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대한제국. 근대사

[김갑수 근·현대사]③ 도대체 미국은 무슨 짓을 했나

야촌(1) 2014. 9. 17. 21:01

[김갑수 근·현대사] ③도대체 미국은 무슨 짓을 했나

 

진실의 길

 

도대체 미국은 무슨 짓을 했나

조선은 ‘망한 것’이 아니라 ‘당한 것’이다

 

일본이 조선을 강탈하는 데 미국의 역할은 어느 정도였을까? 이제까지는 묵인, 방조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우리는 카스라-태프트 밀약을 알고 있다. 여기서 카스라는 1905년 당시 일본의 수상이고 태프트는 미국 육군 장관이었으며 3년 후 미국 27대 대통령이 되는 인물이다.

 

최근 들어 일본이 조선을 강탈하는 데 묵인, 방조한 정도가 아니라 적극 주선, 추동했다는 주장들이 여기저기서 제기되고 있다. 일본의 조선 독식이 결정된 것은 러일전쟁이었는데, 바로 이 러일전쟁에 천문학적인 전비를 지원한 것이 미국이었다.

 

두 권의 책을 권한다. 하나는 『임페리얼 크루즈』이고 다른 하나는 『외세에 의한 한국 독립의 파괴, The Foreign Destruction of Korean Independence』인데, 둘 다 미국인에 의해 저술된 책이다. 이 두 권의 저작물은 미국은 일본을 고무, 사주하여 조선을 독식하도록 했으며 이런 공작이 최소한 1901년부터 시작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참고로 <임페리얼…>은 증언적 성격이 강한 반면 <외세에 의한…>은 논증적 성격이 강한 책이다. 역사에서는 증언과 논증이 일치할 때 정설로 인정하는 관례가 있다. 이만 하면 미국이 사주한 일본의 조선 침략 책동은 정설화될 수 있는 조건을 충분히 갖춘 셈이다.

 

당시의 미국 대통령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그는 철저한 백인우월주의자로서 태평양 정벌을 미국인의 소명으로 여겼던, 이중적이고 기만적인 인격을 가진 정치인이었다. 게다가 일본의 조선 독식을 조장한 것은 미국만이 아니었다.

 

영국은 영일동맹으로 러시아를 견제해 주었고 프랑스 역시 일본에 조선 독식을 허용하는 밀약을 체결했던 것이다. 아무튼 이 두 책 등으로 인해 미국에서 수위권으로 존경받던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명성에 균열이 나기 시작한 것은 그나마 반가운 일이다.

 

한편 조선에 군침을 흘리던 러시아가 미국을 위시한 영, 프 3대강국의 위세에 눌린 데다 복잡한 국내 사정까지 겹친 상태에서 미국과 야합하여 일본에 지는 척해 주었던 전쟁이 바로 러일전쟁이었다. 요컨대 조선은 일본과, 일본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미·영·프·러’라는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무력을 견디지 못하고 패망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서구 제국주의국가들은 일본을 지원한 것이었을까? 중국 대륙을 정복하고 싶어 했던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은 중국과 일본의 연합전선을 미연에 방지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부화뇌동하여 아시아에 배신을 때린 것이 일본이었고 그것이 최초로 결실된 역사적 사건이 메이지유신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망하지 않을 나라가 어디 있을까? 이렇게 볼 때 조선은 ‘망한 것’이 아니라 ‘당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조선은 속아 넘어간 나머지 일본을 제외한 서구열강의 침략 저의를 알지 못했으며, 특히 개화 지식인들의 경우 무턱대고 서구를 동경, 선망하는 어리석음까지 노출했기 때문이다.

 

열강도 열강이지만 문제는 바로 ‘총’에 있었다. 동학군은 죽창과 화승총을 들었지만 일본군은 최신식 라이플 소총으로 무장된 군대였다. 수십만의 동학군과 의병을 섬멸한 것은 불과 4,000명의 일본군이 소지한 현대식 병기였다.

 

여기에 또 다른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고 본다. ‘아무리 일본군이 신식 병기를 가졌다고 해도 수십만의 병력과 1.000만의 인구가 있던 조선이 당한 것은 문제가 아니냐?’ 하지만 이것은 구식 무기에 대하여 ‘총’이 가지는 가공할 위력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역저 『총·균·쇠, Guns, Germs, and Steel』는 유럽이 타민족을 지배할 수 있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인지를 아주 실감나게 논증하고 있다. 그는 유럽과 아메리카 원주민의 관계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으로 1532년 11월 16일 잉카의 황제 이타우알파가 스페인의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에게 생포된 사건을 든다.

 

이 장면에서 수백만의 인구와 8만의 병력을 뒤로 한 잉카제국의 병사들은 불과 수백 명의 스페인 군에게 추풍낙엽처럼 도살되고 황제까지 생포되는 패전을 당하는데, 이 엄청난 수수께끼를 해명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총’이었다고 논증한다.

 

제국주의자 피사로는 이로부터 8개월 동안 이타우알파를 인질로 붙잡아 놓고 가로 6.7m 세로 5.2m 높이 2.4m가 넘는 방을 가득 채울 만큼의 황금을 몸값으로 받은 후 본국에서 지원병이 당도하자 약속을 저버리고 그를 죽여 버렸다.

 

나는 잉카제국이 못나서 망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잉카제국은 당한 것이었고 그들에게 총이 없었던 것은 엄청나게 복합적인 요인이 결부된 ‘우연’이었을 따름이다. 역사는 필연과 우연의 조합으로 이루어진다.

 

조선이 못나서 망했는가? 그렇다면 다음 논리에 승복해야 한다.

 

한 소녀가 있다. 소녀의 위치가 어디든 상관없다. 사내가 다가가 비수를 들이대며 치마를 내리라고 한다. 소녀는 거부한다. 그러자 사내는 가스총으로 소녀를 기절시킨다. 사내가 더러운 욕정을 채우는 동안 먼발치에서는 경찰들이 망을 봐주고 있었다.

 

이 소녀는 못나서 당한 것인가?

행실이 나빠서, 또는 옷차림이 야해서 당한 것인가?

아니면 소녀가 사내처럼 비수와 가스총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당한 것이라고 하겠는가? 이렇게 답할 사람은 조선이 못나서 망한 것이라고 말해도 무방하겠다. 단 그는 제국주의적 인격을 가졌거나 식민사관에 찌든 사람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