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 1744

진흥왕 순수비(眞興王巡狩碑)

↑북한산 진흥 순수비의 옛모습/사진(문화재청 자료) [그림 1]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진흥왕순수비는 신라 24대 진흥왕이 영토를 개척하고 그곳에 순행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를 말한다. 진흥왕순수비는 현재까지 4개가 알려졌다. 창녕,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 진흥왕순수비가 바로 그것이다. 창녕비는 561년(진흥왕 22)에 세운 비로 현재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에 있으며 국보 제33호이다. 1914년에 보통학교 교장으로 재임하고 있던 한 일본인의 신고로 세상에 알려졌다. 비는 화강암으로 높이 약 300~115.1cm, 폭 175.5cm, 두께 30.3~51.5cm이다. 비면은 자연석 그대로이고 글자를 새긴 면만 약간 다듬었다. 글자는 16행이며, 행당 26자 내외의 글을 새겼다. 서체..

광해군 묘 표석 음기(光海君墓表石陰記)

■ 광해군 묘 표석 음기(光海君墓表石陰記) [시대] 조선 [연대] 1641년(인조19년) [유형/재질] 비문 / 돌 [문화재지정] 사적 제363호(1991년 10월 25일) (55,742㎡) [소재지]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산59번지 [서체]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미상 ● 개관 이비는1641년에 남양주에 건립된 광해군 묘 표석 음기(光海君墓表石陰記)이다. 광해군의 휘는 혼(琿)으로 선조의 둘째 아들이다. 장자인 임해군(臨海君)이 광포하고 인망이 없어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1606년 계비(繼妃) 인목왕후(仁穆王后)에게 영창대군(永昌大君)이 출생하자, 선조는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고, 소북(小北)의유영경(柳永慶)도 적통론(嫡統論)을 내세워 선조를 지지 하였다. 그러나 선조..

조욱 선생 묘갈비(趙昱先生墓碣碑文)

■ 용문 조욱 선생 묘갈비(龍門 趙昱先生墓碣碑) [시대] 조선 [연대] 1745년(영조 21년) [유형/재질] 비문 / 돌 [문화재지정] 비지정 [크기] 높이 155cm, 너비 58cm, 두께 31cm [소재지]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덕촌리 [서체] 해서(楷書) [찬자/서자/전(篆)] 조익(趙翼) / 이건명(李健命) / 이징하(李徵夏) [개관] 이 비는 1745년(영조 21년) 경기도 양평에 건립된 조욱묘갈(趙昱墓碣)로 조익(趙翼)이 비문을 지었고, 이건명(李健命)이 글씨를 썼다. 조욱(趙昱 : 1498~1557년)의 본관은 평양(平壤)이고, 자는 경양(景陽)이며. 호(號)는 용문(龍門)이다. 조광조와 김식(金湜)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1516년(중종 11년) 생원,·진사 양시(兩試)에 합격하였고, 1..

신숭겸 묘(申崇謙 墓)

장절공 신숭겸 묘 장절공 신숭겸 신도비 ■ 장절공 신숭겸[(?~927(태조 10)) 고려 초기의 문신(文臣)으로, 초명은 능산(能山). 시호는 장절(壯節). 평산신씨(平山申氏)의 시조이다. 광해주(光海州 : 春川)에서 출생하고. 918년 태봉(泰封)의 기장(騎將)으로 배현경(裵玄慶)· 홍유(洪儒)· 복지겸 (卜智謙) 등과 협력하여, 궁예(弓裔)를 폐하고 왕건(王建)을 추대, 고려 개국의 대업을 이루었다. 927년(태조 10) 공산(公山)전투에서 태조가 견훤(甄萱)의 군대에게 포위되자 김락(金樂) 등과 함께 역전하여 이를 구출하고 전사했다. 1120년(예종 15) 예종은 그와 김락을 추도하여 《도이장가(悼二將歌)》라는 향가를 지었다. 삼중대광(三重大匡)에 태사(太師)로 추증되었으며, 태조의 묘정(廟廷)에 ..

참판 이양구(李養久)를 전송하다.- 金尙憲

■ 참판 이양구(李養久)가 안변(安邊)에 부임하는 것을 전송하다. ※이양구(李養久)는 벽오 이시발(碧梧 李時發)의 자(字)이다. 지은이 :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 내가 반자 되었을 때 공은 방백이었거니 / 我爲半刺公方伯 한해 가는 첫 들머리 원수대의 앞이었네 / 元帥臺前瀚海頭 군막 속서 걱정하매 계획 못나 창피했고 / 幕裏百憂慚婉畫 술동이 앞 한 웃음에 시의 물결 더해졌네 / 樽前一笑忝詩流 위험한 일 겪는 새에 양쪽 살쩍 희었는데 / 危途歷盡雙垂白 지나간 일 생각하니 벌써 십 년 지나갔네 / 往事追思十過秋 오늘 다시 관문 밖의 이별하게 되었으매 / 今日又成關外別 동쪽으로 철령 보니 다시금 또 유유하네 / 鐵門東望更悠悠 ----------------------------------------------..

포저 조익 선생 세계도(浦渚趙翼先生世界圖)

■ 포저 조익 선생 세계도(浦渚 趙翼先生 世界圖) 시조(始祖)는 맹(孟) : 조씨(趙氏)의 세계(世系)는 한양(漢陽)의 풍양현(豐壤縣)에서 비롯된다. 공은 고려(高麗) 태조(太祖)를 보좌하여 통합삼한 벽상 개국 공신(統合三韓壁上開國功臣)의 훈호(勳號)를 하 사받았으며, 관직은 삼중대광(三重大匡)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이르렀다. 묘소는 풍양현 적성동(赤城洞)에 있다. 광해(光海)가 성릉(成陵)을 추봉(追封)할 적에 분묘가 평평하게 되었다가 능호(陵號)가 취소되면서 원상 복구되었다. 외족(外族)의 후손인 장공 유(張公維)가 묘비(墓碑)의 글을 지었고, 선생이 음기(陰記)를 지었다. 1세(世) 신혁(臣赫) :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부사(密直副使)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 상호군(上護 軍) ..

포저 조익선생의 부인에 대한 제문.

■ 포저 조익 선생의 부인에 대한 제문 (浦渚 趙翼 先生의 夫人에 대한 祭文) 포저 조익 찬(浦渚 趙翼 撰) 아! 그대와 부부의 인연을 맺은 지 지금 어느덧 53년의 세월이 흘렀소!. 동년(童年)에 서로 만나 서로 아끼고 중히 여기면서 함께 백발이 되었는데, 지금 그대를 잃고 말았으니 나의 비통함이 어찌 끝이 있겠소!. 그대가 이제 영원히 모습을 감추고 이 세상을 떠나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것이 애통한 것은 물론이요, 나의 신세를 생각해 보아도 고독하게 외로운 그림자만 남아 의지할 곳이 없게 되었으니, 슬픈 생각을 그만둘 수가 없고 눈물을 금치 못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라고 할 것이오. 그대가 힘들게 낳아 기른 자식이 모두 여덟인데, 아이 때에 죽은 자식이 둘이고 장성해서 일찍 죽은 자식이 또 둘이었..

영의정 오윤겸 선생 행장[領議政 吳允謙 先生 行狀]

■ 영의정 오공 윤겸(允謙)의 행장[領議政吳公允謙의行狀] 백호 윤휴 찬[白湖 尹鑴 撰] 공의 휘(諱)는 윤겸(允謙)이요 자는 여익(汝益)이며 호는 추탄(楸灘)인데 혹은 토당(土塘)이라고도 한다. 세계(世系)는 해주오씨(海州吳氏)에서 나왔다. 상세(上世)의 인유(仁裕)라는 분이 고려 때의 군기감(軍器監)으로서 시조가 되었다. 그 후 몇 대에 걸쳐 관작이 이어져오다가 계선(繼善)이라는 분이 북평관 제검(北評館提檢)을 지냈는데 이분이 바로 공에게 고조가 된다. 증조 휘 옥정(玉貞)은 사섬시 주부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조 휘 경민(景閔)은 사헌부 감찰로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고 휘 희문(希文)은 선공감역으로 의정에 추증되었으니, 삼대(三代)가 추은(推恩)받은 것은 모두 공이 귀하게 된 때문이었다...

미수 허목 신도비명 병서(眉叟 許穆 神道碑銘 幷序)

■ 미수 허목 신도비명 병서 (眉叟 許穆 神道碑銘 幷序) 성호 이익 찬(星湖 李瀷 撰) 대개 듣건대, 우리 국조(國朝)의 현명한 공경(公卿)을 논평할 적에, 외방(外方)에 나가 맡는 일이나 조정에 들어와 세우는 계책에 대해 선왕(先王)들의 것이 아니면 진달하지 않기도 오직 허 선생이 그랬고, 권세에 아부하지 않고 올바름을 지켜 흔들리지 않기도 오직 허 선생이 그랬고, 가당함을 보고서 나아가고 기미를 알아차리고선 곧 물러 나와 시종[本末]이 법도가 있게 하기도 오직 허 선생이 그랬다 하니, 선생은 곧 쇠퇴한 세상에 이름을 온전히 한 분이다. 그때 익(瀷)의 선 대부(先大夫)께서 함께 벼슬하게 되어 정신을 모아 협력하였는데, 청의(淸議 올바른 의논)를 주장하여 도(道)는 비록 굴했어도 선비들의 마음은 더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