아를 찾고자 하는 연구는 기본적으로는 민족사를 체계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새대 구분 논쟁에서 비롯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일제의 시민 사학에서 의도하였던 정체성론(停滯性論)에 대한 비판에서 제기되었다.

 

정체성론에서는 한국 민족사의 내적 발전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무기력하고 퇴영적인 민족성으로 인하여 결국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고 하여 일제의 침략 과정을 은폐하고자 하였다. 이에 선각자들은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한국사의 사회․경제적 측면에서의 체계적 발전 과정을 치밀하게 고증하였다.

 

특히 일제가, 정체되었다고 본 조선 후기 사회의 새로운 움직임을 주목, 실학으로 나타난 근대 지향적 사상과 사회․경제면에서 보인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싹을 찾아냈다.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싹은 농업에서는 이앙법(移秧法), 견종법(畎種法), 광작(廣作) 등을 통하여 성장한 부농, 그리고 상업에서는 정부의 특혜 또는 대규모의 자본을 통해 거상으로 성장한 도고(都賈) 등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농업 생산력의 증대, 산업의 분화로 인한 상품 생산의 진전, 그에 따른 시장권의 확대 등은 확실히 새로운 시대상이었다. 한편, 이 같은 자본주의 맹아론에 대하여 주체적, 자생적 발전이 너무 앞세워짐으로써 그 싹이 과장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 농촌 사회의 황폐화

 

전란이 거듭되고 관료 기강이 문란해진 속에서 도적의 창궐과 기근이 계속되니, 농촌 사회는 문자 그대로 황폐해져 갔다. 즉, 전란으로 농토는 황무지로 변해 버려 잡초만이 무성해졌고, 농사지을 장정들은 전쟁에서 사망하거나 부상당하였으니, 농가의 굴뚝에서는 연기를 볼 수 없다는 기로고 있다.

 

거기에 겹쳐서, 탐관 오리와 토호 지주의 수탈로 농민들의 생활은 빈곤과 처참 그 자체였다. 마침내 견디지 못한 농민들은 고향을 버리고 타향으로 전전해야 했다.


■ 지배층의 횡포

 

관료의 기강은 왕권이 강화되고 제도가 정비될 때에 있어서도 쉽게 확립되기 어려운 것이다. 임지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무질서가 만연하게 되면서 관료의 기강은 극도로 문란해졌다. 이는 지배 체제가 크게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며, 나아가 봉건 사회 체제의 모순이 크게 노출되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의 정치적 위기는 도적이 창궐하여 지방의 수령들이 관아를 버리고 산 속에 숨었기 때문에 , 업무가 집행되지 않았다는 사회 정세에서도 엿볼 수 있다.


▨ 민란의 개념


이른바 민란(民亂)이란 용어는 관아의 입장에서 민중들이 난동을 일으켰다는 뜻으로 쓰여진 것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른바 민란이 일어났다고 하는 당시의 정부 기록에서는 그 용례가 거의 보이지 않고 있다.

 

당시에는 작변(作變), 사변(事變), 민뇨 (民尿), 민요(民擾) 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물론 그 의미도 관아의 입장에서 백성들이 변을 일으켰다는 것이라 할 때 큰 차이는 없다.


그러나 농민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의 움직임은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표현이었다고 할 때, 부정적으로만 인식하고자 함에도 문제가 있다. 근래의 역사 이해가 민중 사회의 주체적 움직임을 토대로 내재적 발전을 추구하는 방향이라고 한다면, 용어의 사용은 주의를 요한다.


■ 민중(民衆)


국어 사전에 의하면, 민중이란 ‘다수의 국민’이라 정의하고 있다. 이 같은 뜻으로는 대중, 공중, 서민, 백성, 인민 등도 서로 비슷하다고 하겠다. 종래에는 서민, 백성이라는 용어가 역사 개설서에 많이 쓰였고, 근래에 이르러 사회에서의 민중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더불어 민중이란 용례가 주목되고 있다.

 

민중에 대한 재인식은, 역사의 주체인 민중이 정치와 경제를 비롯한 모든 영역에서 소외당하고 억압받는 상황을 극복하고, 진정한 주인의 위치를 찾아야 하겠다는 자각에서 비롯되고 있다. 그러한 시각에서의 민중은 자의식이 형성되어 깨어 있는 민중을 뜻한다.


조선 후기의 민중 세계가 주목되고, 그 의미가 부각되는 것은 민중이 서서히 자신의 존재를 깨우치면서 사회 변동의 주체가 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중은 역사적 존재이고 사회적 실체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의식을 가지지 못한 잠자는 민중을 제외한다는 것은 아니다.

 

역사에 보이는 민(民), 농민(農民), 인민(人民), 노복(奴僕), 노비(奴婢), 천민(賤民) 등 피지배 계층 모두가 민중이다. 그들 역시 역사의 전개와 더불어 깨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 농민의 의식화

 

조선 후기에 이르러 봉건 지주와 양반 관료들에 의한 토지 겸병과 농장의 확대는 더욱 심해져서 국가 재정을 위축시켰고, 농촌 경제를 악화시켜 농민의 몰락을 촉진시켰다. 빈민을 구제하기 위하여 마련되었던 환곡제는 오히려 농민의 궁핍화를 초래하였다.

 

농민들은 나름대로 살길을 강구해야만 했다. 농토를 빼앗기고 힘겨운 군역을 부담해야만 했던 농민들은 도저히 이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일정한 거주지를 가지지 못한 채 유랑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심지어는 남의 노비로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도시나 포구, 광산 등으로 몰려 임노동을 하기도 하고, 산 속으로 들어가 화전을 일구기도 했다. 이부는 도적 떼에 들어가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반 계층 내부의 정쟁은 더욱 치열해져 갔는데, 정쟁의 내용은 대부분 백성들의 생활 문제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정부의 정책적 혜택을 기대할 수 없게 된 농민들의 일부는, 농촌에서는 영농 기술을 개발하면서 경영을 합리화하고, 도시에서는 상공업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자신들의 생활 조건을 개선해 나가기도 하였다.


경제가 활성화되면서 일부의 농민들은 신장된 경제력에 의해 생활의 안정과 정신적 여유를 가지게 되었고, 비록 초보적이기는 하지만 서당 교육을 통해 교양을 쌓아 갔다. 더구나 이 시기에는 그들의 지적 욕구를 채워 줄 한글 소설이 널리 보급되고 있었다. 한글 소설은 양반을 풍자하거나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고, 이상적인 사회를 그려 냄으로써 민중의 의식 수준을 높여 주었다.

 

한편, 조선 후기에는 각지에 장시가 발달하였는데, 장시는 교역의 장소일 뿐 아니라, 농촌 사회에서는 정보 교환과 오락 장소의 구실도 하였다. 장시에 나온 사람들은 대화와 주연 가운데서 사회의식을 키웠고, 판소리, 타령, 잡가 등을 통해 양반 중심 사회의 모순과 지배 질서의 문란에 대하여 비판적인 자세를 보여 주었다.


■ 벽서(壁書) 운동


농촌 사회가 피폐해지는 가운데 농민들의 사회의식은 오히려 보다 강해져 갔다. 이제 농민들은 지배층의 압제에 대하여 종래의 소극적 자세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그들과 대결하고자 했다. 농민들은 처음에는 학정의 금지를 요청하는 소청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보다 적극적으로 부정과 비리가 심한 탐관 오리의 비행을 폭로하였다. 이를 벽서라 하는데, 방서, 괘서라고도 한다. 물론 이것이 발각되면 처벌되었기 때문에 은밀히 익명으로 하였다. 익명은 신분을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도 받아들여지지 않자 농민들은 작당을 하여 이른바 민란을 일으켰다.


2. 제도의 개편과 정치


■ 성리학적 가치 규범

 

조선 사회의 가치 규범은 성리학에 의해 규제되었다. 성리학은 사림파의 성장과 더불어 조선 사회에 정착하였다. 일찍이, 고려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새로운 각도에서 재편성하는 데 기여했던 성리학은, 본래 이기론(理氣論)에 토대한 명분론을 내세워 현실의 인간 관계를 설명한 봉건적 가치관이었다.


즉, 인간은 이(理)를 본래 지니고 있어 자율성과 주체성을 행사할 수 있지만, 또한 인간의 형체를 이루는 기(氣)의 작용으로 선악(善惡), 성우(聖愚)의 차가 나타나는데, 이를 조화롭게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사회적 명분이 바로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군(君)과 신(臣), 부(父)와 자(子), 부(夫)와 부(婦), 주(主)와 노(奴), 반(班)과 상(常)은 각자가 지니는 명분에 따라 상명 하복(上命下服)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 사회에서는 반상(班常)과 양천(良賤)이 엄격히 구분되고, 신분에 따른 직역이 법제화되었다. 가부장(家父長)을 중심으로 하는 가족 제도가 보편화되고, 충효의 이념이 절대시되었다.

 

즉, 성리학은 봉건적 사회의 기반으로서 불가결한 신분적 지배 질서를 관철시킴에 있어서, 이데올로기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하고자 한 것이다. 16, 7세기에 이기론이 중시되고 예론이 강조된 것은 봉건적 이데롤로기로서의 성리학이 다시금 그 기능을 강화하고자 한 예 등이었다.


■ 왕도 정치론


왕도 정치(王道政治)란, 임금이 솔선 수범하여 윤리 도덕을 지킴으로써 정치를 공명 정대하게 이끌어 가는 것을 의미하는데, 맹자에 의해 제시되었다. 왕도 정치론 에서는 왕권의 지나친 비대화를 경계하였다.

 

성리학을 정치 철학으로 내세운 조선의 사대부들은 왕도 정치의 구현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지향하고 있었다. 그것은 왕도 정치를 이해하고 있던 세종에 의해 어느 정도 수용되었다. 그리하여 의정부의 기능이 다시 강화되고, 여론이 국정에 최대로 반영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사헌부, 사간원 등에 의해 왕권이 견제되기도 하였다. 왕도 정치에서는 민심을 이반하거나 천리(天理), 천도(天都)에 어긋나는 정치를 펴 나가는 국왕은 혁명에 의해 추방되는 것이 정치 논리로 정당화되고 있었다.


의정부의 재상권이 강화되고 실제로도 문종, 단종과 같이 국왕이 병약하거나 나이어림을 인해서 15세기 중엽에는 한때 국왕권은 유명 무실하였다. 이에 왕실측에서는 신하의 권력을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움직임을 전개하였는데, 그것은 세조의 집권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는 자신의 집권을 반대하는 세력을 강압적으로 처단하고 모든 권한을 국왕에 집중시켰다. 이는 전제 왕권의 형성으로서, 왕도 정치와 대립되는 패도 정치(霸道政治)의 한 모습이었다.


왕도 정치가 다시금 강조되고 추구된 것은 16세기 후반 사림이 정계를 주도하면서였다. 특히, 조광조는 왕도 정치를 강조하였다. 조선 후기에도 사림들은 누누이 왕도 정치를 표방하였으나,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는 그것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 지변사 재상(知邊事宰相)


지변사 재상이란, 변방에 관한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재상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지변사 재상은 변경 지방의 근무를 역임한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그들은 변방에 일이 있으면 바드시 대책 회의에 참여하였다. 지변사 재상이라는 이름이 관용되기 시작한 것은 왜인과 야인의 침입이 빈번해진 성종 때부터이다. 비변사가 설치되면서, 이에 흡수되어 국방을 논의하였다.


■ 속오법(束伍法)


속오군을 편제하던 방식이다. 속오군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직, 편제된 지방군으로서, 위로는 양반으로부터 아래로는 노비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왜란으로 종래의 지방 군사 체제의 기능이 거의 마비되자, 이를 복구시키고자 명의 척계광의 기효신서(紀效新書)에 제시된 절강병법(浙江兵法)에 의해 군제를 개편하였는데, 그 편제는 영(營) ― 사(司) ― 초(哨) ― 기(旗) ― 대(隊) ― 오(伍)로 되어 있었다.

 

이는 초를 단위로 운영되었는데, 종래의 군제가 횡적 연결이 잘 되지 않았던 폐단을 보완하고자 한 것이다. 18세기의 1초는 정원이 123명으로서, 전국의 속오군의 총 수는 21만이었다.


■ 양반 지주의 토지 집적


조선 전기의 봉건적 토지 제도는 사실상의 토지 소유권에 의거한 지주, 전호제와 수조권의 분급을 기준으로 한 전주, 전객제가 병존하였다. 특히, 후자는 봉건 국가가 그들의 전제 권력의 유지를 위하여 그 관료층과 군인에게 봉사와 충성의 대가로서 일정 지역에 대한 수조권을 분급하는 제도였다.

 

이는 균전제 붕괴 후의 신라의 녹읍제나 고려의 전시과․녹과전, 그리고 조선 전기에 이르러서는 과전법․직전법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과전법과 직전법의 해체와 함께 사실상의 토지 소유권에 의거한 지주, 전호제만이 지배적인 생산 관계로 남게 되고 그러한 토지 소유는 법률적인 뒷받침 위에서 비록 제한된 의미에서나마 매매․상속․증여․저당까지도 가능하였다.

 

그러한 흐름은 17세기에 이르자 황폐한 농지를 개간함으로써 경작지를 확보하고자 하는 국가적 요청에서 보다 합법적․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시대의 농지 개간은 봉건 관료나 재지 지주층, 그리고 부민들에 의하여 그들 토지 집중의 수단으로 추진된 것이었다.

 

물론 일반 농민층에 의한 개간도 상당히 활발하였지만, 그것은 역시 그들 자가 노동의 범위 내에서 조금씩 진행된 것이어서 그 규모 및 진행 속도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비록 제한된 의미일망정 사실상의 토지 소유권은 이미 기본 원칙이 되었으므로 농지 개간은 양반 지주들이 대토지를 합법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가장 편리한 방법이었다.


■ 토지 소유의 변화


지주, 전호제가 발달하면서 양반, 토호들의 토지 소유 집중의 현상이 나타났으니, 16세기에는 고리대를 이용한 토지 매득에 의해서, 17세기에는 전후 복구에 따른 정부의 토지 개간 정책에 의해 개간 사업을 통해 대토지를 집적하고 합법적인 지주로 등장하였으며, 궁방이나 관아에서는 절수를 통하여 궁방전이나 관둔전을 확대하여 갔다.


한편, 농법의 개량을 통해 재산을 모은 일부 농민도 토지를 구입하여 지주로 성장해 갔다. 토지 소유가 일부 계층에 집중되면서, 대다수의 농민은 몰락하여 토지를 잃고 마침내는 임노동자로 전락해 갔다. 즉, 조선 후기의 농촌 사회는 궁방, 아문, 양반, 토호, 부농 등 일부 계층이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대다수의 농민은 무전 농민(無田農民)으로 전락하여 양극화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 양전 사업(量田事業)


양전이라, 전답을 측량하여 그 소유 관계를 정확하게 하고, 이를 토대로 과세(課稅)의 기본 자료를 마련하기 위해 시행된 사업이다. 토지 조사에 있어서는 경작지의 사정이나 자연의 조건 등으로 말미암아 정전(正田), 속전(續田), 강등전(降等田), 강속전(降續田), 가경전(加耕田), 화전(火田) 등으로 구분하였고, 이렇게 하여 토지 대장인 양안(量案)에 기재된 전결를 원장부(元帳簿)라 하였는데, 이는 다시 조세 납부에 따라 시기전〔(時起田) ; 실결(實結)〕, 급재전(給災田), 면세전(免稅田)으로 분류되었다.

 

토지 대장에는 전답 하나하나에 대하여 지번(地番), 등급지목(等級地目), 지형(地形), 척수(尺數), 결수(結數), 사표(四標), 기주(起主) 등을 확인하여 기입하였다.


양전 사업은 원칙적으로 20년마다 행하게 되어있었다. 그러나 경비가 과다하게 소요되고, 그에 따라 민폐가 심했으며, 작업 과정에서 부정과 협잡이 많아서 그 결과가 공정하지 못한 경우가 많아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양전이 잘 행해지지 않음으로써 경계(境界)가 불확실하게 되어 토지 제도가 크게 문란해지기도 했다.

 

특기할 것은 1653년(효종 4)에 지금까지 사용해 오던 수등이척(隨等異尺)의 양전척(量田尺)을 폐기하고, 1등 전척(一等田尺) 하나로 통일하여 측량하였는데, 각 등전(等田)의 차는 결부(結負)의 실적에 따라서 체감하도록 했다. 임진왜란 후의 양전 사업은 20여 회 시행되었으나, 전국적인 양전은 1604년(선조 37), 1612년(광해 4), 1634년(인조 12), 1719년(숙종 45)의 4회뿐이었다.


■ 은결(隱結)


은결은 은여결(隱餘結)이라고도 하는데, 구체적으로 양전을 실시할 때 지방 관리들이 비옥한 전토의 일부를 원장부에서 누락시켜, 그 조세를 사취하는 것을 은결이라 하고, 전토의 면적을 실제보다 감소시켜 토지 대장에 올려놓고 그 나머지 부분에 대하여 개별적으로 횡령하는 것을 여결(餘結)이라 한다.

 

양자를 합칭하여 흔히 은결이라 한다. 궁방전, 둔전이 면세전인 데 반하여, 은결은 탈세전으로서, 조선 후기 전제 문란의 대표적인 양태이었다. 


■ 면세지의 실태


양 난 후, 정부는 경제 생활을 재건하고자 양전 사업을 거듭 추진하면서 농지 개간에 힘썼다. 그리하여 광해군 때 54만 결이던 것이 숙종 때에는 140만 결에 이르렀다.


그러나 토지 결 수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전세수입은 비례적으로 늘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궁방전(宮房田), 관둔전(官屯田), 진황전(陳荒田) 등 면세지가 광대하였고, 불법적인 은폐로 탈세지도 많았기 때문이다. 궁방전은 왕실의 일부인 궁실(宮室)과 왕실에서 분가 독립한 궁가(宮家)에 지급되던 전토로서, 임진왜란 후 각 궁방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해 주기 위해 급여되었다.

 

 대표적인 궁방으로는 내수사(內需司), 수진궁(壽進宮), 명례궁(明禮宮), 어의궁(於義宮), 용동궁(龍洞宮) 등이 있었는데, 탁지지(度支志)에는 57궁방의 26,760결이, 만기요람(萬機要覽)에는 68궁방의 37,927결이 면세되고 있었다.

 

둔전은 영문둔전(營門屯田)과 아문둔전(衙門屯田)으로 구분되는데, 전란으로 이산된 농민을 불러 모아 황페화된 전토를 다시 경작시키고, 그 생산물의 일부를 군자 혹은 각 관아의 자체 경비로 충당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전체 면세전의 3분의 2정도를 차지하는 것이 진황전이다. 진황전은 이전에 경작하던 토지였지만, 오랫동안 황폐되어 내려온 것으로, 진황전이 날로 늘어났다는 것은 지배 계층의 수탈로 생존 의욕을 상실한 농민들이 경작을 포기하고 유망, 도산하는 현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 부가세의 종류


부가세는 본래 전세의 수납으로부터 상납까지 소요되는 각종 수수료, 하역료, 운송료, 등 잡다한 경비에 충당하기 위하여 부과한 세이다. 속대전에는 가승미(加升米),곡상미(穀上米), 창역가미(倉役價米), 이가미(二價米), 창작지미(倉作紙米), 호조작지미(戶曹作紙米), 공인역가미(貢人役價米)의 7종을 법적으로 규제하였다.


가승미와 곡상미는 세곡의 손실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며, 창역가미는 창고에 출입할 때의 수수료이고, 이가미는 선박에 싣고 내릴 때 인부에게 지급하는 것이다. 그리고 창작지미는 경창(京倉)에 입고시킬 때의 수수료이고, 호조작지미는 납세때 호조에 상납하는 수수료이고, 공인역가미는 호조 및 경창에 전속된 공인의 품삯을 지급하기 위한 것이다.

이들 부가세는 시대가 내려올수록 그 종류와 세액이 증가하여, 원래의 전세보다 몇 배 더 많은 경우도 있었다.
지방 관아에서는 자체로 여러 가지 명목의 부가세를 징수하기도 하였는데, 그 세목에서는 협잡과 횡령이 성행하여 큰 폐해로 지적되었다.


■ 방납(防納)의 폐단


방납이란, 공물을 납부함에 있어서 현물 수납이 운송, 저장에 불편하고, 또 생산되지 않는 경우도 있어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대납하게 하는 것인데, 이를 기화로 상인 혹은 하급 관리들이 중간에서 이득을 취하였다.

 

상인 혹은 하급관리들은 이득을 위해 불법적인 수단으로 농민들의 상납을 방해까지 하였으므로 방납이란 명칭까지 생겨났다. 공물의 수요자로 보면, 필요한 것을 필요한 때 얻기 때문에 편리하였으나, 방납자들은 관청과 농민의 중간에서 엄청난 모리 행위를 하여 10배 이상의 부담을 농민에게 지우기도 하였다.


■ 공물 부담 능력의 문제


공물의 납부는 농민의 가장 큰 부담의 하나였다. 조선 후기 농민들이 부담하고 있었던 공물의 대가는 1결에 미곡 20두에서 100두 이상에 이르고 있었다. 당시, 평년 1결의 생산량이 2, 30석에서 전세가 대체로 1결당 4두를 징수하고 있었는데, 공물의 대가가 100두에 이르렀다면 공물의 부담이 얼마나 무겁고, 또 농민의 공물 부담 능력도 짐작하게 한다(浦渚梟, 潛谷梟, 磻溪隨錄).

 

뿐만 아니라, 공물에는 경중(輕重), 고헐(苦歇)의 차이가 있는데, 부호들은 가볍고 헐한 것을 부담하였는데 비하여, 빈민들은 무겁고 힘든 것을 부담하였다. 게다가, 부호들은 그 세력을 구사하여, 자기의 것을 빈민에게 전가시키기도 하였다.


그리고 고을의 호구 구성을 정확히 파악하지 않고 중앙에서 획일적으로 각 고을에 공물을 부과하였기 때문에, 큰 고을과 작은 고을의 부담에 차이가 많았다. 또, 전세는 흉년이 들면 감면의 조치가 있었지만, 공물은 감면의 조치가 없었다.

 

그리하여 농민들은 점차 곤궁해졌고, 가혹한 공물 부담을 견딜 수 없게 되자, 가족을 거느리고 사방으로 도산하기에 이르러, 고을마다 유민이 넘쳐났다.


■ 공납제(貢納制) 개혁 논의


공물 납부제도는 이미 16세기에 여러 가지 폐단을 자아내 개혁의 논의가 제기되었다. 예컨대, 중종 때에 조광조가 공안(貢案)의 개정을 제의히였고, 선조 때의 이이는 공물의 대납, 방납 등의 폐단을 제거하여 국고의 수입을 증대시키고, 백성의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해서는 수미법(收米法)을 실시해야 한다고 했다.

 

토산물 대신 미곡으로 수납하자는 것이다. 그 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유성룡(柳成龍)이 민폐를 시정하고, 또 전란으로 인하여 탕진된 국가 재정을 보충하기 위하여도 수미법이 매우 이로움을 강조하였다.

 

그의 논의는, 모든 전토에 1결당 미곡 2두씩 거두고, 대신 모든 공물을 혁파하자는 것인데, 그 운송 문제로 인하여 산간이나 수변에서 먼 고을 백성들이 불편하다고 하여 1년 동안 시행되고 폐지되었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한백겸(韓百謙)에 의해 대동법으로 구체화되었다.


■ 공인(貢人)의 활동


공인은 대동법 실시 이후에 나타난 어용적 조달 상인이다. 즉, 각종의 공물을 쌀로 대납하는 대동법이 실시되자, 정부에서는 필요한 물품을 공인을 지정해 조달하게 하고는 그 값을 대동미(大同米)로 지급하였다.

 

공인에는 대부분 종래 공납과 관계를 맺고 있던 시전 상인, 경주인, 공장(工匠) 들이 많았다. 이들이 조달 물품의 구입을 위해 서울의 시전 및 각 지방의 여각, 객주와 거래하면서 상업 활동이 활성화되었다. 그리하여 시장권이 확대되고, 아울러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을 촉진시켰으며, 사상들의 활동을 자극하기도 했다. 나아가, 풍부한 자본을 바탕으로 생산에도 참여하여 공장 수공업 발전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 대동법 시행의 찬반 양론


대동법은 호 단위로 부과하던 공납을 전결에 토대하여 징수한 것으로서, 관련된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다르면서 순조롭게 시행되지 못하였다. 즉, 공납은 호를 부과의 일차적 대상으로 하였기 때문에, 토지가 없는 사람에게도 부과되었지만,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토지가 많은 사람은 그만큼 많은 부담을 져야 했다.


대동법이 1608년 경기도에 시행되고서도 전국적 보급이 1708년에야 완성된 것은, 그 동안 반발이 심했기 때문이다. 대동법은 대토지를 소유한 양반 토호와 공물을 대납하면서 이들을 취하던 방납인들에게는 매우 불리한 제도였던 것으로, 당시 사회에서 큰 영향력으로 행사하고 있던 그들은 대동법의 시행을 완강히 반대하고 방해하였던 것이다.

 

대동법은 당시 공납 부과의 불균등, 방납의 폐해 등으로 농민들이 부담을 견디지 못하여 유민이 증가하면서 농촌 사회가 불안하자, 국가 재정의 타개를 아울러 염려한 위정자들이 내세운 현실 위기의 타개책으로 제시된 것이다.

 

 이원익, 김육, 조익 등은 강력히 대동법의 실시, 보급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양반, 토호, 방납인들은 김상헌, 송시열 등을 움직여 대동미를 운송하기 위한 대책과 남방의 산물을 경중에서 구입하기 곤란하다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 대동미의 부과


대동미는 대체로 1결당 미곡 12두를 징수하였지만, 지역과 시기에 따라 각기 달리 부과되었다. 이는, 대동법이 1세기에 걸쳐 도별로 시행되었고, 또 각 도가 종전에 부담하였던 공물 부담의 차이와 각 도의 경비 차이에 따른 것이다.
이 밖에도, 양전이 균일하게 행해지지 못한 까닭이 있다.


경기충청전라경상강원황해초기16두10두13두13두16두17두후기12두12두12두12두12두12두

한편, 대동세는 백미(白米)를 원칙적인 부과 대상으로 하였으나, 지역에 따라 미가(米價)에 차이가 있고 운송 문제가 있어서 목면(木棉), 마포(麻布), 전화(錢貨)로 바꿔 내기도 하였는데, 이를 환봉(煥捧)이라 하였다.

 

이와 아울러, 납세자의 요구에 따라 소미(小米), 대두(大豆), 소두(小豆) 등의 잡곡으로도 대납하였는데, 이를 대봉(代捧)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 납부 시기는 봄과 가을에 반씩 분할하여 상납하였다.


■ 대동미의 용도


대동미의 용도는 중앙의 궁실이나 관아에서 소용되는 공물값을 마련하기 위한 경납분(京納分)과 각 고을의 수요 및 잡역의 충당을 위한 저치분(儲置分)으로 크게 나뉘었는데, 전자를 상납미(上納米), 후자를 유치미(留置米)라고도 하였다. 선혜청절목(宣惠廳節目)에 의하면, 대동미의 경납분과 저치분의 양과 비율은 다음과 같다.

 

그런데 대동법 실시 초기인 17세기에는 중앙과 지방의 재정이 모두 수입 초과로서, 건전한 재정 상태를 이루고 있었으나, 18세기 중엽이래 상납분이 격증함에 따라 유치분이 격감되어 지방 재정이 궁핍해져 갔고, 19세기에 이르러서는 대동미의 전량이 중앙으로 상납되는 경우도 있었다.


도 별부과 총액(석)경 납 분저 치 분양(석)%양(석)%

충청(효종 3), 전라(현종 3), 경상(숙종 4)

83,164

147,134

137, 45248, 280

61, 218

53, 50758. 1

41.6

38.934, 884

85, 916

83, 945341. 9

58.4

61.1


■ 진상(進上)과 별공(別貢)


진상은 국왕에게 지방의 토산물을 바치는 것으로, 공물이 세납의 일종인 데 대하여, 진상은 지방관들이 국왕에게 예물을 바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각 도 단위로 관찰사, 병사, 수사가 한달에 한 번씩 바쳤다. 대동법 시행 후에도 진상은 여전히 현물도 받아들였다. 주로 식료품이 대부분이었다.


한편, 별공은 진헌(進獻)이라고도 하는데, 중국에 대한 의례적인 공납 형태로서 필요한 물품이 농민에 부과되었다. 대동법으로 정기적인 사행 방물은 감해졌지만, 사은사, 진하사, 주청사 등 비정기적 사행시 부족한 방물은 계속 현물로 징수되었다.


■ 납포군(納布軍)


현역 복무에 대신하여 일정한 값을 내고 군역을 이행하는 장정을 납포군이라 한다. 조선 왕조의 군역제는 정병과 보인으로 나누어, 정병에게 현역복무의 의무를 지게하고, 보인으로 하여금 이를 경제적으로 돕게 하였다.


그런데 정군과 보인을 막론하고, 경제적 기반없이 고된 군역만 부과되어 농민들은 가급적 기피하고자하였다. 이를 기화로, 변경의 군 지휘관들은 군역 의무자에게서 포를 받아 착복하고, 대신 현역 복무를 자의로 면제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 같은 방군수포(放軍收布) 현상은 점차 그 범위가 확대되어 갔고, 그 값도 높아져 민폐가 심해지자, 마침내 정부는 1541년 이를 공정화(公定化)하여 군적 수포제를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현역 복무에 응하고 싶지 않은 병역 의무자들은 일정한 군포만을 바치고 현역 복무를 면하는 납포군이 되었다. 번상가(番上價)로서의 군포는 매 장정당 2필이었다.


 ■ 양역(良役)의 폐단


양인들의 군역 의무인 양역이 현역 복무에서 군포 납부로 바뀌자, 군포 수입은 국가 재정에서 중요한 몫을 하였다.
그러나 양정으로부터의 군포 징수가 단일 관청에 의해 이루어져서 배분되는 것이 아니라, 5군영과 중앙 관아는 물론, 지방의 감영이나 병영까지도 독자적으로 군포를 징수함으로써 한 사람의 장정이 이중 삼중으로 수탈당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그들이 바치는 군포의 양 역시 소속에 따라서 2필 혹은 3필 등 일률적이지 못하였다(1792년 경상도 영천에서는 500명의 양정이 2783명분의 부담을, 1793년 경상도 비안에서는 400호가 1886명의 부담을 져야 했다.).


더구나, 정부는 전국의 양정 수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채, 재정 사정이 곤란해짐에 따라 각 군현에 군포 징수량을 증액 배정하였다. 당시 장수된 군포의 양은 1670년대에 30만 필이던 것이 1700년대에는 50만 필로, 다시 1732년에는 70여만 필로, 1750년에는 100만 필로 늘어났다.

 

이것은 실제의 군정 수가 늘어난 것이 아니라, 문서상으로 군정 수를 늘려 배정한 결과였다. 여기에 수령과 아전의 농간과 착취까지 겹쳐 어린아이, 노인, 죽은 사람까지 군적에 올려놓고 군포를 수탈하는 등 폐단이 극심하였다.


■ 유망(流亡)과 피역(避役)


고역(苦役)을 불가피하게 하는 군역제의 제도적 불합리성에 더하여, 탐관 오리의 불법적 수탈 마저 가중되어, 조선 후기 양정들의 생존은 극도로 악화되고 있었다. 군포의 부담은 특히 가난한 농민에 집중되었다. 왜냐 하면, 조금 형세가 나은 사람들은 공명첩을 사서 양반 신분을 얻거나, 뇌물을 바쳐 향교나 서원의 교생, 원생으로 등록하여 양역의 부담을 벗었기 때문이다.


양민들이 역을 벗어나기 위한 피역 형태는 누호(漏戶), 누적(漏籍), 모칭(冒稱), 투속(投屬), 가탁(假託), 모속(冒屬) 등 여러 가지로 나타났다. 이러한 연유로, 가난한 농민들은 2, 3명분의 군포 부담을 지게 되어 더욱더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농민들은 파산하거나 유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민의 증가는 양 난 직후에 특히 심했지만, 정치가 어느 정도 안정된 18세기 초에 있어서도 자기 고장에 머물러 있는 군포 대상자는 3분의 1로 줄고 있었다. 그런데도 봉건 지배층은 사정을 헤아리지 않고 유망자의 부담을 동네 사람과 일가 친척에게까지 지우는 인징(隣徵), 동징(洞徵), 족징(族徵)의 폐를 자아내니, 이는 또한 유민의 증가를 촉진하는 요인이 되었다.


■ 양역 변통론(良役變通論)

 

양역의 폐단이 심화되면서, 견딜 수 없게 된 농민들은 유망하거나 피역으로 저항하였다. 농민의 유망과 피역은 봉건 국가로서는 국가의 기반을 잃게 하는 위기를 초래하는 것이다. 봉건 국가는 농민을 토지에 얽매여 그들에게서 전세(田稅), 대동(大同), 군포(軍布)를 수취하여 국가 재정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의 지배층은 위기의 심각성을 인식하면서 그 기반 확보를 위한 대책을 모색하여, 농민의 유망을 법제적으로 억제하기 위하여 호패법(戶牌法)이나 오가작통법을 실시하는가 하면, 양역의 폐단을 다소 조정하고자 하였다. 양역의 폐단을 변통하고자 하는 논의는 현종이 즉위하면서 비롯되었다. 즉, 정태화(鄭太和), 이단하(李端夏) 등은 늘어난 군액을 대폭 감축하자고 제의하였다.

 

양역 변통 논의는 숙종 때 본격화되었다. 먼저, 양반에서 천민까지 모두 포를 내게 하는 호포론(戶布論)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봉건적 양반층은, 양반은 상민과 같을 수 없다고 하여 맹렬히 반대하여 폐기되었다. 이어서, 군액을 감축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훈련도감, 금위영 등의 군영 자체를 혁파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시행되지 못하였다. 다음, 소속에 따라 차이가 있던 군포의 액수를 2필로 획일화하여 균포(均布)의 뜻을 살리고자 하였으나, 이는 근본적인 대책이 아니었다.


한편, 호포론을 수정하여 모든 정남에게 포를 부가하자는 정포론(丁布論)이 제시되었으나, 이 역시 양반들의 이해와 엇갈려 폐기되었다. 정포론은 사대부, 유생 등 역(役)이 없이 한가롭게 노는 자에게 부과한다고 하여 유포론(遊布論)이라고도 하였다.

 

이와 같은 논의는 영조 때에 이르러 구체화되기 시작하여 양정의 정확한 수가 조사되었으며, 군포를 2필에서 1필로 감하는 감포론(減布論)으로 정리되어 1750년(영조 28) 균역법으로 시행되었다.


■ 선무군관포(選武軍官布)


균역법의 시행으로 군포 2필이 1필로 감축되어 농민들의 부담은 줄어들었으나, 국가 재정은 보다 약화도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정부는 궁방, 아문에서 수취하던 어세, 염세, 선세를 국가의 수입으로 잡고, 결작이라 하여 토지 1결에 미곡 2두를 받아들이도록 하며, 나아가 부유한 양민으로 교생, 원생을 칭탁하여 군포를부담하지 않고 있던 자를 선무군관(選武軍官)이라 하여 합법적으로 지위를 인정해 주고, 대신 포를 징수하여 재정 수입을 보충하려 하였다. 이들 선무군관에게는 매년 무과를 통해 합격자는 당년의 선무군관포 부담을 감해 주었다.


■ 결작(結作)의 징수


군포를 전결(田結)에 기준하여 징수하는 것이 결작으로서, 미곡으로 징수하면 결미(結米)요, 전화로 징수하면 결전(結錢)이었다. 이는 일찍이 양역 변통 논의에서 그 방안으로 제기된 바 있었다. 신분의 구별에 관계없이 군포를 부담시키자는 군포론이 양반들의 반대로 실패하자, 재산에 비례하여 부과시키자는 결포론이 나왔으나, 이 역시 부유한 양반, 토호의 반대로 쉽게 이루어지지 않다가, 영조의 적극적 의도로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즉, 평안, 함경 양 도를 제외한 6도의 전결에서 매결에 미곡 2두 또는 전화 5전씩 징수하였다. 징수 총액은 대략 30만 냥에 해당되어,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였다.


■ 붕당과 병권(兵權)


붕당이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그 기능을 충실히 하기 위하여는 세력 기반이 있어야 했다. 세력 기반은 이념적 측면에서는 정통성과 도덕성이 확보되어야 당시 사회에서 지지를 받을 수 있었으며, 불리적 측면에서는 정권 또는 병권을 바탕으로 힘을 발휘할 때 가능하였다.

 

인조 반정으로 정권을 장악한 서인측은 정치 권력의 중요한 배경으로서 병권을 중요시하여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 등을 설치, 강화하여 자신들의 군사적 기반으로 삼았다.

 

이들 군영의 통솔권은 거의 서인에 의해 장악되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당시 서인과 대립하고 있던 남인은 훈련별대(訓練別隊)를 신설하고, 도체찰사부(都體察使府)의 기능을 강화하여 자신들의 병권을 확보하려 하였다.


■ 정권 쟁탈전과 붕당


붕당 사이의 정치적 갈등은 학연, 지연, 문벌 등의 차이로 인해 불가피했다. 그럼에도, 붕당 정치가 정상적으로 운영되던 17세기에는 인사권, 예송 논쟁을 둘러싸고 번번히 대립하면서도 상호 비판과 공존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권력의 독점적 추구와 외척세력의 개입으로 붕당 정치가 변질되면서 붕당 간의 다툼은 권력의 장악에만 집착하였고, 적대적인 관계로 변해 갔다. 즉, 1680년(숙종 6) 경신환국으로 집권한 서인은 윤휴, 허적 등 다수의 남인을 주살하였고, 이에 다시 기사환국으로 정권을 장악한 남인은 송시열, 김수항 등을 제거하여 보복하였다. 이어서, 갑술환국으로 다시 등장한 서인은 남인을 철저히 숙청하였다.


■ 서인과 남인의 공존 관계


인조 반정 후, 사림들이 성리학 이념을 바탕으로 붕당 정치를 추구하였다면, 그것은 붕당의 상호 비판과 공존에 토대한 정치 형태였다. 실제로, 17세기에는 서인과 남인이, 18세기에는 노론과 소론이 대체로 공존하면서 붕당 사이의 역학 관계가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었다.

 

예컨데, 인조 반정 후 정권을 장악한 서인이었지만, 남인이 협력을 구하여 남인이 대폭 등용되었고, 숙종 즉위 후 남인 정권이 성립되었으나, 다수의 서인이 기용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양자 사이에는 혼인 관계도 이루어져, 서인의 송시열과 남인의 권시는 사돈 관계였다.


■ 예론(禮論)


예론이란, 예법에 대한 송사와 논쟁으로서, 예송 논쟁(禮訟論爭)이라고도 한다. 당시, 성리학을 지배 이념으로 하는 사림 사회에 있어서 예(禮)의 문제는 곧 모든 사회 질서의 기본적인 규범이었으므로, 예론을 중시한 붕당 사이의 대립은 정통성에 관련하여 필연적이었다.


예론은 효종의 죽음으로 시작되었다. 효종의 상에 인조의 후비인 조대비(趙大妃)가 갖출 복제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효종이 차남으로 왕위에 오른 때문이다. 이 때, 실권을 잡고 있던 서인은 효종이 비록 왕위에 오른 임금이라도 차남이기 때문에 1년 기한의 기년복(朞年服)을 입어야 한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남인은 현제적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성리학을 탄력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면서 효종이 차남이어도 대통을 이었기 때문에 종통(宗統)으로서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서인의 집권으로 남인의 주장은 일출되었다.


그 후, 현종 때 효종비의 상을 당하여 또다시 조대비의 복제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 때, 서인은 전날과 같은 논리로 9개월의 대공복(大功服)을 내세웠는데, 이에 대하여 남인은 기년복(朞年服)을 내세워 서인을 적극 공격하였다. 결과는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서인 정권이 몰락하였다.


■ 경신환국(庚申換局)


제 2차 예송 논쟁의 결과로 서인 정권이 몰락하고 남인이 집권하였는데, 이와 같은 형세는 현종에 이어서 숙종이 즉위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집권한 남인은 대 서인 처단 과정에서 분열을 일으키니, 허목 등은 원론에 입각하여 강경한 견해를 보였고, 이에 대하여 허적 등은 현실을 참작하여 온건한 입장을 내세웠다.

 

전자를 청남(淸南)이라 하고, 후자를 탁남(濁南)이라 하는데, 양자는 서로 대립하다가 청남이 몰려나고 탁남이 중용되었다. 탁남은 이후 정권을 독점하면서 횡포를 보이니, 이에 그 동안 세력을 잃었던 서인은 모역을 시도하였다고 하여 남인을 공박, 마침내 정권을 장악하고, 남인의 다수를 숙청하였다.

 

이를 경신환국 또는 경신대출척(更新大黜陟)이라고 한다. 서인은 남인에 대하여 철저히 탄압하여, 이후 남인 세력은 크게 약화되고, 또한 붕당간의 대립은 보복과 살육으로 전개되어 갔다.


■ 외척의 정치 간여


붕당 간의 대립이 권력의 장악에만 집착하게 되면서 공권력의 위축과 사익(私益)의 확대 현상이 두드러졌다. 이 같은 현상은, 학연에 토대한 정통성의 유자보다는 외척의 개입으로 정치의 실권 장악이 주요 목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붕당 간의 대립이 심해지는 속에서 국왕은 외척에 의지하고자 하였다.


현종 때 김우명(金佑明)이 국구(國舅)로서 실권을 장악한 바 있지만, 외척의 본격적인 정치 간여는 김석주(金錫冑) 때부터였다. 김우명의 조카인 김석주는 경신환국을 주도하면서 병권을 손아귀에 넣고 정국을 자의로 조정하였다.

 

그 후, 숙종의 외척으로서 광산 김씨의 김만기(金萬基)와 김만중(金萬重), 그리고 여흥 민씨의 민유중(閔維重)과 민정중(閔鼎重)이 중요 요직을 차지한 바 있으며, 민유중의 아들 민진원(閔鎭遠)은 영조 때 노론의 거두로 활약하였다.


■ 왕위 계승 문제


붕당 정치가 정상적으로 전개될 때에 있어서, 정쟁의 문제는 대체로 국방, 외교, 재정, 민생 등 다양하였으나, 붕당들이 권력의 장악에만 집착하면서 정쟁의 초점은 왕위 계승 문제에 귀착되었다. 왕위 계승 문제는 곧 자신들의 실권과 밀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왕위 계승 문제는 숙종의 후사 문제였다.


숙종은 일찍이 김만기의 딸을 왕비로 삼았으나 20세로 단명하고, 이어서 민유중의 딸을 계비로 삼았으나 후사가 없었다. 이 때, 장희빈에게서 왕자 연령군을 얻으니, 남인은 이를 후사로 삼고자 하였는데, 세력을 잃게 된 서인은 이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남인은 숙종의 동의를 얻어 이를 성사시키고 정치의 실권도 장악하였다. 아울러 민비도 폐출하였다.

 

그러던 중 남인과 장희빈이 횡포로 남인이 제거되고, 다시 서인이 집권하고 민비가 복위되었으며, 숙종은 다시 숙빈 최씨에게서 연잉군을 얻었다. 이 때부터 붕당 간의 대립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렸는데, 소론은 연령군을, 노론은 연잉군을 후사로 내세우고자 하였다.

 

연령군이 경종으로 즉위하였으나, 재위 4년 만에 죽고 연잉군이 영조로 즉위하였다. 이 과정에서 노론과 소론은 격렬한 대립과 반목을 보이니, 이로 인하여 붕당 정치는 크게 변질되어 갔다.


■ 벌열 가문(閥閱家門)


벌열이란, 권력 싸움에서 승리하여 오랜 동안 세력을 누리며 지체를 유지해 온 가문을 말한다. 조선 후기의 벌열은 붕당 정치가 변질되는 속에서 정권을 오로지하며, 특히 왕실과의 통혼 관계 속에서 세도를 부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 벌열 가문은 학벌, 인맥, 지연 등에 의해 유대 관계를 공고히 하였는데, 정쟁이 치열해지고, 마침내 노론 중심으로 일당 전제화가 추구되면서 그 모습을 두드러지게 드러냈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벌열 가문으로는 숙종 때의 청풍 김씨, 광산 김씨, 여흥 민씨, 영조 때의 남양 홍씨, 경주 김씨, 세도 정치기의 안동 김씨, 풍양 조씨, 그리고 고종 때의 여흥 민씨 등의 가문이 대표적이었다.


■ 붕당과 학연, 지연


붕당의 정통성은 학문적 맥락과 깊이 연관되었다. 붕당을 조성한 사림들은 성리학자들이었고, 그들이 진붕(眞朋)을 자처하기 위해서는 성리학에 철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성리학 자체가 이(理)와 기(氣), 보편과 특수, 원론과 현실, 주관과 객관의 문제로 인하여 다양한 해석이 불가피하였고, 학문적 분파가 불가피하였다.

 

학문적 분파는 붕당의 성립과 더불어 나타났다. 즉, 인간의 도덕적 측면에 보다 관심을 두는 이황과 조식이 주리파와, 경험적 현실 세계를 존중하는 이이와 성혼의 주기파가 그것이다.


주리파는 영남 학파라고도 하는데, 주로 동인들이 여기에 속하였고, 주기파는 기호 학파하고도 하는데, 주로 서인들이 여기에 속하였다. 동인은 다시 분파하여, 이황을 따르는 퇴계 학파와 조식을 쫓는 남명 학파로 나뉘었는데, 전자는 남인을, 후자는 북인을 형성하였다.

 

지역적으로 전자는 낙동강 동쪽, 후자는 낙동강 서쪽에 거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서인도 이이를 추종하는 율곡학파와 성혼을 따르는 우계 학파로 나뉘었는데, 전자는 주로 노론, 후자는 주로 소론을 구성하였다.


■ 양반들의 향촌 지배


조선 시대의 향촌 사회는 양반, 즉 사족들이 사회․경제적으로 지배하였다. 특히, 16세기에 시행된 유향소(留鄕所)나 경재소(京在所), 향약(鄕約)과 사창제(社創制)등은 이러한 재지사족들의 지위를 성장시키는 과정에서 일정하게 기여하였다.

 

재지사족들에 의한 향권(鄕權)의 확보라는 측면에서 16세기의 향촌 지배 체제는 일단 그 자율성을 지녔다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로 급속하게 진전된 농업 생산력의 발전과 사회적 분업의 진전, 그리고 이와 병행된 신분 체제의 혼요(混擾)는 특히 18세기 후반부터 향촌 사회 구조가 전면적으로 재편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직면하게 하였다.

 

종래 경제적 기반 및 신분적 특권을 토대로 하층민을 지배했던 양반 지주 중심의 조선 전기의 향촌 지배 질서는 이 같은 변화를 완충시킬 근본적인 대안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중앙 정부는 이 같은 근본적인 사회 모순을 해소시키기보다 신분제나 공동체적 규제를 재강화함으로써 기존의 봉건적인 지배 체제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재지시족들이 과거 일정하게나마 소유하고 있던 하층민에 대한 지배력을 잠식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는 향촌 사회의 운영 원리가 재지시족층으로부터 점차 유리될 가능성을 보여 주는 것인 동시에 그들의 향촌 지배력이 점차 위축․붕괴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에 재지사족들은 과거의 향안(鄕案)․향규(鄕規)․향약 등과 같은 일향(一鄕)의 지배 구조보다는 혈연적이 족계(族契)나 동계(洞契)․동약(洞約) 혹은 촌락 기반을 매개로 하는 하층민과의 유대속에 자기 방어를 모색하고자 하는 상하 합계(上下合契) 형태의 동계(동약)를 발전시키게 되었다.


■ 두레와 황두


조선 후기 농촌 사회에 새로이 나타난 노동 조직으로 두레와 황두가 있었다. 두레는 농법의 변화에 따라 생겨났다. 즉, 남쪽 지방에서 벼농사를 지으며 이앙법을 하게 되자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앙법은 집단적 모내기 노동력을 요구하였으므로 물을 댈 수 있는 일정한 시기에 한꺼번에 모를 내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집중적인 노동력이 투입되었다.

 

김매기도 더운 철에 집중되기 때문에 뙤약볕 밑에서 한꺼번에 많은 논을 매지 않으면 안 되었으므로 집중적이 노동력 투입이 있어야 했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작업이었다. 이 같은 이앙법은 단기가 내에 모내기와 김매기를 연이어 끝내야 했으므로 시간적인 긴박성 때문에도 품앗이류의 공동 노동과는 질적으로 다른 노동 조직이 출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자소작 농민들은 노동력 투입이 고도로 집약화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두레를 강화, 발전시켜 나갔다. 대지주도 두레의 노동을 빌리지 않고는 일시에 많은 노동력을 동원할 수 없었으므로 상대적으로 농민의 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건갈이[乾播]는 남쪽의 이앙법에 대칭되는 북쪽 서북 지방 특히 청천강 일대의 농법인데, 이 곳에는 공동 조직으로 황두 조직이 있었다. 황두 조직이란 마을당 김매기에 능숙한 장정 20~30명이 작업 단위가 되어 김매기 작업만 수행하는 공동 조직인데, 이 중에서 신망 있고 경험 많은 황두꾼이 계수(좌장)․부계수 등의 임원이 되어 황두꾼과 함께 노동하였다.


■ 숙종의 편당적 조처


붕당 사이의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어 반목과 대립이 격화되자 정국은 혼미해졌다. 이에, 숙종은 탕평론(蕩平論)을 제기하여 정국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양자 사이의 균형과 공존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한 붕당을 일거에 내몰고 다른 붕당에게 대권을 위임시키는 환국(換局)에 불과하였다. 즉, 숙종 6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을 집정하게 하고, 윤휴, 허적 등 남인을 축출하였다.

 

이어서, 숙종 15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에게 대권을 주고, 송시열, 김수항 등 서인의주요 인물을 모두 제거하였다.
그 후, 숙종 20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에게 정권을 위임하고, 민암, 권대운 등 남인 모두를 처단하였다.

 

이후, 남인이 거의 재기 불능에 빠지자, 처음에는 소론에게 정권을 맡기더니 숙종 42년 병신 처분으로 소론을 제거하고 노론을 중용하였다. 이 같은 편파적 조처는 탕평의 근본 의도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고, 명목상의 탕평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 영조의 편당적 조처


영조는 즉위하면서 곧 탕평의 교서를 발표하지만, 일찍이 자신을 지지하여 왕위를 계승하게 하고자 했던 과정에서 죽임을 당하고, 시련을 겪었던 노론의 충정을 저버릴 수 없었다. 그리하여 당시 소론 정국을 쇄신하여 노론에 정치를 위임하였다.


그러나 노론이 소론에게 대살륙을 시도하자, 영조 3년에 다시금 탕평의 명분을 내세워 노론을 축출하고 소론 정권을 성립시켰다. 그러던 중, 영조 4년 청주에서 소론의 강경파들이 난을 일으키자, 다시금 노론에 정권을 맡기고 소론을 내몰았다.


이와 같이, 영조 초년의 탕평 시도 역시 편당적 조처로서 환국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아, 이 역시 숙종의 탕평책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 탕평의 원리


탕평이란 용어는, ‘서경’ 홍범조(洪範條)의 ‘王道蕩蕩 王道平平’에서 따온 합성어로서, 임금의 법도요, 정치의 기본 준칙이었다. 즉, 임금은 항상 치우침이 없이 공평 무사해야 한다.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하여서 감싸도 안 되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여서 물리쳐도 안 되니, 그것이 임금의 도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정치의 바탕은 임금이 도(道)와 의(義)를 솔선 수범하는 왕도 정치(王道政治)이어야 하며, 그 왕도 정치의 요체는 ‘母偏母黨 母黨母偏’에 있으니, 그렇게 되면 왕도는 탕탕평평해진다는 것이다.


■ 탕평파(蕩平派)의 대두


17세기 말 이래 붕당 정치가 변질되면서 붕당 간의 정치적 갈등은 마침내 서로를 용납할 수 없는 극단적인 대립상을 보였고, 왕권마저 여기에 휩쓸려 약화되고 동요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격동을 직접 체험하고 즉위한 영조는 왕권 및 정국의 안정을 선결 문제로 여기기 않을 수 없었고, 이에 파붕당(破朋黨)을 내세워 탕평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붕당을 파헤친다는 것은 용이하지 않았다. 붕당 자체의 뿌리가 깊고 거셀 뿐 아니라, 붕당 사이의 원한은 끝이 없어 타협이 어려웠다. 게다가, 왕권이 약해서 이들을 힘으로 조정하기에도 한계가 있었다. 이에, 영조는 노론과 소론의 강경론자를 멀리하고 온건론자를 중요하여 자신들의 영조에 협조, 당화(黨禍)를 예방하며 자신들의 지위를 구축하고자 하니, 여기에 이른바 탕평파가 형성되었다.

 

탕평파는 조현명, 조문명, 송인명 등 소론의 온건론자들이 중심이었는데, 그들은 영조의 즉위로 노론의 세력이 비대해지는 속에서 이를 견제하고자 국왕과 밀착하였던 것이다.


■ 사도 세자(思悼世子)의 죽음


사도 세자는 영조의 둘째 아들로, 큰 아들 경의군이 영조 4년에 10세로 사망하자, 세자로 책봉되었다. 15세 때 왕을 대신하여 정치를 맡기도 하였다. 사도 세자는 조숙하고 총명한데다가, 영조의 총애를 독차지하여 언행에 거리낌이 없었다.

 

게다가 호기심이 많아 지난날의 정쟁에 갚은 관심을 보였고, 기존 질서에 거부감을 지니고 있었다. 이에, 영조의 후궁 문숙의와 노론의 강경파들은 질투심과 두려움으로 견제하던 중, 비행을 내세워 모함하였다.


마침내, 1761년 임금도 모르게 관서 지방을 순행하고 돌아오자, 반대파들은 왕세자의 체통을 잃게 했다고 하여 논박, 서인(庶人)으로 폐하게 하고, 드디어 뒤주에 가두어 굶겨 죽게 하였다.

 

종래 사도 세자의 죽음을 악질(惡疾)과 광행(狂行)으로 인해 비롯되었다고 보아 왔으나, 궁중 여인들의 암투와 붕당 사이의 정치적 갈등에 희생되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 관계된 내용은 그의 부인 혜경궁 홍씨가 저술한 한중록(閑中錄)에 자세히 전하고 있다.


■ 장용영(壯勇營)


1791년(정조 15) 수원에 설치하였던 군영으로, 1802(순조 2)년에 총리영(總理營)으로 개칭하였다. 아버지 사도 세자가 참화를 당한 뒤 왕세손에 책봉되었으나, 신변의 위협 속에서 즉위한 정조는 영조의 뜻을 이어 탕평책을 실시하려 하였다.

 

그것은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고, 강화된 기반 위에서 나름대로의 정치를 펴고자 하는 것이었으니, 이에 남인 시파를 중용하고 진보적 지식인 및 서얼 계층을 기용하여 자신의 정치 세력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리고 규장각을 설치하여 정책 자문 기구로 삼고, 수원성을 새로이 수축하여 자신의 세력 근거지로 삼는 한편, 이 곳에 친위군의 성격을 가지는 장용영을 설치하여 붕당들의 세력 기반이었던 기존의 군영에 대항하여 자신의 군사적 기반을 구축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측근이었던 채제공(蔡濟恭)을 수원 유수로 삼아 장용영 도제조로서 지휘관을 가지도록 하였다. 구성은 내영(內營)과 외영(外營)으로 나누어, 내영은 병참을, 외영은 군사 지휘를 맡도록 하였는데, 지휘관으로는 대장, 영장 등이 있었다. 군병 총 수는 1만 2천여 명이었다.


■ 규장각의 설치


정조가 즉위한 직후(1776) 궁중에 설치하였던 왕립 문서고로서, 역대 국왕의 시문, 서화, 선보 등을 보관, 관리하였으며, 내각이라고도 하였다. 규장각은 단순히 학문 연구와 도서 편찬의 일만이 아니라, 국왕의 정책 자문 기구로서의 역할이 컸다.


초기에는 홍국영(洪國榮)의 지휘 아래 정조의 적대 세력을 숙청하는 데 앞장섰으며, 정세가 안정되자 문물 정비에 힘썼다. 규장각의 제학, 직각, 시교 등의 관원은 승정원, 홍문관의 관원보다 중시되었고, 사관(史官), 시관(試官)도 겸하여 당시의 문화 활동을 주도하였으며, 국왕과 더불어 정치를 논의하고 기획하면서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검서관은 유능한 서얼 출신을 기용하였다.


■ 세도 정치의 개념


정치가 전개되는 속에서 일당 전제적인 붕당 세력의 비대화는 왕권의 상대적인 약화를 초래한다. 이와 같은 정세 아래에서 정국을 조정하지 못하는 국왕은 특수한 인물을 두터이 신임하여, 그에게 왕권의 대행을 위임함으로써 그가 정권을 독차지할 때 이를 세도 정치(勢道政治)라 한다.


이에 대하여 세도 정치(勢道政治)로 표현하기도 한다. 즉, 일찍이 중종의 신임을 얻어 대사헌이면서도 정권을 장악, 도학 정치를 폈던 조광조(趙光祖)에 의하면, 하늘과 인간은 본래 하나이지만, 하늘은 인간에 대하여 반드시 그 도(道)가 있어야 하고, 임금과 신하는 본래 하나이지만, 임금은 신하에 대하여 반드시 그 이(理)가 있어야 한다면서, 도학 정치의 요체는 세상을 올바로 이끌어가는 도(道)로서 세도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저선 후기의 세도는 정권을 전단하여 자기와 자기 가문의 이익만을 추구한 변태적인 세도로서, 외척에 의한 정권의 독차지였기 때문에 외척 세도 정치라 함이 타당하겠다. 그리하여 척리 정치(戚里政治), 문벌 정치(門閥政治), 벌열 정치(閥閱政治)라고도 한다. 요컨대, 붕당 정치의 파행적 형태, 나아가 경국대전에 규정된 봉건적 통치 질서의 변질이 세도 정치인 것이다.


■ 일당 전제화의 추세


16세기 후반에 나타나기 시작한 사림의 붕당은 동인과 서인으로 모습을 보였는데, 그 후 이합 집산을 거쳐 17세기에는 동인계의 남인과 북인, 서인계의 노론과 소론으로 정비되었다. 처음에는 북인이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인조 반정으로 정계에서 몰려나고 서인이 집권하였다.


서인은 남인과의 공존 관계를 잠시 유지였으나, 1680년의 경신환국, 1694년의 갑술환국으로 남인을 완전히 제거하더니, 자체 분열을 일으켜 노론과 소론으로 대립하였다. 경종의 즉위로 노론이 제거되고 소론이 집권하였으나, 곧 영조가 즉위하면서 노론이 중용되었다. 영조는 처음에는 탕평책을 써서 양 자의 공존을 꾀하였으나,

 

1728년 이인좌의 난을 계기로 점차 노론으로 기울어지고, 사도 세자 사건 이후에는 노론이 정치를 주도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정조가 즉위하여 탕평을 내세워 소론과 남인이 기용되기도 했으나, 순조 이후 세도 정치가 시작되면서 노론 일당의 전제화가 가속화되었다.


■ 안동김씨의 세도


안동 김씨는 김상헌(金尙憲)이 조정에 나아간 이래, 김수항(金壽恒), 김수흥(金壽興), 김창집(金昌集), 김창협(金昌協), 김원행(金元行), 김이안(金履安) 등이 정계와 학계에서 크게 이름을 드러낸 조선 후기의 명문 거족이다. 1801년 순조가 15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정순 왕후(貞純王后)가 정치를 후견하고, 김조순(金祖淳)이 선왕의 유지로 이를 보좌하였다.

 

그 후, 김조순은 자기 딸을 순조에게 결혼시켜 외척으로서의 정권을 장악하고, 김달순, 김명순, 김희순 등 안동 김씨 일파를 요직에 앉혔다. 그 후, 한때 풍양 조씨가 세도를 부렸으나, 철종이 즉위하면서 김조순의 딸 순원 왕후(純元王后)가 정치를 후견하게 되어 안동 김씨는 다시금 정권을 독차지하여 김문근, 김좌근, 김병국, 김병학 등이 주요 관직을 독점하고 세도를 부렸다.


■ 풍양조씨의 세도


풍양 조씨느 조지겸(趙持謙) 이래 소론의 가문이었으나, 영조의 탕평책을 계기로 조문명(趙文命), 조현명(趙顯命) 등이 중용되고, 이어서 조엄(趙嚴), 조진관(趙鎭寬) 등이 여직에 올랐던 조선 후기 명문 거족의 하나이다.

 

안동 김씨의 세도가 극성하던 중, 조만영(趙萬永)이 순조의 아들 효명 세자에게 딸을 결혼시켜 외척이 되었다. 효명 세자가 일찍 죽고, 그 아들이 헌종으로 즉위하자 풍원 부원군이 되어 세도를 부리면서 조인영 등 그의 일족을 요직에 앉혔으나, 철종이 즉위하면서 안동 김씨에게 세도를 빼았겼다.


■ 매관 매직의 실태


정치가 바르게 되려면 공정한 인사 관리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정치의 도리가 지켜지지 않고 관리 기강이 무너지면서, 인사권을 하나의 특권으로 간주하게 되고, 이를 구실로 축재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관직을 사고 파는 것은 광해군 때 재정 위기를 구실로 심하게 나타났고, 그 후 정치의 도덕성을 내세워 이를 금기시하였다.


그러나 도덕성을 포기한 새도 정권은 갖은 방법으로 관직을 매매하여 축재에 열을 올렸다. 매매의 대상은 중앙의 관직뿐 아니라, 지방의 벼슬자리 등 해당되지 않는 것이 없었으니, 감사 자리는 보통 5~6만 냥, 수령 자리는 2~3만 냥 안팎으로 거래되었고, 그 밖의 관직도 그 값이 정해져 있을 정도로 매관 매직이 성행하였다. 매관 매직은 관리들을 극도로 부패, 타락시켜 봉건 통치 질서를 파탄에 이르게 하였다.


■ 과거제의 폐단


과거는 관료로 진출하는 기본적 통로로서, 정치가 바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과거제가 공정하게 시행되어야 했다. 그런데 조선 후기 정치 기강이 문란해지면서 과거 제도도 문란해졌고, 많은 폐단이 생겨났다. 즉, 세도 가문에서 시관(試官)과 과장(科場)을 장악하고, 시험문제를 미리 빼내어 알려 주거나, 다른 사람으로 대신 시험을 보게 하고, 또는 다른 사람의 시험지와 바꿔 내게 하는 등 온갖 부정 행위를 자행하였다.


그리하여 자기들의 세력을 확장하고 재물을 모으는 데 힘썼다. 특정 가문 출신이 아니면 과거에 합격할 수 없었다. 학식이 뛰어나도 특정 가문과 줄을 대지 않으면 합격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대다수의 양반들은 과거에 실패하거나 아예 과거를 포기하고 낙향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종류와 횟수는 더욱 늘어나 다수의 합격자를 냈는데, 그만큼 과거제의 권위는 실추되었다.


■ 세도 정치의 미봉책


뇌물 수수와 관직 매매로 도덕성을 상실한 특정 가문의 세도 정치가 전개되면서, 정치 질서는 말할 나위도 없고 행정 기강이 크게 문란해져, 수령은 물론 아전들까지 민중을 수탈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온갖 방법으로 착취하였다.

 

궁지에 몰린 농민들은 가혹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관부에 시정을 요구하고, 나아가 무리를 지어 항거하기에 이르렀다. 사회적 불안이 고조되어 가자, 봉건 지배층은 더 이상 방관할 수만은 없었다.


조정에서는 현지의 사정을 조사하고, 부정을 막기 위하여 우선 암행 어사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암행 어사 자신이 수령과 결탁하여 부정을 자행하는가 하면, 세도 정권과 연계된 수령의 횡포로 인해 실효를 거둘 수 없었다. 한편, 조정에서는 유리 걸식하는 민중 세계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진제장(䀼濟場)을 설치, 음식을 제공하였으나, 역시 한계가 있었다.

 

조정에서는 이를 시정하기 위하여 삼정이정청(三政氂正廳)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삼정이정청은 삼정 주에서도 특히 문제가 많았던 환정에서의 모곡(耗穀) 징수를 없앴다.


모곡은 빈민에게 곡식을 빌려 줄 때 자연적으로 소모되는 것을 보충하기 위하여 원곡의 10분의 1을 징수하게 하였던 것인데, 정치가 부패하면서 모곡이 원곡보다 많은 것이 예사였다. 그러나 비록 부분적으로 조정에서 시정하고자 노력하였지만, 근본적인 대책일 수는 없었다.


■ 부연사행(赴燕使行)


1636년 병자호란 이후 대 중국외교의 상대를 명에서 청으로 바꾼 조선은, 청에 대해 사대의 예로서 매년 사절을 청나라의 서울 연경(燕京)에 보내야 했다. 이들 사절을 부연사행이라 한다. 부연사행에는 정기적으로 성절자, 정조사, 동지사, 천추사 등이, 수시로는 사은사, 진주사, 진하사, 진위자, 문안사 등이 있었다.

 

이들 사행에는 대개 정사, 부사, 서장관, 역관 등 수백 명이 참여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조공 무역과 아울러 사무역이 행해졌다. 특히, 사절이 왕래하는 의주의 중강(中江), 만주의 책문(柵門), 심양(審陽) 등지는 중요한 무역 기지로서, 조선과 청 상인의 무역 거래가 활발하였다.


■ 백두산 경계 확정 문제


백두산 일대의 만주 지방은 예부터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였는데, 청나라가 이 곳을 중심으로 건국하여 봉금 지대(封禁地帶)로 설정하여 주민의 거주를 금하였다. 그러나 17세기 후반, 우리 조상은 지형상 가까운 지역을 개척, 거주하는 경우가 점차 많아졌다.

 

이에 청은 조선에 경계를 분명히 하자고 하여, 1712년 오라총관 목극등(穆克登)을 파견하니, 조선에서도 박권(朴權), 이의복(李義復) 등을 보내어 함께 답사하고 결정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백두산 기슭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워 후일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비문의 해석 차이로 인해 후에 간도 귀속 문제가 제기되었다.


■ 도쿠가와 막부


16세기 말, 분열되어 있던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일하였으나, 그가 죽자 일분 동부 지방의 군벌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실권을 장악하고, 현재의 도쿄인 에도에 막부를 개설하였다. 도쿠가와 막부는 봉건 제도를 강화하여, 장군을 정점으로 하는 막번 체제(幕蕃體制)를 확립하고,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 질서를 엄히 하였다.

 

크리스트교를 엄금하고, 쇄국을 단행하였으나, 조선과는 국교를 재개하여 사절은 보냈고, 조선에서도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1868년 메이지 유신 때까지 260년 계속되었다.


3.경제 구조의 변화와 사회 변동


■ 봉건제적 사회


조선 시대의 사회적 성격을 말할 때 흔히 봉건제적 사회라 한다. 조선 시대를 봉건제적 사회라고 인식할 경우 그것은 역사 발전의 단계론에 의한성격 규정의 한 반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 발전의 단계론적 인식은 주로 사회 발전을 특정의 역사적 요인, 즉 생산 양식이나 생산 수단과 같은 것이나 또는 이념과 종교적 가치와 같은 특정의 요인들에 의해서 역사의 전체적인 전개를 단계화한 것으로서, 봉건제적 사회라는 것도 이러한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 엄격한 의미에서 봉건제도와 봉건제적이라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조선 시대의 정치 사회를 봉건제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봉건 제도하에서의 성격을 찾아볼 수 있다는 뜻이지 바로 봉건 제도라는 것은 아니다. 지주와 소작인 관계를 중심으로 해서 생각할 때 조선 시대는 중세 봉건 제도적인 속성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봉건재적이라는 표현은 농민들의 토지 소유 관계나 생활 양식, 그리고 지배․피지배 관계를 중심으로 한 것이지, 기본적인 정치사회의 제도적인 성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봉건 제도는 엄격한 의미에서 그것은 정치학적인 개념이다. 지방 분권적인 봉토와 영주와 가신의 개념 위에서 있는 제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의 정치 사회는 정치 체계적인 면에서는 봉건 제도가 지배했던 사회는 아니고 오히려 중앙 집권적인 정치 체계를 보여 주었다.


■ 조선후기의 신분별 인구 구성


산업 활동의 다변화와 경제 생활의 진전은 필연적으로 신분 구조의 변화를 유발하였다. 조손 후기에 있어서, 신분 구조의 변화는 계층간의 신분이동과 계층 내의 신분 분화의 두 가지 현상이 혼용되면서 진행되었다. 이와 같은 신분제의 동요는 농민층의 성장과 양반층의 몰락이라는 두 기반 위에서 전개되었다.

 

구체적으로, 평민층이나 천민층이 호적상 양반 신분으로 상승함으로써, 종래 1할 내외였던 양반층이 19세기 중엽에는 6, 7할이 되고, 전 국민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던 평민층은 3할 내외, 천민층은 거의 소멸되다시피 되었다.

 

양반 신분으로 상승하는 농민이 늘어나고, 대신평민층이나 천민층이 그만큼 감소하면서 봉건적 신분제는 전면적으로 무너져 갔다. ▨ 항조(抗租)와 거세(拒稅). 18, 9세기 변혁 주체 세력의 형성 과정으로서의 농민 항쟁은 다양한 형태를 띠고 나타났다.

 

먼저, 지주 전호제라는 봉건적 생산 관계하에서 경제 외적 강제에 의해 소작료를 수탈당하고 있던 소작농적 강제에 의해 소작료를 수탈당하고 있던 소작농들은 그 소작료(지대)를 인하시키고,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농민적 토지 소유를 쟁취하기 위하여 항조 운동을 폈다.


항조 운동은 지주층의 고율 소작료가 그 주원인이 되고 있었는데, 18, 9세기에 특히 격화되고 있었다. 소작농은 소극적 또는 적극적으로 지대(地代)의 납부를 거부하기도 하고, 개인적 또는 집단적으로 이를 체납하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여러 마을과 면민이 집단화하여 폭력으로써 이를 거부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도지제가 성립되고, 지대의 금납호가 이루어져 갔으며, 소작료율이 인하되었다.


한편, 농민들의 거세 운동은 봉건 국가의 수취체제가 가혹하고 불합리함을 인식하고, 이를 피하고자 함에서 일찍부터 유망(流亡)의 형태로 나타났다. 19세기에 삼정 문란이 가속화되면서 농민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조세의 납부를 거부하였으니, 민중의 저항 투쟁은 전국적인 민란을 야기시켰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조정에서는 삼정이정청이라는 세제 개혁 위원회까지 설치하여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하였으나, 보수적 위정자들에게 근원적 대책을 기대할 수 없었다. 온갖 잡세의 조정과 중간 수탈의 제거를 모색하였지만, 그 역시 실효를 보지는 못하였다.


■ 농촌의 임노동


조선 후기 농촌에서는 개간, 매점 등에 의해 대토지를 소유한 양반 지주가 있는가 하면, 합리적 경영에 의해 경작지를 확장한 경영형 부농층이 생겨났다. 이들은, 그 경영을 소작인이나 가족의 노동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임노동자의 고용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특히, 이앙법으로 농법이 바뀌면서, 모내기철에는 단시일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게 됨으로써 임노동자의 고용이 요청되었다.


18세기의 유명한 암행 어사였던 박문수(朴文秀)에 의하면, 불과 열 마지기의 농토를 경영하는 데도 세 번 김매고 벼베고 타작하는 데 소요되는 노동력이 연 50명이나 되며, 이들은 모두 임노동으로 충당되는데, 한 사람의 품삯이 쌀 다섯 되와 돈 5푼이라 고 하였다.

 

농촌의 임노동자로는 머슴이라 불리는 고공(雇工)이 일찍부터 있어 왔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는 장기적으로 고용되는 고공보다는 단기적으로 고용되는 경우가 많아 자유 노동자, 계약 노동자적인 성격이 높아 갔다. 대개 1년을 계약 기간으로 하는 품팔이 노동력이 많았던 것 같다.


■ 영농 기술의 개발


양 난 후, 조선 사회가 당면한 과거제는 농업 생산력의 회복과 증대에 있었다. 그것을 위하여는 농지의 개간과 농법의 개량이 우선적으로 추진되어야했다. 그런데 농지의 개간은 봉건 지배층의 토지 겸병책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따라서, 농민들이 생산력을 늘리기 위하여는 영농 기술의 개발에 주로 힘써야 했다. 농법의 개량 문제는 농지의 개간과는 달리, 직접 생산자의 기술적 문제에 속하는 것이었다. 농법의 개량은 수전 농업이나 한전 농업에서 모두 일어나고 있었다.

 

수전 농업에서는 종래 직파법이 일반적이었으나 이앙법이 점차 보급되어 갔고, 한전 농업에서는 농종법이 견종법으로 바뀌어 갔다. 이앙법이나 견종법은 모두가 종전의 농법에 비하여 노동력을 절반 이상 절감시키고, 반면에 수익은 2배 이상 증대시켰다. 더구나, 노동력의 절감은 양 난 이후 인구 감소에 따른 노동 인력의 부족을 보충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리고 이앙법의 보급은 논에서 보리를 다시 심을 수 있어서 이모작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 밖에, 농민들은 시비법을 개발하고, 농기구를 다양하게 개량하였으며, 감자, 고구마, 담배, 고추 등 새로운 작물을 재배하여 생산의 전문화와 다각화가 촉진되었다.


■ 농종법(壟種法)과 견종법


영종 기술의 발달은 벼농사뿐만 아니라, 보리 농사에도 나타났다. 종래에는 농종법에 의해 밭이랑의 두둑에 씨를 뿌렸으나, 조선 후기에는 밭이랑의 고랑에 씨를 뿌리는 견종법이 보급되어 갔다. 견종법은 이앙법과 마찬가지로 김매기에서 노동력을 덜 수 있고, 종자가 바람이나 빗물에 쓸려가는 것을 막을 수 있어 소출이 늘어났다.


■ 시비법의 개발


시비, 즉 작물이 잘 자라도록 거름을 주는 것은 단위 면적의 생산성을 높이는 데 매우 중요하다. 조선 후기의 농민들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영농 방법을 개선함과 아울러, 시비법도 개발하였다. 즉, 비료의 양과 질을 높였으니, 인분의 이용이 다양화되었고, 비료의 종류도 풀을 베어 거름을 만드는가 하면, 가축의 분뇨를 이용하고, 벼나 보리의 짚을 태워서 토양의 유기질 집적과 질소 성분을 증가시켰다. 시비 방식도 기비법(基肥法)에서 추비법(追肥法)으로 발전하였다. 이로 인해 생산력이 훨씬 높아졌다.


■ 농기구의 개량


농기구의 개량도 생산력을 증대시켰다. 작업 과정에 따라 농기구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정밀하게 분화되어 갔다. 가는 연장으로서 가래, 따비, 삽, 써레, 쇠스랑 등이, 김매는 연장으로서 호미가, 수확할 때에는 낫, 도리깨 등이, 도정 작업에서는 밀돌, 방아, 매 등이 쓰였다.

 

특히, 땅을 깊이 파는 쟁기가 소의 힘을 통해 이용되면서 토양의 배양력을 높였다. 한편, 종자를 흙으로 덮어 보호하고, 땅의 면을 평평하게 하는 번지 또는 밀개가 놀리 쓰여 이앙법의 보급에 이바지하였다.


■ 상업 작물의 지배


상업 작물은 작물 재배의 목적이 판매에 있었고, 따라서 농민층의 소득을 높여 주었다. 당시 널리 인기 있고 높은 이윤을 보장해 주는 작물은 담배, 목화, 약재, 채소 등이었는데, 논이나 밭농사보다 수 배의 이익이 있었다고 한다. 16세기에 전래된 담배는 경상도, 전라도, 평안도 지방에서 많이 재배되었다.

 

채소는 주로 도시 주변에서 재배, 판매되었는데, 주요 작물은 배추, 파, 마늘, 오이, 미나리 등이었다. 약재 역시 수익성이 높았는데, 전주의 생강, 황주의 지황, 개성의 인삼 등이 유명하였다.


■ 농민의 1인당 경작 면적


농법의 개량은 생산성을 높이기도 하였지만, 노동력을 크게 감소시켰다. 이앙법이나 견종법 모두 김매기, 추수 등에서 노동력을 훨씬 덜어 주었다. 단위 면적당 경작 노동을 8할 정도 감소시켰다. 그리하여 부지런한 농민은 남는 노동력을 다시 활용할 수 있어, 1인당 경작 면적이 더 넓어졌고, 그리하여 광작(廣作)이 나타났다.

 

기록에 의하면, 직파법으로 10두락도 못 짓던 농가에서 이앙법으로 20두락 내지 40두락까지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광작은 대개 부농층에 의해 전개되었으나, 자작농, 소작농 등에서도 나타났다. 지주는 토지 자체의 확대를 통해, 자작농이나 소작농은 소작지 경영의 확대를 통해 경작 면적을 늘려 갔다.


■ 농업 경영의 합리화


농민들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영농 기술을 개발함과 아울러, 경영을 합리화하여 소득을 높이기도 하였다. 농민들이 의도한 방안에는 많은 농지를 적은 노동력으로 일구어 소득을 늘리는 법과, 적은 토지에 소득이 높은 작물을 재배하여 수익을 늘이는 방법이 있었다.

 

전자의 방안을 흔히 광적이라 하는데, 이앙법이나 견종법으로 노동력을 덜게 되자 농민들의 1인당 경작 면적이 더 넓어질 수 있었고, 이에 따라 한 집에서 넓은 토지를 스스로 경작하는 방식이다. 더구나, 이 때 지주들은 임노당자를 고용하여 보다 생산성을 높였다.


한편, 후자의 방안으로 농민들은 고소득을 보장하는 인삼, 담배, 목화, 채소, 과일, 약재 등의 상품 작물을 재배하였는데, 특히 인삼과 담배는 인기 있는 작물이었다. 성루 근교에서는 채소 재배가 성하여 농민들의 소득을 높여 주었다.


■ 경영형 부농


농법의 개량과 전환은 노동력을 절감하고서도 소득의 증대를 가능하게 하였으므로, 농민층 가운데서 활동적이고 영리적인 농민은 경영 확대를 하게 되고, 이를 통해서 부를 축적해 갔다. 이들을 경영형 부농 또는 서민 지주라 한다.


경영형 부농은 경작지를 확장하여 잉여 노동력으로 생산성을 높였으니, 그것은 자경지(自耕地)에서도 일어났고 차경지(借耕地)에서도 일어났다. 또, 그들은 유통 경제가 발달함을 이용하여 영리 목적의 상업적 농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상업적 농업에 임노동자를 고용하여 보다 많은 이득을 올렸다. 이들은 지주형 부농 또는 봉건 지주들이 토지의 집적, 집중을 통해 지대(地代)의 수익을 증대시켜 부를 축적한 데 대신하여, 이 시기의 경제 변동을 배경으로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촉진하면서 성장한 계층들로서, 봉건 사회 해체기의 새로운 변혁 세력으로서 역할하였다.

 

즉, 이들은 지주 전호제에 있어서 신분제의 예속성을 한층 약화시켜 갔고, 경제적 관계에 의거한 지주제를 더욱 발전시켜 나갔다.


■ 전호권(佃戶權)


전호란, 봉건적 토지 소유관계에 있어서의 남의 농토를 빌려서 농사짓는 소작농을 말하며, 전객(佃客), 장객(莊客)이라고도 하였다. 전호는 고려, 조선 사회에서 있었지만, 과전법 체제가 무너지고 토지의 사유화가 진전되면서 소작 관행이 일반화되고 보편화되어 갔다.

 

그런데 종래의 전호는 일종의 경제적 계약 관계로 지주의 토지를 경작하지만, 엄격한 신분적 차별과 과중한 공납의 부담, 그 밖에 여러 경제 외적 강제를 받아 실제에 있어서는 농노적 성격의 계층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전호는 이 시기의 사회 변동과 결부되어 의식의 각성을 보여 경제 외적 관계를 해소시키면서 이익 분배의 합리성을 주장하여 갔다. 먼저, 민전에서 지주, 소작 관계가 순수한 경제 관계로 전환되어 갔고, 이어서 궁방전, 둔전 등 지주권이 강대한 곳에서도 전호들의 항조 운동이 거세게 전개되면서 소작 조건에 개선되어 갔다.

 

개선된 전호의 소작권은, 첫째, 차경(借耕)이 자유로워졌으니, 특정 지주의 농지를 차경하거나 차경하지 않는 것은 전호의 자유 권리였다.


둘째, 전호는 그의 차경지에 대해 일정한 지배권을 행사하였으니, 도지권(賭地權)이라 하여 전호가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한 지주는 전호를 임의로 교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를 토대로 소작료의 납부 형태는 종래의 분반 타작제〔分半打作制(타조법)〕에서 도조법(賭租法)으로, 이어서 금납제(金納制)로 전환되어 갔다. 전호권의 성장은 봉건적 지주에 대한 치열한 항쟁의 결과였던 것이다.


■ 봉건적 지주


봉건적 지주란, 경제적 사적 지배에 정치적 공적 지배가 아울러 가해지는 봉건적 사회에 토대하여 지배 계층이 정치력을 이용, 막대한 토지를 점유하면서 형성된 지주를 말한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의 토지를 차경하는 전호에 대하여 경제적 지배 관계를 넘어서서 독자적인 정치적 지배력까지도 행사할 수 있었다.

 

즉, 이 시기의 전호는 농노와 같은 예농적 농민으로서, 봉건 지주는 이들을 인격적으로 예속하고 있었으며, 신분적 예속에 의해 지대(地代)를 일방적으로 수탈하고 있었다. 지주는 전호를 살리지도 않고 죽이지도 않는 상태에서 예속, 보호하였으며, 전호는 토지에 부속된 하나의 자연물처럼 토지 그 자체에 긴박되어 있었다.

 

봉건적 지주의 실체로서는 나말 여초의 호족(豪族), 고려 시대의 문벌 귀족과 권문 세가, 조선 시대의 양반 사대부가 대표적이었다.

 

■ 도지권(賭地權)


조선 후기 소작 전호의 권리가 성장하면서 성립한 농토 경작권을 도지권이라 하는데, 17세기 이후에 발달하였다. 즉, 소작농은 도지권에 의해 그 소작지를 영구히 경작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지주의 승낙을 받지 않고도 임의로 타인에게 자유로이 매매, 양도, 저당, 상속할 수 있었다.

 

나아가, 도지권이 성립된 토지의 소작료율은 매우 저렴하여, 보통 타조법에서는 생산물의 약 50%였는데 비하여, 도지권 소작지에서는 약 25~33%로 저율이었다. 따라서, 도지권을 가진 소작농은 이를 다시 다른 사람에게 전대(轉貸)하여 차액을 취득하기도 하였는데, 이를 중도지(中賭地)라고 하였다.

 

도지권은 매우 강대하여, 만일 지주가 이를 소멸시키고자 할 때에는 먼저 소작인에게 동의를 구하고, 상당한 대가를 지급하여 이를 매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왜냐 하면, 도지권은 본래 소작농이 지주가 농토를 개간, 매수할 때 특정의 노동이나 자본을 제공하였기 때문이며, 그 위에 이 시기에는 신분 제도의 붕괴 과정에서 소작농의 신분적, 경제적 지위가 향상되고 있었으며, 화폐 경제의 발달 속에서 합리적 계산 관계가 성립되어 갔기 때문이었다.


■ 장인의 등록제


봉건 사회에 있어서의 생산 활동은 상품의 판매보다는 관부의 수요에 있었기 때문에, 국가의 엄격한 구제 속에서 수요에 있었기 때문에, 국가의 엄격한 규제 속에서 관장제(官匠制)에 의해 이루어 졌다. 따라서, 생산자인 장인은 국가에 등록해야 했고, 그 생산 과정과 생산물의 처분도 국가가 통제하였다.


조선 시대의 장인은 경공장(京工匠)과 외공장(外工匠)으로 크게 나뉘는데, 경공장은 한성부, 외공장은 각 도의 공장안(工匠案)에 등록해야 했다. 이를 장적 제도(匠籍制度) 또는 성적 제도(成績制度)라 하였다. 이들은 각 관아에 소속되어 전업적으로 제작 활동을 하였는데, 경국대전에 의하면 경공장은 30개 관아에 130개 부문에서 2841명이, 외공장은 27개 부문에서 3764명이 종사하고 있었다.


■ 납포장(納布匠)


관장제하에서 관아에 등록된 장인이지만, 부역에 동원되지 않고 그 대가로서 장포(匠布)만 바치고 나름대로 생산 활동에 종사한 장인을 일컫는다. 관장제하에서 장인은 원칙적으로 공장안에 등록되어 일정 기간동안 부역 동원되어 생산에 종사해야 했다.


그러나 16세기 이래 장인 등록제가 서서히 무너져 갔으니, 장인들은 생산 활동에 대한 통제와 그들에 대한 불충분한 처우로 인해 관장제에서 벗어나려 하였고, 이를 전후하여 민간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관부에서도 수요품을 시장에서 구입하는 편이 유리해지면서 장인의 등록제는 그 의미를 잃어 갔다.


그리하여 18세기 중엽에는 장인의 등록제를 폐기하고, 장인에게서 장포를 받는 방향으로 바뀌어 갔다. 이로써 납포장은 부역 동원에서 풀려나 자유로이 생산 활동에 종사하며, 생산품을 판매, 처분함으로써 영리를 취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하여도 무기나 사기 제조 등에서는 여전히 관청 수공업장이 존속하고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장인들이 노임을 받고 고용되었다. 관청 수공업장에 고용된 장인의 노임은 납포장이 바치는 장포로 충당되었다.


■ 상업 자본의 수공업자 지배


수공업자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그들은 주문 생산하여 나아가 상품 생산도 모색하였다. 그리하여 수공업자들은 독자적으로 도자전(刀子廛), 이엄전(耳俺廛), 신철전(薪鐵廛) 시전을 개설하기도 하였다. 이는 시전 상인에게는 하나의 위협이었다.

 

이에, 시전 상인들은 금난전권(禁亂廛權)을 이용하여 장인의 시전 개설을 방해하였고, 통공 정책(通共政策)으로 인해 그것이 뜻대로 안 될 때에는 우세한 자본력으로 장인들의 원료를 매점하거나, 그 제품을 매점하여 장인의 판매 활동을 소비자에게 격리시키는 방법으로 그들을 지배해 갔다.


■ 사채(私採)와 잠채(潛採)


사채란, 민간인의 사적인 광산 경영을 뜻하는데, 합법적이다. 이에 대하여, 잠채란 비합법적인 채광 행위를 말한다. 본래 광산 경영은 사적인 경영이 통제되고, 농민을 부역 동원하여 국가가 직접 경영하였다.

 

그러나 농민들의 피역 저항으로 광산의 개발이 부진하였다. 이에, 이와 같은 문제점을 타결하고 광산 개발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1651년 설점수세법(設店收稅法)을 실시하여 사채를 허용하였다. 설점수세제 아래에서의 광산의 경영은 물주가 채광 시설과 자금을 투자하고, 혈주(穴主)나 덕대(德大)들이 광군(鑛軍)을 고용하여 직접 채광 작업을 지휘하였다.

 

광군들은 대개 농촌에서 유리된 농민들로서, 농업을 겸한 계절 노동자도 있지만, 또 전업적인 광산 노동자도 있었다.

조선 후기에 이 같은 사채가 널리 보급되어 갔으나, 설점수세를 명목으로 수령과 아전들의 착취가 심해지자 18세기 중엽 이후에는 심산 궁곡 등 관부의 감시가 덜한 곳에서 잠채가 성행하였다. 지방의 토호나 부상 대고들이 수령과 결탁하여 잠채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 시전(市廛)의 특권 폐지


시전 상인들은 정부가 지은 건물에서 관청 수요품을 조달하면서 상거래에서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이들은 16세기 이후 상업 인구가 늘어나면서 거리마다 난전이 생겨, 그들의 상업 활동에 제약을 가하자 독점 매매권을 강화하여 금난전권을 행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8세기에 이르러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는 속에서 금난전권을 내세운 시전 상인들의 횡포가 심해짐에 따라, 도시에서의 경제 질서가 경화되는 한편, 물가가 계속 상승하여 도시 빈민층과 영세 상인 및 소생산자층의 생활을 크게 압박하였다.

 

그러나 사상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시전 상인과 대결하면서 경제력을 강화시켜 갔다. 이에, 정부도 더 이상 시전 상인을 보호할 수 없어 1791년(정조 15) 육의전 이외의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을 폐지하였다. 이로써 도시에서의 사상의 활동이 한층 더 활발해졌다.


■ 도고의 출현


도고(都賈)란, 조선 후기에 있어서 상품을 매매하거나 독점하는 상행위 또는 상인을 말한다. 도고는 ‘都鳸, 都庫, 都家 ’라고도 하는데, 대동법 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개념이다. 도고 상업은 조선 후기의 특징적인 상업 형태로서, 당시의 경제계의 변화, 즉 대동법 실시에 따른 공인 자본의 발달, 상업 인구의 현저한 증가, 금속 화폐의 전국적 유통, 그리고 외국 무역의 발달 등으로 인하여 대두되었다.

 

시전 상인, 경강 상인, 개성 상인(송상), 의주 상인(만상), 동래 상인(내상) 등은 정부와의 관계 및 그들의 우세한 자본력을 이용하여, 조직적이고 대규모적 도고 상업을 영위하여 막대한 자본을 집적해 갔다.


■ 객주(客主)와 여각(旅閣)


객주와 여각은 조선 후기 교통의 중심지 또는 사업 도시에서 활동하던 상업 금융 기관으로, 양자는 뚜렷이 구분되지 않는다. 특별히 구분한다면, 객주는 모든 상품을 취급하고, 여각은 소금과 어물을 취급했다고 하며, 또한 객주는 자본 규모가 작고, 여각은 자본 규모가 컸다고 한다.

 

객주는 다시 보행 객주와 물상 객주로 나뉘는데, 보행 객주는 숙박업을 주로 하였고, 물상 객주는 상업 금융 기관으로서의 기능이 컸다. 그들은 위탁 판매업을 하며, 구전을 받았고, 상품의 흥정 매매에는 거간을 내세웠다. 상품을 담보로 자금을 융통해 주며, 어음을 발행하기도 하였다.


■ 포구(浦口)의 상품 유통


17세기 이후로 서울이 상공업 도시로 변모하는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전국 각지의 포구도 지역적 유통권의 거점이 되어 갔다. 특히, 선박을 통한 상품 유통은 포구를 상업 중심지로 변화시켰다. 예컨데, 한강의 여러 포구, 낙동강 하구의 칠성포(七星浦), 영산강 하구의 법성포(法聖浦)․사진포(沙津浦), 전주의 사탄(沙灘), 금강의 강경포 등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한강 포구, 칠성포, 강경포가 가장 발달한 포구이다. 18세기 말 19세기 초에는 이 같은 대포구와 아울러 소포구도 상품 유통의 거점으로 변해 갔다. 19세기에 신설된 포구는 상업 이윤 추구를 위하여 포구주인층에 의해서 적극적으로 설치되었다. 상품 유통의 기생적 존재인 포구주인층은 점차 상품 유통을 직접 장악하고 도고 상인으로까지 활약하게 되었다.

 

포구에는 강상과 객주(客主), 여객주인, 포구주인, 강주인 등이 상업 활동을 주도하였다. 강상(선상)과 여객주인의 상업 활동은 경강의 두모포․노량진․용산․마포․서강․뚝섬․양화진 지역에서 가장 활발하였다. 이들 경강 상인은 세곡 및 지대 운송업에 진출하여 성장하였다. 외방읍에서는 역개 주인이 선상 거래를 담당하며 활동하였다.


■ 송도 사개 부기(松都四介簿記)


개성의 송상(松商)들이 조선 후기에 사용하던 상거래 장부 기입 방식이다. 조선 왕조의 성립으로 권력권에서 배제된 개성에서는, 일찍부터 지식층까지 상업에 종사함으로써 상거래의 합리적 경영 방식을 개발하였고, 그리하여 서양보다 200년이나 앞서서 복식 부기(複式簿記)를 사용하였다. 이것을 사개 송도 치부법(四介松都治簿法)이라고도 한다.


장부의 조직, 기입 방법, 결산 처리 등이 오늘의 복식 부기와 흡사하며, 그 특징은 대차(貸借)의 관념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의인법(擬人法)을 사용한 점이다. 즉, 모든 물건 또는 사실을 사람과 같이 인격을 주어 처리하였다.


■ 조선 후기의 대외 무역


조선 왕조는 농업을 중시하고 상공업 활동은 정책적으로 제한하였다. 대외 무역 역시 엄격히 제한되어, 중국에 대해서는 조공 무역, 일본에 대해서는 왜관 무역만이 인정되었다. 그러나 17세기에 이르러 국내의 상공업이 활기를 띠고, 국제적으로도 여건이 바뀌어 무역이 활기를 띠었다.

 

즉, 조공 무역에 부수하여 왕래하는 사신 행렬들에 의해 사적인 무역이 번성하여 갔다. 특히, 역관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한 번의 사행에는 20명 내지 30명의 역관들이 수행하였는데, 이들은 대개 무역에 종사하였다.


사행의 무역 자금은 8포(八包)의 인삼, 즉 80근의 인삼이었다. 후에는 인삼에 대신하여 은(銀)을 휴대할 수 있었다. 8포는 사행원에게 합법적으로 허용한 무역량의 한계였는데, 무역이 활발해짐에 따라 그 이상의 거래도 흔히 이루어졌다.

 

또 사행에게 주어진 무역권이 사상인에게 넘어가면서 무역에의 통제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를 전후하여 민간 무역도 합법화되어 개시(開市)가 열렸는데, 중강, 경원, 회령 등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개시 무역은 정부의 제약을 받았기 때문에 차차 사무역이 생겨나 후시(後市)가 발달하였다. 즉, 중강 후시, 책문 후시, 단련사 후시에서는 교역량이 많아, 책문 후시에서는 한 번에 대개 10냥 값어치의 상품이 교환되었다.

 

무역에서의 결재 수단은 인삼과 은이 주로 쓰였는데, 그로 인하여 국내의 약용 인삼이 부족하고, 국가 재정 기반이 약화되는 문제점을 낳기도 하였다.


■ 양반 관료의 보수화


양반이란 용어는 본래 문반(동인)과 무반(서반)을 합하여 부른 것이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문․무의 관료뿐만 아니라, 이들의 가족, 친족까지도 양반으로 지칭되었다. 즉, 신분의 개념으로 바뀐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부조(父祖), 증조(曾祖), 외조(外祖) 등 4대 조상 이내에 벼슬한 적이 있으므로 양반으로 인정되었다.


양반들은 신분을 지키기 위하여 관직을 얻고자 노력하였다. 따라서, 양반들은 과거 시험 준비에 일생을 걸고 씨름하였다. 더구나, 16세기 이후 정치적 갈등이 심해지면서 자체적으로 도태 현상이 나타나자,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자 특권을 바탕으로 양반 관료 체제를 보다 강화시켰다.

 

즉, 양반은 토지, 노비, 관직, 군역에 있어서 특권을 누리면서, 한편으로는 성리학의 명분론이나 중세적 사회법제를 강화하여 폐쇄적 신분 체제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양반 관료의 보수화는 당시 변화하고 있는 기층 사회와의 갈등을 불가피하게 하였다.


■ 정쟁(政爭)


사림들이 붕당 정치를 희구하여 전전한 정치 풍토를 모색하였지만, 그것은 조선 사회의 여건상 붕당 사이의 정치적 갈등과 대립을 불가피하게 하였다. 즉, 조선 사회에서는 벼슬길이 양반의 지위를 유지시켜 주는 길인데, 벼슬길은 좁았으므로, 벼슬길은 자연히 권력과 밀착되어야 했고, 따라서 당파의 분열과 붕당 간의 대립은 자연적이었다.


사림들은 1670년대 신구 세력의 대립으로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졌고, 그 후 동인당이 정권을 장악하였는데, 왕세자의 책봉 문제로 죄를 입은 정철의 문제로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분열, 대립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북인이 정권을 잡자, 다시 대북과 소북으로 나뉘었다가 광해군 때는 대북이 정권을 독차지하였다.


인조 반정 후 서인이 정권을 잡았으나, 서인은 건전한 붕당 정치를 추구하여 남인과의 공존을 꾀하였다. 그러던 중 복제(服制) 문제를 둘러싸고 서인이 남인과 예송 논쟁을 일으켜, 처음에는 남인이 승리하였다. 집권한 남인은 서인의 숙청 과정에서 강경파와 온건파가 대립하여 청남과 탁남으로 분열되었으나, 다시금 서인이 집권하면서 내몰렸다.

 

집권한 서인 역시 노장파와 소장파가 대립하여,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갈등을 자아내다가, 영조의 즉위로 노론이 정권을 주도하였다. 붕당 간의 대립은, 처음에는 상호의 존재를 인정하기도 하였으나, 정쟁이 가열되면서 숙청과 탄압이 심화되고, 보복이 계속되었다.


■ 향반(鄕班)과 잔반(殘班)


양반 관료들의 대립과 분열로 인해 집권세력이 성립하는가 하면, 정계에서 탈락, 소외되는 양반도 생겨났는데, 이들이 향반과 잔반이었다. 양반들은 관직에서 물러나면 대개 생계 유지조차 어렵게 되고, 더 이상 서울에 머무를 수 없어 조상의 사패지(賜牌地)나 연고지를 찾아 낙향하게 되었다.

 

그래도 향반은 향촌에서 토호적인 기반을 가지고서 어느 정도 행세를 하였지만, 몰락 양반의 대부분은 잔반이 되어 양반의 체통을 유지할 수 없었으며, 빈궁한 생활이나마 일하지 아니하고는 생계를 영위하기가 어려웠다.

 

이들은 자연히 현시에 비판적이었고, 그리하여 새로이 보급된 서학, 동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실학이나 양명학을 연구하였고, 민중의 항거에 호응하였다.


■ 규장각 검서관(檢書官)


규장각은 정조가 즉위 후 궁궐 내에 설치하였던 왕립 문서고의 성격을 지녔던 관청이다. 역대 국왕의 시문, 서화, 고명, 선보 등을 보관하였다. 정조는 규장각으로 하여금 학문 연구와 도서 편찬의 기능도 맡아보게 하면서 관원으로 제학(提學), 직각(直閣), 시교(侍敎) 각 1명과 검서관 4명을 배치하였다.


특히, 검서관에는 유능한 서얼 출신이 임명되었는데, 이에는 당시 비대해진 지존 벌열 세력을 제어하고, 자신의 심복 세력을 키우기 위한 정조의 특별한 의도로 작용하였다. 여하튼, 서얼의 검서관 임용으로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이 임명되었다. 그 동안 꾸준히 신분 상승을 도모하던 서얼 출신이 신분 상승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 중인의 신분 상승 운동


신분 계층으로서, 중인은 역관, 의관, 산관, 율관, 등의 기술관과 서리, 향리, 군교, 서얼 등을 일컫는다. 양반이 상급 지배 신분층이라면, 중인은 하급지배 신분층으로서, 양반이 입안한 정책을 실제로 수행하는 행정 실무자이다. 이들 중인층은 조선 후기의 봉건적 질서가 동요하는 속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보다 공고히 하려고 보수화되는 양반 사회에 점차 불만을 가지면서 나름대로 신분 상승의 길을 모색하였다.


영조 때 98인의 호장(戶長)들이 상소를 올렸고, 서얼들은 차별 폐지 운동을 펴 차별 을 다소 완화시키기도 하였다. 한편, 일부 중인들은 농민들의 저항 운동이 있을 때마다 정보를 제공하는 등 협력을 아끼지 않으면서 사회 변혁을 시도하였다.


■ 공노비(公奴婢)의 해방

 

조선 후기에는 사회 경제 변동으로 봉건적 신분제 점차 해체되어 가고 있었다. 피지배층은 신분적 분화를 계속하면서 그들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높여 갔다. 가자 앉은 신분에 있었던 노비도 신분 상승을 위해 노력, 실천해 갔다. 노비 분서의 소각, 피역과 도망으로 신분을 해방시켜 갔는가 하면, 법제적으로도 종모법에 의해 지위가 향상되었다.


한편, 정부로서도 노비의 추쇄가 거의 불가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노비에게서 받는 신공(身貢)도 점차 줄어들어 노비제 자체가 의미가 없자, 1801년 궁노비 36,974명, 각사 노비 29,093명 등 합계 66,067명을 해방시켜 양인으로 만들었다.


■ 향회(鄕會)와 촌계(村契)


향회는 보래 유향과 같은 지배층들이 참여하여 결속을 다지고 유교 윤리에 의해 계서화된 중세적 질서를 보다 안정적으로 유지할 목적으로 운영되었다. 이 경우 향회는 비록 자치적으로 운영되었다고는 하나, 교화를 통하여 민과 향촌 사회를 유교 이념하에 통제하고 이를 전제로 수령이나 이서들의 횡포를 견제하려는 것이었다. 이 때 유향, 즉 향회의 구성원 명단을 향안(鄕案)이라고 하였다.

 

향회는 조선 사회의 성장과 정치적 영역의 확대, 그리고 피지배층의 성장에 따라 그 기능과 성격이 다양해졌다.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종래 교화 위주의 향촌 자치 체계에 변화가 요구되었으며 나아가 오로지 양반 중심이었던 구성원에도 변화가 야기되었다.

 

향회에 담세자인 일반 농민을 대표하는 향임들이 참가하여 조세의 합리적인 배분과 징수, 면리 내의 복잡한 부역 징수 기구의 총괄 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일부 구성원의 변화가 있다하더라도 향회의 성격이 질적으로 일시에 달라질 수는 없었다.

 

아직까지 기존의 향회를 이끌어 간 것은 신분적으로 대부분 양반에 속하는 지배층이었고, 계급적 속성상 일반 농민의 이해보다는 관의 입장 내지 지주․부민의 이해를 대변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므로 이 경우의 향회는 봉건 권력의 조세 수탈을 정당화하고 공론을 빙자하여 농민들의 불만을 호도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농민들은 관(양반) 주도의 향회가 더 이상 자신들의 의사를 대변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의 모임을 만들었다.

 

상주․익산․진주 등 많은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촌계(村契)․ 민회(民會)․이회(里會)․도회(都會)라 불렸던 민 주도의 향회를 개최하였다.


■ 향전(鄕戰)의 전개


사족의 향촌 지배를 해체시키는 데 결정적인 동기를 만든 것은 신․구 세력 간의 갈등, 곧 향전(鄕戰)을 통한 향촌 사회 내부의 갈등이었다. 향전은 사족과 사족 간에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사족 지배 체제의 이완에 크게 작용한 것은 역시 기존의 향권을 장악하고 있던 사족에 대한 새로운 성장 계층(신향 세력)의 도전에 의해 야기된 것이었다.

 

이른바 신향(新鄕) 세력은 기존의 사족 지배 체제에서 소외되었던 양반층이나 서얼, 그리고 사회 경제적적인 발전을 기초로 성장한 요효부민층, 중인등이 포함된 새로운 세력이었다. 향전의 내용과 양상은 각 향촌 사회의 구조적인 특징을 반영하고 있어 지역적으로 매우 다양한 형태였다.

 

그렇지만 이들 향전의 궁극적인 목표는 새로이 성장한 세력들이 기존의 사족 지배 체제속에 참여하여 자신들의 이해를 관철하려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그들은 관주도 향촌 지배와 운영 기구였던 향청(鄕廳)․향회(鄕會)․작청(作廳)․장청(將廳) 등이 지배권, 즉 향권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향전은 봉건적인 체제 내의 대립이었고 현실적인 힘의 우위를 장악한 신향 세력을 지원, 묵인하는 수령의 입장에 따라 점차 신향 세력에게 유리한 국면으로 발전되어 갔다.


■ 부농층의 향권 장악


조선 후기에 상공업과 화폐 경제가 발달하고, 농업 경영 방법이 크게 개선되면서 일부 농민들은 농지를 확대하고, 영농 방법을 개선하며, 상품 작물을 재배하며 부를 축적해 갔다. 부를 축적한 경영형 부농층은 그 재력을 바탕으로 하여 공명첩을 사거나 족보를 사서 양반의 신분을 얻어 갔다.


그들은 더 나아가 향안(鄕案)에 들고, 향직을 얻음으로써 향권(鄕權)을 쥐고 농민을 다스리는 실권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이 같은 움직임을 주목한 일반 실학자들은, 이들에게 정치 참여의 길을 열어 주고자 권농관(勸農官)을 설치, 역전과(力田科)의 설치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심화된 봉건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대책의 하나였던 것이다.


■ 공동납제의 강화


조선 후기 부세 체계의 두드러진 특징으로는 부세가 토지를 중심으로 집중 일원화되는 추이와 총액제, 즉 공동납제(共同納制)를 채택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7세기 이후 부분적인 시행을 거쳐 18세기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실시된 대동법과 18세기 중엽의 균역법, 그리고 전세에서의 비총제(比總制)와 균역에서의 군총제(軍總制, 里定制), 환곡에서의 이환제(里還制) 등이 그 구체적인 내용이다.

 

각종 부세의 조지 집중 현상은 바로 중세적인 부세 체계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과 동시에, 그것을 유지시켰던 중세 지배 체제가 해체되어 가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이 같은 조치들은 어쩔 수 없는 한계 상황 속에서 최소한의 재정 수입을 보장받기 위한 방책이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는 당시 생산력의 발전과 상품 경제의 발달이 가속화되고 이에 따라 부세의 금납화가 가능했던 토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 도결(都結)의 실시


도결은 모든 조세가 금납화(金納化)되고 토지로 집중되면서 전세와 대동세 외의 각종 결역분(結役分)을 따로 거두지 않고 한꺼번에 결수로 묶어서 관에서 직접 거두어들이는 조세 수납 체제를 일컫는다. 이 과정에서 지방 관청은 빈농의 담세 능력상실에 따른 조세의 부족분을 손쉽게 토지에 전가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관으로서는 매우 편리한 조세 수취 방식이었다.


도결의 운영 과정에서는 다음과 같은 폐단과 계급 간의 상충된 이해 관계가 발생했다. 우선 지방수령과 이서들은 읍권 장악과 사경제 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재지 토호층과 돈독히 결탁한 다음, 부족한 조세분과 관청 재정 명목으로 끊임없이 결가를 높이고 있었다.

 

이 때, 향회(鄕會)의 추인을 내세워 공론을 빙자한 관의 자의적인 수탈이 행해졌 던 것이다. 일반 농민의 경우 자신들이 주로 담당했던 군역․환곡․자역의 부담이 전결세 부담자 일반에게 골고루 배분된다는 점에서 이점이 있었다.

 

이와는 반대로 향촌의 일부 양반들은 차별적인 중세 신분제의 원리로 인해 자신들이 누렸던 전결세의 차등 부과 혜택을 잃게 되었고 종전 자신들과 상관없던 군역세 및 환포(還逋)의 부담을 더불어 지게 되었다.

 

이 일로 인해 해당 양반들은 수령에게 불만을 제기하고 그 해결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도결 자체가 근본적으로 관의 자의적인 조세 부과에 대응하기 위한 응급적인 조치였고, 수령과 이서들이 부정이 늘어가는 한편, 민이 알지 못하는 상황하에서 도결에 포함되는 계정이 결정되어 결가가 계속 높아졌기 때문에 일반 농민도 그 피해를 크게 입게 되었다.


■ 재난과 질병의 실태


사회 불안 속에서 농민을 더욱 곤경에 빠지게 한 것은 홍수, 한발과 같은 자연 재해와 콜레라, 장티푸스, 천연두 등 전염병의 유행이었다. 홍수 피해 중 큰 것은 1729년 함경도에서 1천여 명이 사망했고, 1832년 전국적으로 8천여 호의 민가가 유실되었으며, 1845년 청천강 이북에서만 4천여 호가 유실되고, 500여 명이 사망하였다.


한편, 한발에 의한 피해는 1733년 40만여 명, 1729년 46만여 명, 1809년 840만여 명의 기민을 낳았다. 한편, 전염병으로 1699년 25만여 명, 1749년 50만여 명, 1829년 수십만 명이 사망하였다.


■ 화적(火賊)과 수적(水賊)


지배층의 무능과 비리에 직면한 민증들은 비밀결사적 저항을 시도하든가 도적이 되어 갔다. 대표적인 비밀 결사로는 검계(劍契), 살주계(殺主契)가 유명하였고, 일부 유민은 명화적(明火賊), 수적(水賊)으로 변신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각 지방에서는 단(團)이란 이름을 가지 비교적 규모가 큰 범죄 조직도 횡행하였다.


서울의 마포 일대에서 활동한 서강단(西江團), 평양 일대에서 활동한 폐사군단(廢四郡團), 유민으로 형성된 유단(流團), 광대, 재인 등이 형성한 채단(彩團) 등이 그것이다.


■ 이양선(異樣船)의 출몰


이양선이란, 우리나라 연해에 나타난 외국 선박으로, 모양이 종래 우리 나라의 배와 다르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이단선(異團船), 황당선(荒唐船)이라고도 하였다. 우리 나라 기록에 의하면, 1735년(영조 11) 황해도 초도에, 1780년(정조 4) 전라도 흑산도에, 1797년 (정조 21) 경상도 동래에 이양선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 후, 1832년 영국의 로드 암허스트 호가 비로서 공공연히 무역을 요구해 왔고, 1845년(현종 11)에는 사마찰 호가 연해를 측량하고 돌아갔다. 이를 전후하여, 헤아릴수 없는 이양선이 연해안에 나타났는데, 이 같은 움직임은 천주교의 유포와 더불어 불안해 하고 있던 당시의 민심을 더욱 불안하게 하였다.


■ 정감록(鄭鑑錄)의 유포


정감록은 조선 중기에 민간에 성행한 예언서이다. 조선 이후의 흥망 대세를 예언했는데, 이씨의 한양 다음에는 정씨의 계룡산이, 그 다음 조씨의 가야산이 흥성할 것이라 하였으며, 그 중간에 재난과 화변, 세태, 민심 등을 차례로 예언하고 있다. 이러한 예언서는 사회가 변동하고, 기조의 가치 질서가 무너지는 속에서 민심을 더욱 불안하게 하였다.


■ 미륵 신앙운동


불교 신앙의 한 형태로서, 먼 장래에 미륵불이 나타날 것이며, 그 때에 이 세상은 낙토(樂土)로 변할 것이고, 미륵불은 부처님이 미처 구제하지 못한 중생을 모두 구제해 준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미래에 대한 유토피아적 이상향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사회가 혼란하고 민심이 불안할 때 주로 세력을 폈다.


조선 후기의 현실은 흉년, 질병, 재해 등으로 절망적이었고, 그리하여 민중들은 불안과 초조와 고통으로 허덕이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민중들은 자연히 이상 사회의 도래를 약속하는 미륵 신앙에 쉽게 귀의하였다. 심지어(1688년 일부 무리들은) 살아 있는 미륵불을 자처하고, 광제 창생(廣濟蒼生)을 내세우며 민심을 현혹하기에 이르렀다.


■ 신유박해(辛酉迫害)


진보적 지식인들을 수용하여 새로운 권력 구조를 시도하였던 정조 때에는 천주교에 대하여 온건한 편이었다. 그러나 정조가 사망하자, 새로이 정권을 잡은 보수 세력은 정조가 불안해했던 정치 현상을 일신하고, 보수적 권력 구조를 강화하고자, 1801년 진보적 정치 세력과 그들과 연계된 천주교도에 대하여 대규모의 숙청을 단행하였다.

 

신유사옥(辛酉邪獄)이라고도 하는데, 이승훈, 이가환, 정약용 등의 천주교도가 처형 혹은 유배되었다. 천주교와 직접적 관계가 없었던 실학자 박지원, 박제가 등도 관직에서 쫓겨났다.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은 지 15년 만에 강행된 신유박해에서 500여 명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천주교가 급속히 전파된 결과이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신유박해가 종교적 탄압일 뿐 아니라 정치적 탄압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 후에도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대규모의 박해가 가해졌는데, 부패, 타락한 양반 지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단행된 박해에도 불구하고 천주교 교세는 하층민의 호응을 받아 가며 계속 확대되어 갔다.

■ 서학의 과학성과 종교성


서학이란 용어는, 16세기 이래 중국과 조선에 전래된 서양의 과학 기술과 사상 체계를 뜻한다. 당시, 동양에 전파된 서양의 과학 기술은 천문학, 지리학, 수학, 의학 등의 분야를 포괄하고 있었고, 사사의 측면에서는 스콜라 철학과 카톨릭 신학을 기초로 한 기독교 사상이었다. 서학은 중국에 와서 선교 활동을 하던 선교사들이 한문으로 번역한 서학서(西學書)에 의해 소개되었다.


서학의 과학성은 기술 관료들의 천문, 역산에 대한 효용성으로 주목을 받았고, 실제 만국 지도, 천리경, 자명종 등은 의식의 전환에 기여하였다. 한편, 정계에서 소외되어 있던 재야 지식인들은 학문적 호기심으로 서학의 종교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마침내 새로운 가치 체제에 동의하여 신앙 운동으로 이끌었는데, 그것이 전통적 가치 체계와 대립하면서 탄압을 받자, 동일한 범주 안에서 이해되던 서학의 과학성은 제약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1784년 이후에는 서학이라 하면 천주교 신앙만을 의미하게 되었다.


■ 동학의 혁명성과 민족적 성격


동학은 잔반 출신 최제우가 세도 정치하에 사회 추세를 통찰하고, 만연하는 천주교에 대항할 민족적 원리를 찾는 구도 활동(求道活動)을 편 끝에 창도한 종교이다. 동학에서는 인내천(人乃天) 사상과 현세 구복(現世求福) 사상, 그리고 후천 개벽(後天開闢) 사상을 논리 구조로 하고 있었다.


즉, 동학 사상의 내용은 봉건적 세계의 종결을 확인하며, 봉건적 질서와 서양 세계의 도전을 극복하는 것으로서, 새로운 세계의 등장을 주장하며, 그 새로운 세계는 천인합일(天人合一),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세계라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는 내세가 아니라 현세에 구체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즉, 동학은 봉건 사회 말기의 전환 시대를 이끈 사상으로서, 민족적, 민중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 동학의 교단 조직


동학의 교세가 급속도로 확장될 수 있었던 것은 교리 자체의 특성과 국내외적 위기 상황이 작용하였지만, 교단 조직에 힘입은 바도 컸다. 일찍이 최제우는 경주, 영덕, 영해, 울산 등지에 접(接)을 둔 바 있었는데, 최시형은 보다 조직을 강화하여 전국 각지에 교구인 포(包)제를 행하고, 각 포에 접주(接主)를 두어 통솔하게 하였다. 접주 중에서 세력이 있는 자를 대접주(大接主) 또는 도접주(都接主)라 하였다.


그리고 사무 처리를 위해 교장(校長), 교수(敎授), 도집(都執), 집강(執綱), 대정(大正), 중정(中正)의 6임(六任)제를 설정하였고, 총집회 기관으로 도접주에 속하는 도소(都所)를 두었다. 이와같이, 교단 조직이 유기적으로 질서 정연하여, 후에 교조 신원 운동과 동학 농민 운동에서 큰 힘을 발휘하였던 것이다.


■ 임술 농민 봉기(壬戌農民蜂起)


세도 정권의 부패와 비리에 항거한 농민의 불만은 1862년 전국적으로 폭발하였다. 그리하여 임술년(壬戌年)에 일어났다고 하여 임술민란이라 하는데, 진주에서 처음으로 폭발하였다고 하여 진주민란이라고도 한다. 한편, 민란이란 용어는 지배층의 입장에어 볼 때 백성들이 난동을 저질렀다는 뜻에서 쓴 것이라고 하여, 농민 운동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표현하여 임술 농민 봉기하고도 한다.

 

이른바 민란은 대체로 농토에서 쫓겨난 농촌 임노동자, 지주의 지대 수탈에 신음하던 영세 소작농, 높아지기만 하는 조세 부담 때문에 생활고에 허덕이던 영세 자작농 등이 합세하여 일으킨 농민 항쟁이었다. 주로 충청, 경상, 전라 등 삼남 지방에서 민란이 일어났는데, 멀리는 함경도 함흥, 제주도의 제주 등에서 많을 때에는 수만 명, 수천 명의 농민들이 참가하였다.


4. 문화의 새 기운


■ 삼강오륜(三綱五倫)


삼강 오륜은 인간 사회의 질서를 규제하는 유교의 기본적 가치 체계로서, 문벌 양반 중심의 봉건적 신분제를 고정화하고, 가부장적 사회 질서를 확립함에 기여하였다. 특히, 삼강은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이라 하여, 임금과 신하, 어버이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제시하였다.

 

오륜은 삼강에 나타난 덕목을 구체적으로 발휘함에 있어서의 실천 지침으로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을 말한다.


■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성립

 

영남학파는 지역적으로 영남지방, 즉 경상도 지방을 중심으로 형성된 성리학의 학파를 말한다. 주로 퇴계(退溪) 이황과 남명(南冥) 조식(曹植)의 문도로 구성되었다. 이황은 정치보다는 학문에 관심이 많아 조목(趙穆), 김성일(金誠一), 유성룡(柳成龍), 정구 등 많은 제자를 키웠다.

 

그 중에서 김성일, 유성룡, 정구 등은 다시 여러 제자를 두어 퇴계 학맥을 이었다. 김성일의 계통을 호파(虎派), 유성룡의 계열을 병파(屛派)라 하는데, 후에 정구의 제자 허목(許穆)이 기호에 자리잡으면서 이익, 안정복으로 학통을 수립하여 기파(畿派)를 형성하자, 이에 대립하여 호파와 병파를 아울러 영파(嶺派)라고 하였다.


한편, 남명 조식의 제자로는 오건(吳健), 정인홍(鄭仁弘), 곽재우(郭再祐) 등이 유명하였는데, 이황의 문도를 퇴계 학파라 함에 대하여 남명 학파라 하였다. 또는 지역적으로 낙동강 동쪽에 거주한 퇴계 학파를 강좌 학파(江左學派), 그 서쪽에 거주한 남명 학파를 강우 학파(江右學派)라고도 하였다.


■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성립


기호 학파란, 지역적으로 기호, 즉 경기, 충청도 지방을 중심으로 형성된 성리학의 학파를 말한다. 주로 율곡(栗谷) 이이와 우계(牛溪) 성혼의 문도로 구성되었다. 이이는 정치에 혁혁한 공을 남겼지만, 제자 양성에도 기울여 김장생(金長生), 조헌(趙憲), 정엽(鄭曄), 이귀(李貴) 등을 키워 냈다. 김장생은 다시 송시열, 권상하로 학통을 잇게 하여 조선 후기 학계, 정계에서 주류를 형성하였다. 이를 율곡 학파라 하였다.


한편, 성혼은 평생 벼슬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이와 가까이하면서 제자를 많이 키웠으니, 황신(黃愼), 윤황(尹煌), 이항복(李恒福) 등이 유명하였는데, 이들을 우계 학파라 하였다. 우계 학파는 윤선거(尹宣擧), 윤증(尹拯)으로 이어지면서 윤씨의 가학(家學)을 성립, 소론 계열로 분류되었다.

율곡 학파가 권력 기반을 바탕으로 정통 성리학의 명분을 교조화하자, 우계 학파에서는 양명학(陽明學)에 관심을 두기도 하였다.


■ 유기론(唯氣論)과 유리론(唯理論)


체제 이데올로기로서 봉건적 조선 사회의 운영에 기여한 성리학은 17세기 예송 논쟁을 거치면서 교조주의적으로 변질되는 모습을 보여, 일부 진보적 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이에, 18세기 성리학계에서는 성리학의 새로운 도약으로서 호락 논쟁(湖落論爭)이 전개되어, 탐구의 대상이 인간에서 자연에까지 확산되었으며, 마침내 유기론(唯氣論)과 유리론(唯理論)까지 제기하여 그 철학적 깊이를 더했다.

 

유기론은 우주 만물의 구성 요소로 기(氣)의 절대성을 내세운 기일원론(氣一元論)이며, 유리론은 이에 대하여 이(理)의 절대성을 내세운 이일원론(理一元論)이다. 유기론의 대표적 학자인 임성주(任聖周)에 의히면, 자연의 본질은 물리적인 기(氣)로서, 자연계의 형성과 운동 변화는 모두 기(氣)의 작용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성품 역시 기(氣)의 작용이며, 그것이 곧 기질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최한기(崔漢綺)는 유기론에 토대하여 독특한 운기화(運氣化)의 경험 철학을 내세웠는데, 그의 철학은 개화파 사상가들이 문명 개화를 주장함에 있어서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

 

한편, 유리론은 이(理)의 절대성을 내세운 이일원론으로서 기(氣)는 이(理) 앞에서만 활동하고, 이(理)를 떠날 수 없기 때문에 기(氣)의 독자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유리론의 대표적 학자는 기정진(奇正鎭)으로서, 이(理)의 입장에서 호락 논쟁을 종합해 보고자 하였는데, 이는 위정 척사 운동의 철학적 기반이 되었다.


■ 성리학의 교조성(敎條性)


봉건적 지배 질서 편성에 우선적으로 활용된 성리학은, 16세기 이래 사림 세력이 집권하여 정치의 주체 세력이 되면서 그들 중심의 봉건적 신문제의 확립에 기여하였다. 그런데 당시 역사의 전개는 체제의 변질을 불가피하게끔 기존 질서의 모순을 노출하고, 기층 사회에서는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성리학은 이 같은 역사적 상황에 신축성있게 대처하지 못하면서 그 한계와 문제가 지적되기에 이르렀다. 오히려, 정통 성리학자들은 그와 같은 비판을 체제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일체의 비판을 배타적으로 일축하고, 주자(朱子)―율곡(栗谷)―우암(尤庵)으로 이어지는 주기적(主氣的) 이기 일원론(理氣一元論)을 절대적으로 지키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성리학은 그 해석에 있어서 획일적, 폐쇄적인 성향을 보였고, 특정 이론만이 존재하는 교조성(敎條性)이 강화되어 갔다.


■ 유학의 반역자


정통 성리학이 보수화되고, 교조화 되면서, 유학에 대한 일체의 비판을 허용하지 않고, 비판 세력은 유학을 어지럽히는 무리하고 하여 사문난적(斯文亂賊), 즉 유학의 반역자라 하였다. 예컨데, 숙종 때의 윤휴, 박세당(朴世堂)등은 교조화된 주자의 학설에 이의를 제기하였다가 사문난적으로 몰렸고, 양명학, 서학, 동학 등도 사문난적으로 규정되어 철저히 배척되었다.


■ 지행 합일 사상(知行合一思想)


양명학의 기본 사상으로서, 알았다고 하여도 행하지 못하였다고 하면 그 알았음은 참앎이 아니니, 앎이 있다면 곧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知)와 행(行)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것이다. 성리학에서는 먼저 알고 이어서 행하여야 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이며, 알고서 행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면서 알고서 행하지 않는다면, 이는 앎이 아니라는 것이다.


■ 양명학의 수용과 강화 학파(江華學派)의 형성


양명학의 전래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16세기 말 이미 양명학의 저술인 전습록(傳習錄)이 전해졌고, 이황이 이에 대한 비판을 한 바 있었다. 성리학의 열기로 그 연구가 뚜렷하지 못하였으나, 성리학의 교조성에 반발한 일부 학자들은 이에 관심을 보였으니, 남언경(南彦經), 이요(李徭), 이항복(李恒福), 이정구(李廷龜), 신흠(申欽), 최명길(崔鳴吉), 장유(張維) 등이 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드러내 놓고 양명학을 논하지는 못하고 은밀히 전승하였는데, 그것은 양병학이 정통 성리학자들로부터 사문난적으로 규정되었기 때문이다. 양명학이 학문적 체계를 수립하고, 하나의 학파를 이룬 것은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의 소론출신 정제두(鄭劑斗)에 의해서였다.

 

그는 맹자의 이론을 바탕으로, 양명학적 심학관(心學觀)을 구체화하고 체계화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주자는 대립된 입장에서 심즉이설(心卽理說)을 제시하고, 일체의 학문이 양지(良知)를 파악하는 데 집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학설의 체계화와 아울러 후진의 양성에도 힘을 기울여 강화를 근거지로 하여 이광사(李匡師), 정순일(鄭盾一), 신위(申緯) 등 많은 제자를 두어 강화 학파를 형성하게 하였다. 이광사는 이영익, 이충익으로, 다시 이시원을 거쳐 19세기 말에는 이건창, 김택영, 박은식 등으로 그 학맥이 이어졌다. 그러나 양명학은 이론과 달리 그 실천성이 약했다.


■ 실사구사(實事求是)의 개념


사실에 토대하여 진리를 탐구한다는 뜻으로 한서(漢書)에서 인용되었다. 성리학과 양명학이 공리 공론(空理空論)과 독단 해석(獨斷解釋)에 치우쳐 유학 본래의 사명을 이탈하자, 그 반동으로 청나라 고증학파(考證學派)가 내세운 표어이다.

 

문헌학적 고증의 정확성을 존중하는 과학적 및 객관적 학문 태도를 말하는데, 그 대상은 주로 경학(經學), 사학(史學), 지리학(地理學), 금석학(金石學), 음운학(音韻學). 문자학(文字學) 등으로서 17, 8세기에 우리 나라에도 전해져서 실학파의 학자들이 학문의 태도로서 이를 표방하였다. 특히, 경전, 고서, 금석문에 대한 철저한 고증에 힘쓴 김정희(金正喜) 등의 국학 연구자들을 실사구시 학파라고도 한다.


■ 신분제 비판론


실학자들은 신분제를 부정하고 그에 입각한 통치 원리를 비판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당시 사회 신분의 구성이 변동하고 있는 현실에서 유래하는 것이었다. 17,18세기에 사회․경제상의 변동은 양반층, 농민층의 분해를 촉진시켜 신분의 이동과 혼란을 자아내었다.

 

몰락하는 양반이 속출함에 따라 이들은 신분은 양반이면서도 생계의 유지를 위해서는 농사를 직접 짓거나 아니면 타인의 토지를 빌려 소작하는 경제적으로는 일반 농민과 다를 바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농민들 가운데서는 몰락하는 농민이 절대적이었으나, 그런 속에서 경제적으로 부를 축적하여 상승하는 농민들도 있게 되었다. 부유한 농민들은 납속(納粟)․ 군공(軍功) 등을 통하여 합법적으로 신분을 상승하거나 아니면 족보의 위조, 호적의 위조 등의 방법을 통해서 상급 신분으로 진출하였다. 경제력에 의해 신분이 좌우되게 된 샘이었다.


실학자들의 신분관이 신분제의 부정과 그 논리를 같이하고 있음은 그러한 역사 전개의 추세를 긍정하고 이를 합리적으로 이론화시킨 데에서 진보성이 인정되는 것이다. 유형원은 신분제 유지의 초석인 노비제의 폐지를 조심스럽게 강조하고 이익도 그와 같은 사상을 가졌다.

 

노비는 양반 계급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므로, 양반제가 무의미한 속에서 노비도 존재의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실세한 양반들의 횡포와 사회 문제를 양반 제도에 대한 비판을 가하여 그들의 특권이나 체면유지의 비합리적인, 비인간적인 면을 매도하였다.


신분제에 대한 비판이나 부정은 그것을 토대로한 지배 예속 관계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왕과 양반에 의한 대민 텅치는 하늘의 도에 따른 것으로 설명되고 그에 의해 군사, 소인이 구별되어 전자가 후자를 다스린다는 논리로 무장된 통치 이론․신분 이론이 부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민의 구분이 단순히 직업의 차이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상이 나오고, 이런 분위기에서 통치자의 권력이 사실은 하늘이 내려 준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합의에 위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근대적인 주권 재민(主權在民)의 구상이 나오는 것이었다. 정약용이 제창한 권력론(權力論)의 핵심은 여기에 있었다.


■ 유형원의 균전론(均田論)


유형원은 양반 토호들의 토지 겸병 현상이 심해지고 농민이 농토에서 점차 유리되어 가자, 토지 국유를 전제로 국가가 완전한 소유권을 발동하여 모든 농민에게 균일하게 토지를 주자고 하였다.

 

즉, 농민 장정 1인당 1경(頃)의 토지를 분급한다는 것이니, 16경은 40두락 정도로 공부(公賦)를 내고 가계(家計)를 꾸리는 데 최소한의 면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신분제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어서, 사대부에게는 보다 특별한 대우를 해 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 이익의 한전론(限田論)


이익은 빈부의 차이가 날로 확대되는 속에서, 토지 국유의 원칙을 내세워 토지의 사유(私有)를 원칙적으로 배격하고, 토지에 대한 절대적 처분, 관리권은 어디까지나 국가에 귀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한 가호의 토지 면적을 제한하여, 제한된 영업전 외의 농토는 무제한 자유로이 매매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부농과 빈농, 대토지 소유자와 전호의 토지 보유가 점차 균형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점진적인 개혁안이었다.


■ 정약용의 여전론(閭田論)


정약용은 농가 30가호를 1여로 하고, 여장(閭長)의 지휘하에 공동 경작하고, 세납을 공제한 수확을 여민(閭民)들의 노동량에 따라 분배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사(士)이 경우, 농업 개선에 기여하는 경우에만 농민의 10배 정도의 토지를 주고, 그렇지 않으면 농․공․상 등 생업에 종사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여전제가 보급되면 전국 농민의 자산이 비슷해져서 토지 겸병이 일어나지 않으며, 노동량에 의해 그 보수가 책정되므로 근로의 습관도 양성된다고 보았다.


■ 성호학파(星湖學派)의 형성


실학자들은 그들의 사상적 경향에 따라 몇 개의 유파로 분류되는데, 제도 개혁에 관심이 크다고 하여 경세 치용 학파(經世致用學派), 부국 강병에 힘을 쏟았던 이용 후생 학파(利用厚生學派), 그리고 사실 확인에 노력하던 실사구시 학파(實事求是學派)등이 그것이다. 한편, 농업에 관심이 크다고 하여 중농 학파, 상공업에 관심이 크다고 하여 중상 학파라고도 한다.

 

또, 그들의 한문적 맥락에 따라서 성호 학파, 연암 학파로 구분하기도 한다. 성호 학파는 농촌 문제에 관심이 컸던 성호 이익의 후진들로 구성되는데, 역사의 안정복, 지리의 윤동규, 수학의 신후담, 경학의 이병휴 등이 직접문인이고, 그 밖에 이중환, 이벽, 권철신, 정약용 등도 그의 영향을 받았다.

 

이에 대하여, 연암 학파에는 연암 박지원(朴趾源)을 따르는 학자들로 구성되었는데,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등이 뜻을 같이하였다. 연암 학파는 이영 후생 학파 또는 북학파에 속하기도 하였다.


■ 북학파의 활동


청나라의 서울 북경(北京)을 내왕하면서 그 곳의 발달한 문물을 수용하고자 주장한 실학자들을 북학파라 하는데, 북학(北學)이란 북경을 중심으로 발달한 이용 후생의 실용적 학문을 뜻하며, 기술의 혁신, 생산과 유통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북학파들은 대부분 북학을 찬양하고, 그 실천에 힘썼다. 박제가의 북학의, 박지원의 열하일기, 홍대용의 담험집,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등은 대표적인 북한 서적이었다.


■ 상업 진흥론


실학자들은 상공업의 진흥론도 제기하고 있었다. 본래 상공업은 말업이라 하여 중세 사회에서는 동서를 막론하고 천시되었으나, 조선 후기에 와서는 그러한 중세 경제 체제가 변동하는 속에서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고, 이러한 변화에 수반하여 토지 없는 양반들의 숫자도 증가하고 있었다.

 

이들 지식층의 몰락은 놀고 지내는 사람의 양적 증거에서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사회 문제로까지 확대되면서 문제가 심각해졌다. 이에 토지 개혁론을 구상하고 있던 실학파들 가운데서는 유식인들 특히 그 중에서도 양반들의 전업을 주장하였고, 이와 아울러 상업을 일으키고 생산 도구나 유통 수단을 개발하고 나아가서는 수공업의 발전을 꾀하고 기술의 개발 내지 도입에 적극 노력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게 되었다.


영조 때의 학자인 유수원(柳壽垣)은 우서(迂書)에서 상업의 진흥, 화폐 유통책을 특별히 강조하고 이를 신분제와 관련시켜 사․농․공․상의 4민은 직업에 따른 구분이 되어야 할 것임을 주장하였다. 또, 상정의 개설, 우마차의 이용, 공업․수산업․과수업․목축업 등을 통한 증산, 소상인의 합자에 의한 자본 확대 방안도 거론하였다.

 

유수원은 특히 놀고먹는 양반을 비판하고 장사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지금 양반이 명분상으로 상공업에 종사하는 것을 부꾸러워 하지만 그들의 비루한 행동은 상공업자보다 심한 자가 많다.

 

학문이 없어도 세력만 있으면 부정하게 과거에 합격하고, 그렇지 않으면 음직을 바라거나 혹은 공물의 방납과 고리대를 하거나 노비를 빼앗기 위한 소송이나 벌임으로써 생활을 영위하거나 또 그렇지 않으면 억지로 수령자리를 얻어 토색질을 하고 전지와 노비를 많이 가짐으로써만 가계를 이룰 수 있으니 이것이 모두 비리가 아닐 수 없다. …… 상공업은 말업이라 하지만 본래 부정하거나 비루한 일은 아니다.

 

상인 스스로 재간 없고 덕망 없음을 알고서 관직에 나가지 않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물품의 교역에 종사하며, 남에게서 얻지 않고 자기의 힘으로 먹고사는데 그것이 어찌 천하거나 더러운 일이겠는가? ”


▨ 유교적 이상 국가론(理想國家論)


유교 사회의 기본 경제 사상은 중농주의(重農主義)와 균산주의(均産主義)로서, 이를 맹자는 농자지 천하지 대본(農者之天下之大本)이라고 표현하였다. 즉, 봉건 국가의 집권을 강화하고, 그 기반을 굳히기 위해서는 토지에의 농민의 긴박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유교 사회에서는 농촌 사회의 안정을 위해 농민 보호책을 강구하는 동시에, 여타의 산업은 적당히 규제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유교사회에서는 농민이 열심히 일하면서 태평 성가를 부르는 경우를 가장 안정되고 이상적이 사회라고 여겼다.


■ 국학(國學)의 형성


국학이란, 한국학(韓國學)을 뜻한다. 이 같은 개념이 사용된 것은 한국적인 것이 말살되어 갈 때, 한국적인 것을 새삼 찾아서 살려 나가고자 한데서 비롯되었다. 20세기 초에 나라를 앓은 때 처음으로 나타났다. 당시는 조선학(朝鮮學)이라 하였다. 한국의 역사, 언어, 지리, 풍토, 정치, 사회, 경제 등을 연구의 대상으로 하였다.

 

국학의 형성은 조선 후기에 두드러졌는데, 당시 모화적인 중국 의존에서 탈피하여 자주적 움직임을 펴고자 한데서 형성되었다. 한족(韓族)의 중국이 그 영향력을 강력히 행사할 때에는 국학의 움직임은 대체로 둔화되나, 조선 후기에 정치적으로 한족에 대해 만주족이 중국을 지배하였고, 사상적으로 성리학이 비판을 받으면서 모화 사상을 뒷받침해 주지 못하면서 국학은 위세를 부였다.


■ 고증 사학(考證史學)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객관적, 실증적 입장에서 역사를 연구하는 방법으로서, 종래의 허구와 오류에 싸여 있던 한국사의 이해를 실증적으로 규명하고자 조선 후기에 발달하였다. 안정복의 동사강목, 한치윤의 해동역사,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등은 대표적인 고증 사학의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증빙되지 아니한 것은 믿을수 없다고 하여 실사구시(實事求是)에 토대하여 내외의 여러 문헌을 섭렵, 귀납적인 역사 서술을 시도하였다. 연려실기술에서는 야사, 일기, 문집 등 400여 종의 문헌을 인용하여 증거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 위항인의 문학 활동


위항이란, 조선 시대에 있어서 중인(中人), 서얼(庶孼), 서리(胥吏) 등의 중서(中庶) 신분층을 통칭한다. 조선 후기 사회 변동의 움직임과 더불어, 이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이들은 의식의 확대와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의식에서 중서층의 유래를 밝히고, 자신들의 사적을 기록하면서 문학 활동을 적극적으로 펴 나갔다.


특히, 정조가 규장각이나 숭문원에 이들을 중용하면서 그 재능을 발휘하였고, 영․정조의 문화 진흥 정책은 위항인들에게까지도 문인의 배출을 촉진하였던 것이다. 외국과의 교류 속에서 역관들의 문학 활동도 돋보였다.

 

대표적인 위항 문학 작품으로는 홍태세의 해동유주, 소대풍요가 유명하다. 이들 위항인들은 동호인 모임을 가지기도 하였으니, 천수경, 조수삼 등은 ‘松石園詩社’를 결성하기도 하였다.

■ 사설시조의 발달


사설시조란, 시조 유형의 하나로서, 평시조, 엇시조와는 달리 그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초장, 중장, 종장이 무제한으로 긴 시조이다. 특히, 중장이 길어서 대화체나 이야기체로 된것도 있다. 시조는 본래 단가(短歌)의 현실을 띠고 있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장가 형식으로 바뀌고 있었다. 뿐만 아나라, 그 내용도 사실적 기법으로 중서층이나 평민들의 소박한 감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

■ 판소리의 의미


조선 후기 서민 문학 중 변화한 현실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거기서 삶의 지표를 나름대로 형성하고자 한 가장 두드러진 예가 판소리이다. 판소리의 형성 시기는 대체로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로 잡을 수 있다.

 

판소리 광대는 고기잡이철이면 어촌으로, 추수기면 농촌으로 돌며, 구전 설화나 사실들을 토대로 하여 자신들이 직접 사서화한 판소리 사설을 창과 아니리, 발림 등을 통하여 연희했다.

 

이 때, 판소리 광대는 그들 계층의 현실의식뿐만 아니라 중심 관객이었던 서민 계급들의 현실적 문제 의식을 수용하여 사건을 이끌어 가고 인물들을 형상화함으로써 판소리의 현실 수용의 폭을 넓혔다.


예컨데 ‘흥부전’은 흥부와 놀부의 대조적 성격과 처지를 드러내었다가 마침내 화해하게 함으로써 현제간의 우애를 주제로 정립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 당대 현실이 뚜렷하게 묘사되어 있어 소설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 준다.

 

먼저 온갖 품팔이를 하다가 마침내 매품까지 팔게 되는 흥부의 형상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무토(無土) 농민들의 비참한 현실을 보여 준다. 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버는 놀부의 형상을 통하여 돈에 눈뜨기 시작한 당대 사회와 그 속의 이해 타산적인 인간 군상들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흥부전’은 이러한 현실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결국 인간 사이에는 차마 저버릴 수 없는 윤리인 형제간의 우애와 사랑이 있고 또 있어야 함을 역설했다. 다시 말해, 윤리를 강경하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서민들의 구체적 일상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보여 준 것이다.

■ 진경 산수화


실경 산수화라고도 하는데, 산수의 모습을 실제의 경치 그대로 그린 산수화를 말한다. 종래의 산수화는, 작가에 의해 주관적으로 추상화되고 이념화되었는데, 조선 후기에 자의식이 성장하면서 한국 고유의 산수를 개성 있게 묘사하기 시작하였다.

 

진경 산수화를 개척한 사람은 18세기 초의 정선이었다. 그는 각지를 직접 답사하면서 한국의 산이 주로 중량감 있는 바위산임을 알고, 이를 사실적으로 그려 냈다.

■ 민화의 성격


조선 후기에 민간에서 널리 유행한 그림으로, 정통 회화의 조류를 모방하여 생활 공간의 장식 및 민속적인 관습에 따라 제작되었다. 속화(俗畵)하고도 하는데, 여염집의 병풍, 족자 또는 벽에 붙여졌다. 대부분이 그림 공부를 제대로 받지 못한 떠돌이 화가들에 의해 그려졌다. 창의성보다는 되풀이하여 그려짐으로써 형식화한 유형에 따라 인습적으로 계승되었다.


민화는 조선 후기 민중 의식의 성장과 더불어 경제적 부를 축적한 새로운 계층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가운데서 널리 보급되었는데, 민중 사회의 자유 분방한 형식미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말하자면, 민화는 조선 후기 사회 변동과 더불어 의식이 성장한 민중 스스로의 건강한 생활 공간을 창출하려는 자주적 문화 정신의 결실이다.

 

민요, 민담, 탈놀이, 장승 등과 같이 민중의 생활 감정이 민화에도 강렬하게 나타나고 있다. 민화의 매력은 건강하고 솔직한 삶의 전서와 자유 분방한 아름다움을 전해 줌에 있는데, 그것은 민중들이 독자적으로 문화를 생산하고 향유하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 대동여지도


대동여지도는 청구도, 대동지지와 더불어 김정호가 펴낸 지리학의 3대 역작이다. 특히, 대동여지도는 앞서 제작한 청구도의 자료가 부정확한 점을 발견하고, 이를 바로잡기 위하여 27년 동안 현지 조사를 철저히 하여 1861년 매우 정확하고 과학적인 지도로서 제작된 것이었다.

 

우리 나라 전역을 위도선에 따라 22개의 부분으로 나누어 16만 분의 1축척으로 그렸는데, 지도에 제시된 기초 체계를 정리하고, 실측에 토대하여 정밀히 제작하여 지도의 내용 구성과 묘사 수법, 도면 편성에 있어서 당시로는 가장 높은 수준의 지도였다.

 

대동여지도의 정밀성은 오늘의 지도와 비교하여 볼 때,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한편, 대동여지도는 당시 유통 경제의 발전에 부응하여 정확하고 풍부한 공간 지식을 제공하고 있으니, 상인들이 실제 이용하기에도 적합하였다.


즉, 대동여지도는 과학성, 정밀성, 실용성에 있어서 그 차이가 높이 인정되는 근대적 지도였다. 그리고 지도를 판목에 새겼기 때문에 많은 부수를 인쇄할 수도 있었다.

■ 실학자(實學者)들의 기술관


실학은 실증(實證), 실용(實用), 실리(實利)의 현실 기여 의식을 담은 학문이었으므로, 실학자들은 기술을 천시하던 전통적 성리학자들과는 다른 기술관을 가졌다. 특히, 북학론자들은 선진적 기술이 인간 생활에 큰 도움을 주고 있음을 청나라 북경에 가서 직접 보았고, 그 결과 이를 취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비록, 오랑캐의 것이라도 이것이 나라와 민족에 도움이 된다면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여 개방 의식을 보여 주었다.


■ 제국주의 시대


15세기 이래로 전개되었던 식민지 쟁탈경쟁은 18세기 말 이후에 그 양상을 달리하게 되었다. 즉, 프랑스 혁명과 산업 혁명을 거치면서 각국은 국내의 정치 사회 문제 해결에 몰두하게 되어 식민지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중엽 이후 산업 혁명의 진전에 따른 자본주의의 발달에 따라 새로운 식민지의 필요성이 증대하게 되었다.
즉, 과거에는 본국의 공업 생산에 필요한 원료의 확보와 상품의 시장 또는 이민 대상지로서의 식민지가 개척되었으나, 자본주의의 발달이 독점 자본주의 또는 금융 자본주의 단계에 이르게 되면서 잉여 자본을 투자할 수 있는 자본 시장으로서의 식민지의 필요성이 증대되었다.


특히, 1870년대 말 독일이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적극적으로 식민지 쟁탈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이전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인 영국과 프랑스와의 경쟁이 격렬해졌으며, 이로 인해 유럽을 중심으로 한 강대국 간의 식민지 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어 갔다.

 

19세기 말의 식민지 경쟁은 자본주의 발달이라는 경제적 요인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으나, 국가의 대외적 위신과 관련되어 각국은 식민지 확보를 가장 중요한 우선 정책으로 추진하였으며, 그 대상 지역도 전세계의 후진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각국의 후진 지역에 대한 식민지 확보 정책과 이와 관련되어 경쟁 국가에 대항하는 정책을 세계 정책이라고 하고, 이러한 세계 정책을 추진하는 자본주의 국가를 제국주의 국가라고 하며, 이러한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1870년대 말부터를 제국주의 시대라고 한다.


이들 제국주의 국가들의 후진 지역에 대한 식민지 진출은 경제적 종속과 함께 정치적인 복속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후진 지역의 전통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으며 많은 변화를 야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는 각국이 근대화 운동과 함께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치열한 경쟁으로 국제적 긴장 상태가 조성되고, 이는 무력 충돌로 확대되어 제 1차 세계 대전으로 나타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들 제국주의 국가들의 발전은 19세기 말 과학의 발달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할 수 있다.

 

출초 : http://kr.blog.yahoo.com/bchs9027/1260.ht

'■ 역사 > 대한제국. 근대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  (0) 2014.08.16
대한제국 13년  (0) 2014.04.06
을사늑약서서  (0) 2013.04.05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0) 2013.02.26
"조선민족운동 연감”/도서  (0) 2011.0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