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 1744

추탄 오윤겸 묘지명(楸灘 吳允謙 墓誌銘)

■ 영의정 충정 오공 묘지명 (領議政 忠貞 吳公 墓誌銘) 戊子年(1708, 숙종 34) 약천 남구만 찬(藥泉 南九萬 撰) 우리 인조대왕이 중흥하시던 때는 실로 내가 귀로 듣고 눈으로 본 세대이니, 그 당시 의정부에 있던 제공(諸公)들을 하나하나 헤아려 보면 혼조(昏朝)에서 절개를 세운 분은 윤 해창(尹海昌)이고 국가에 큰 공을 세운 분은김 승평(金昇平)이며, 유학자의 오랜 명망이 있는 분은 신상촌(申象村) 신흠(申欽))이고 문장으로 나라를 빛낸 분은 이월사(李月沙) 이정귀(李廷龜)이다. 그리고 우리 추탄 선생(楸灘先生) 오공(吳公)으로 말하면, 한 가지 일을 가지고 이름할 수 없고, 한 가지 재능을 가지고 칭찬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덕행(德行)의 과목(科目)으로 돌리는 것이다. 안에 쌓인 것은 온화하여..

묘비(墓碑)의 비제(碑題)에 관한 질문?

■ 질문내용. 설 잘 지내셨는지요? 경인년 새해 늘 행운이 가득 하시길 기원해 봅니다. 다름 아니옵고 아래 사진에서 보는바와 같이 묘비의 비제(碑題)를 보면 매죽헌 선생의 묘비에는 고위(考位) 가 우측에 배위(配位)가 좌측이고, 추탄 오윤겸(楸灘 吳允謙)선생의 비제(碑題)는 고위(考位)가 좌측, 배위가 우측인데, 어떻게 다른것인지요? 종친 제현분들의 답변 부탁 드립니다. ↑매죽헌 이완장군 묘비(梅竹軒 李完將軍 墓碑) ↑추탄 오윤겸선생 묘갈(楸灘 吳允謙先生 墓碣)

취금헌 박팽년 묘(醉琴軒 朴彭年 墓)

↑취금헌 박팽년 묘(醉琴軒 朴彭年 墓) ●박팽년(朴彭年) 본관 순천, 자 인수(仁叟),호 취금헌(醉琴軒), 시호 충정(忠正),형조판서중림(中林)의 아들이다.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 성삼문(成三問)과 함께집현전(集賢殿) 학사로서 여러 가지편찬사업에 종사하여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38년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1447년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고, 1453년(단종 1) 우승지를 거쳐 1454년 형조참판이 되었다. 1455년(세조1) 세조가 즉위하자 충청도관찰사로 나갔으나 조정에 보내는 공문에 신(臣)이라고 칭한 일이 없었다. 이듬해 형조참판으로 있으면서 성삼문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김질(金礩) 등과 함께 ..

경주이씨 유례

■ 경주이씨 유례 ● 본관 연혁 경주(慶州)는 경상북도 남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기원전 57년에 6촌(六村)이 연합하여 고대국가를 형성, 국호를 서라벌(徐羅伐)· 사로(斯盧)· 사라(斯羅)로 하고, 수도를 금성(金城)이라 하였다. 65년(신라 제4대 탈해왕 9) 시림(始林)에서 김씨 시조가 탄생하여 국호를 계림(鷄林)으로 칭하기도 하였으나, 별칭으로 사용하였다. 307년(기림왕 10)에 최초로 국호를 신라(新羅)로 하였다. 935년(고려 태조 18) 신라 마지막 임금인 56대 경순왕[敬順王=김부(金傳)]이 왕건에 항복하자 경주로 개칭하고 식읍을 주었고, 그를 사심관(事審官=고려시대 중앙의 고위 관료들에게 자기 출신 지방을 다스리도록 주었던 특수관직)으로 삼았다. 비로소 처음으로 경주(慶州)라는 명칭이 생..

보학 용어해설(譜學用語解設)

작성일 : 2010. 02. 08 ■ 보학 용어 해설(譜學用語解設) 1.시조(始祖)와 비조(鼻祖) 시조(시조)는 맨 처음 윗대의 조상으로서 제 1세(世) 선조를 일컫는다. 비조(鼻祖)는 시조 이전의 선계(先系)조상 중 가장 높은 사람을 일컫는 말인데 시조 이전의 선계가 없을 경우에 한하여 시조를 정중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비조라고 말하는 수도 있다. 2.중시조(中始祖) 중시조(中始祖)란 시조 이하의 쇠퇴하였던 가문을 다시 중흥시킨 조상을 온 종중의 공론(公論)에 따라 정하고 중 시조로 추존(追尊)하는 것이며 지파(支派) 단독의 주장으로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3.본관(本貫)과 관적(貫籍) 본관(本貫)은 향관(鄕貫), 관향(貫鄕), 향적(鄕籍), 관적(貫籍), 적관(籍貫), 족본(族本)이라고도 한다고 경국대..

허통(許通)에 대하여---

■ 허통(許通)에 대하여..... 허통(許通)이란? 조선시대 서얼(庶孼)들에게 금고법(禁錮法)을 풀어 과거에 응시하도록 허락한 제도를 말한다. 서얼은 응시하되「허통(許通)」으로 녹명(錄名 : 이름을 기록함)하게 하기 도 했다. 조선 전기에는 양반의 자손이라도 첩의 소생은 관직에 나갈 수 없게 하였다. 서얼은 법에 의해 사회적 차별 대우가 규정되고 또 그 차별 대우가 자손에게 세습되었다. 1543년(중종 38)에 편찬된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 에는 잡과에 한해, 2품 이상 관원의 첩의 증 현손(曾玄孫)의 응시가 허용되었다. 문무과 및 사마시는 1553년(명종 8) 양첩자(良妾子)의 손대(孫代) 부터 허용되었으나 바로 폐지되었다. 그 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얼 허통 책은 확대 실..

제사(祭祀)의 지방(紙榜)쓰기

■ 제사(祭祀)의 지방(紙榜)쓰기 1. 명절의 설. 추석날 제사 지방과 돌아가신날 지내는 기제사의 지방 서식은 같습니다. 2. 지방을 붙일 때는 좌상우하(左上右下)라, 하여 제주가 바라볼 때 제주의 좌측이 윗대조상 오른쪽이 아랫대조상 이며, 남 좌 여우(男左女右)라 하여 제주가 바라 볼 때 제주의 좌측이 남자 우측이 여자입니다. ●아버지 현고(顯考)뒤에 관직(官職)이 있으면 관직을 쓰고, 관직에 출사하지 않았으나 선비였다면 처사(處士) 라고 쓰고, 관직도 없으시고 선비도 아니시면 학생(學生)이라고 쓴다. (예) 顯考行政事務官 府君 神位(현고 행정사무관 부군 신위) (예) 顯考處士府君 神位(현고처사부군 신위) (예) 顯考學生府君神位(현고학생부군 신위) ●어머니 현비유인(顯妣孺人) 뒤에 관향(貫鄕)을 쓴다...

1902년의 서울 궁궐사진

■ 1902년의 서울 궁궐사진들 (서프라이즈/1902년의 / 2009-9-27 08:34) ●잡초가 무성하여 사람이 살지 않는 유령의 집과 같다는 사연에 대한 연구 글에 나오는 사진들이다 ↑경복궁 강녕전(康寧殿) 국왕의 침전(寢殿). 정면 11칸, 측면 5칸의 큰 건물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865년 경복궁 중건 때 다시 지었다. 1917년 창덕궁 희정전(熙政殿)이 소실되자 강녕전을 헐어 그 재목으로 중건했다. 현재 경복궁에는 강녕전이 새로 복원됐다. ↑경복궁 집옥재(集玉齋) 경복궁이 중건된 뒤에 건립된 고종의 서재다. 중국풍 건물로 장방형의 높은 석조기단 위에 세워졌다. 중앙에 돌계단이 있다. 왼쪽의 팔각 2층 건물은 서고인 팔우정(八隅亭). 오른쪽으로 언뜻 협길당(協吉堂)이 ..

고려시대 묘지명

■ 고려시대 묘지명 [도서명] 고려묘지명 집성색인 [저 자] 김용선 편 [출판사]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수록내용] ○ 고려시대 묘지명 322점에 대한 원문/번역문 텍스트 수록 ○ 번역문 텍스트 ○ 2,986개의 역주와 주요 색인어 수록 ○ 탁본 이미지 205점 수록 묘지명(墓誌銘)은 무덤 옆에 파묻는 돌이나 도판(陶板)에 죽은 이의 이름, 신분, 행적 등을 기록한 글로 서 묘명(墓銘) 또는 지석(誌石)이라고도 불립니다. 묘지명은 사자(死者)의 일생, 그 인물이 산 시대상,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사학 연구 자료로서 귀중한 가치를 가진 자료입니다. 「고려 묘지명집성」은 활자매체로 간행하였던 원문, 번역문 및 역주와 아울러, 그 동안 저자가 틈틈이 모은 묘지명 탁본이나 원석의 사진자료도 함께 수록하고 있습..

송천서원(松泉書院)

■ 송천서원((松泉書院) ●요약 1695년(숙종 21)에 옥산면 송천리에 창건되었으며, 김사렴(金士廉)· 최유경(崔有慶)· 이정간(李貞幹)· 박광우(朴光佑)의 위패를 모셨다. 1711년에 사액을 받았으며, 이지충(李之忠)· 조강(趙綱)· 이대건(李大健)· 이제신(李濟臣)· 이인혁(李寅爀)· 최석정(崔錫鼎)· 남구만(南九萬)· 박문수(朴文秀)· 이종성(李宗成)· 이효석(李孝碩)· 김여량(金汝亮) 등을 추가 배향했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75년 지방 유림의 복원계획 공의로 국고 보조금으로, 지금의 위치에 복원했다. ●연 혁 송천서원은 1695년(숙종 21)에 청원군 옥산면 환희리 송천마을에 김사렴(金士廉), 최유경(崔有慶), 이정간(李貞幹), 박광우(朴光佑), 이..